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좋아하는 계절을 묻는 질문에 마냥 생일이 있는 계절 가을이 좋다고 답했다. 그리고 살다보니 가을이 좋은 수만가지 이유를 갖게 되었다.
극과 극은 싫으니까 봄과 가을이 남고 봄은 황사가 있으니 가을이 좋고, 구름 한 점 없는 높은 하늘이 좋고, 가을에만 생각나는 노래들이 생겨서 좋고, 짧게 스쳐가니 아쉬워서 좋다. 종래엔 가을 기억들이 퇴적되어서 다시 추억의 잎을 매달게 되는 것이다.
나에겐 무언가를 애호하는 일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도 다 이런식이다. 실은 아무 이유없이 사랑하기 시작하지만 이유를 덧붙여 스스로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의 대상들은 시간과 감정을 길어주기에 가치가 있는 일들이라고, 의심을 잠재운다.
거꾸로 생각하면 좋아하는 마음 덕에 사소한 것들이 이유가 된다. 이 조명, 온도, 습도 뭐 그런 것들마저도. 그 이유들은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들지만, 그것들이 사라진다고 곧 그 마음이 사그라들진 않는다.
베이징의 가을은 내가 알던 가을 만치 청명하지 않지만 여전히 이 계절을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올해는 특히 혹독한 추위를 먼저 겪고 맞이한 가을인지라 이를 만끽할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다. 고로 두 편에 걸쳐 베이징 내에 있는 자연과 건축이 어우러지는 미술관 세 곳을 다뤄보려고 한다.
红砖美术馆

첫 번째 장소는 베이징시 차오양구에 위치한 레드브릭 미술관이다. 시내와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지하철을 이용해 어렵지 않게 방문이 가능하다. 이곳은 이름처럼 미술관 건물과 정원에서 붉은 벽돌을 기본 건축 요소로 사용하여 자연과 현대미술을 어우르고 있다. 개중에도 붉은 벽돌의 무게감 위에 노란색 단풍이 흐드러진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이맘때뿐인 듯 하다.
레드브릭 미술관에서 현재 진행 중인 전시는 '중국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장페 이리의 개인전이나, 해외 작가의 전시도 곧잘 만나볼 수 있다. '국제문화 예술교류와 전파를 위해 고품질의 국제예술전시를 대중들에게 선보인다'는 사명에 걸맞게 2019년 프랑스대사관과 협력하여 '중국-프랑스 문화의 봄' 개막 및 시리즈 개최하였으며 2017년에는 독일과의 수교 45주년을 기념하여 '독일 비정형 예술전'을 열기도 했다. 한편으로 베이징현대무용단과 협력하여 크로스오버 댄스 프로젝트 '《形隐·不离》(형은·불리)'를 선보이는 등 예술에 대한 심층적이고 다차원적인 사고를 구축해오고 있다.
사실 이곳은 기존의 전시가 막을 내리고 계절이 바뀌면서 한달여간 폐장을 했었다. 그리고 10월이 채 지나기 전에 새로운 전시로 돌아왔다. 798예술구에 방문했을 당시 전시 개막일의 에너지가 너무 좋았기에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새로운 전시의 개막일에 찾아갔다.
张培力 ZHANG PEILI
2024.10.29-20245.03.02
입장료 : 정가 120위안 / 우대 100위안

장페이리는 1957년 항저우에서 출생으로 1984년 저장미술학원을 졸업하고 교수와 OCAT 상하이관 집행관장을 역임했다. 무엇보다 중국 최초의 비디오 예술 작품인 *30×30*(1989) 을 발표하며 '중국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게되었다. 베네치아, 리옹, 시드니, 광주, 부산 비엔날레 등에 참가했으며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 모던, 뉴욕 구겐하임, 파리 퐁피두 아트센터, 시카고 미술관 등 세계적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미술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들어봤을 국제 비엔날레와 미술관의 나열이 그의 명성을 짐작케 한다.
*OCAT 상하이 : 미디어 아트와 건축 디자인에 중점을둔 최초의 비영리 예술 기관

이번전시는 장페이리가 새롭게 선보이는 설치와 영상 작품 19점으로 구성된다. 그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사람과 기술의 관계는 도대체 무엇인가?" 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고,기술이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한편 사람들을 혼란과 갈등에 빠뜨리는 문제를 지적한다. 그리고 이를 새로운 작품들을 통해 인간의 처지와 모순, 사물의 양면을 보여주고자 한다.
위 작품을 보면 천장에 매달린 가스 실린더들은 회전하며, 양쪽 거울에 반사되어 무한한 잔물결로 이어진다. 거대하게 중첩된 일련의 가스실린더들이 형성하는 격자는 복잡한 관계를 구현하고, 각 교차점은 잠재적인 충돌의 단서로 작용한다.
장페이리의 예술 세계는 구조적 갈등과 심리적 감정의 '격자'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반복과 중복과 재귀 가운데, '격자'를 통해 현현된 그의 영감은 관객의 신체적 반응과 심리적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못을 바라보며 식사를 즐기거나 커피를 한잔 마실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내가 방문한 평일 오후의 시간대는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어 시공간을 초월한 느낌이 들었다면, 나들이 나온 가족들을 볼 수 있는 화창한 주말엔 더욱 활기가 느껴지는 곳이지 않을까 싶다.
南池子美术馆

