새로 피어나는 봄을 지나고 싱그럽게 푸르른 여름을 지나, 매서운 겨울 추위에 떨어지기 전 노랗고 붉게 잎이 물드는 계절, 가을. 이즈음이면 아빠가 꼭 하는 말이 있다. "지금 봐야지 아니면 내년이나 볼 수 있어" 그 한마디를 시작으로 우리 가족은 3년 전부터 가을 풍경을 놓치지 않게 되었다.
타이밍이 중요한 계절, 가을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처럼 가을은 무엇보다 타이밍이 중요한 계절이다.
사계절이 분명한 나라에 살고 있지만 봄과 가을은 유난히 짧게 느껴진다. 특히 가을은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 사이에 잠시 스쳐 지나가기 때문에 조금만 시기를 놓쳐도 풍경이 빠르게 변해버리는 것 같다.
적절한 시기에 입을 수 있는 코트처럼 가을의 풍경을 느끼는 것 역시 타이밍이 중요하다. 너무 이르면 나뭇잎은 아직 노랗거나 붉은 옷으로 갈아입지 않고 너무 늦으면 매서운 찬 바람으로 인해 나뭇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된다. 이번에도 갑작스럽게 추워진 날씨로 겨울이 성큼 다가와 버렸다. 그렇기에, 가을 풍경은 늘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을 만든다. 잠깐 머물다가는 계절이기에 더 간절히 바라보게 된다.
우리가 반복해 찾는 가을의 장소들
우리 가족이 3년 동안 꾸준히 찾아가는 가을 명소는 두 곳이 있는데 첫 번째 장소는 '양평 용문사'이다.
용문사에는 약 1,100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오며 문화역사가 담긴 거대한 은행나무가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 나무를 만나려면 용문산을 올라야 하는데, 산보다 바다가 좋고 체력이 안 좋은 나는 언제나 힘들게 올라갔다. 하지만 산을 어느 정도 오르면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의 모습이 점점 보이기 시작하고 가까이서 은행나무를 보는 순간 숨이 차던 것도 잊게 된다. 하늘 끝까지 뻗어 오른 은행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으면 가족·연인·친구들과 그 풍경을 나누는 사람들 사이 우리 가족의 가을도 함께 쌓여간다. 그곳에서 누군가는 추억을 남기고 누군가는 은행나무나 부처님 앞에서 간절한 소원을 남기기도 한다.
양평 용문사와 함께 찾아가는 두 번째 가을 명소는 '원주 문막읍 반계리'다.
반계리의 은행나무는 800~1,000년의 세월을 보낸 천연기념물이다. 높이는 낮지만, 사방으로 길게 뻗은 가지의 형태가 독특하고 웅장하다. 방향에 따라 모습이 달라서 나무를 한 바퀴 돌면 전혀 다른 풍경을 만나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같은 장소여도 새롭게 느껴지는 장면들을 사진으로 남기곤 한다. 이곳은 외국인 관광객도 많았고, 반려동물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가을의 한 장면을 기록하는 모습을 보며 “가을은 정말 많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계절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나무는 서로 다른 형태를 하고 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수백 년을 지켜온 존재라는 공통점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가 그 곁을 스쳐 지나갔고 그만큼 두 나무는 하나의 문화와 역사를 품은 채 지금까지 서 있다. 세월은 변해도 사람들은 언제나 각자의 방식으로 노랗게 물든 거대한 은행나무 앞에서 가을을 느낀다. 누군가는 눈을 감고 소원을 빌고 누군가는 조용히 그 앞에 서서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매년 조금씩 다른 나를 마주한다. 지난해의 나와 올해의 나는 어땠는지 은행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길을 걸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어느 순간 단순한 계절의 감상이 아니라 나를 돌아보게 하는 하나의 ‘문화적 순간’이 되었다. 같은 나무와 같은 풍경이지만 그 사이를 지나가는 나는 해마다 새로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가을이 남기는 이야기
가을은 높고 맑은 하늘, 다채로운 색감, 선선한 바람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계절이면서도 떨어지는 잎과 차갑게 스며드는 바람 때문에 어딘가 쓸쓸한 계절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복합적인 감정이야말로 가을이 우리를 흔드는 방식이다. 책을 읽게 만들고 감수성이 예민해지고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는 때. 우리 가족이 매년 다시 가을을 찾아 나서는 이유도 결국 이 때문일 것이다. 짧아서 더 소중하고 잠깐이라 더 깊게 마음을 흔들기 때문이다.
올해의 가을도 어느덧 지나가고 있지만 내년의 가을은 또 다른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빠의 말처럼 “지금 아니면 못 본다.”는 마음으로 다시 그 풍경을 보러 갈 것이다. 가을은 매년 같아 보이지만 그 아래 서 있는 나는 매년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이 짧은 계절은 우리 가족에게도 나에게도 해마다 새로운 이야기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