두 번째 장소는 자금성으로 더욱 익숙한 고궁의 바로 옆에 위치한 난츠즈(남지자) 미술관이다. 마치 비밀의 화원같이 후통골목에 들어서면 점잖은 표지판만이 고개를 내밀고 있으나, 게이트를 넘어서면 상상치못한 공간이 나타난다. 매표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으레 그렇듯 큐알코드를 스캔해 입장료를 지불하고, 소쿠리에 담긴 팜플렛과 이번 전시에서 특별히 필요한 손전등을 챙기면 현실에서 잠시 벗어날 준비는 끝났다.
난츠즈 미술관은 스스로를 '중국 전통 미학과 건축의 특성을 계승하고 국제 전시 표준을 갖춘 예술 공간'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제삼자의 입장에서도 십분 동의할 수 있는 설명이다. 하나의 뜰을 둘러싸고 사면의 건물이 배치된 중국 전통 가옥 사합원(四合院)의 구조가 훤히 보일뿐더러 순목조건물이다. 해서 작은 연못 건너편으로 이미 지나온 전시관의 작품을 건물을 액자 삼아 보는 것이 큰 묘미이다.

무엇보다 나를 신나게 만들었던 것은 현재 진행중인 전시의 작가의 정체였다. 다들 지난 798예술구를 다룬 오피니언 '베이징도 예술합니다_798예술구(2)' 에 등장하는 창칭화랑을 기억할는지 모르겠다. 그곳에서 '생태실험실' 이라는 타이틀으로 단독 전시를 열었던 작가가 바로 주지걸(邱志杰)이다. 그 전시에서는 '자연이 창조한 방식으로 작품을 창조하는 작업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 중점이었는데, 이번 전시와는 테마가 완전히 달라서 만약 사전 정보가 없었더라면 동일 작가의 전시라고는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두달 연속으로 동일 작가의 개인전을 본 것만으로도 흔치 않은 경험이었고 또 너무나 다른 두 전시었기 때문에 주지걸(邱志杰)은 적어도 한 사람의 한국인에게 중국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로 각인이 되었다.

邱志杰个展 Qiu Zhijije Solo Exhbition
2024.9.10-2024.12.8
입장료 : 성인 60위안 / 학생 40위안

주지걸(邱志杰)는 중국 실험예술을 선도하는 중요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지난 30여 년 동안 끊임없이 학제 간, 다양한 재료, 다른 표현 형식이 융합된 예술 탐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하는데,이 부분이 지난 전시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비춰진 이유일 것이다.
이번 전시는 '경화수월(镜花水月)'을 주제로 작품 속에 있어야 할 물상의 일부를 난츠즈 미술관의 중국식 정원과 건축물에 실었다. 이로써 시각과 서사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참과 거짓이 뒤섞인 예술공간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창작 영감을 '서예'와 '시'라는 두 가지 고전적인 전통 예술 표현 형식에 융합시키고, 감열, 광학, 기계 장치 등의 현대 기술을 사용하여 작품을 공간 각 방면에 교묘하게 배치하여 전통 예술의 더 많은 가능성과 차원을 탐구하였다.

관람객들은 이번 전시에서 예술 감상자이자 참여자이다. 입장을 할 때 손전등을 함께 쥐어주는데, 이를 벽에 비추면 보이지 않던 글자가 나타난다. 이러한 인터랙티브 장치와 공간 배치를 통해 관객들은 점차 작품 속에 숨겨진 조각들을 짜깁기하고 해독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를 구상한다. 이는 다분히 '서사와 현실의 고정관념 타파'라는 의도가 담긴 전시방식이다.
그러나 '서예', '시'라는 고전 예술이 언어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 관해, 그리고 그 글자가 모국어가 아닌 중국어라는 점에 관해 '인터랙트'가 원활하지는 못했다. 지난 오피니언에서 다룬 UCCA에서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남들이 누리는 즐거움의 반의 반도 못 미쳤었을 것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모쪼록 베이징의 심장에 위치한 이곳 난츠즈 미술관은 외부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데 비해 모두가 사랑해마지 않을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베이징을 고궁과 이화원 등으로 대표되는 전통의 도시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기대에 충실히 부응할 것이다.
* 이어지는 오피니언에서는 사시사철 푸른 송미술관(松美术馆)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런데 가을이 가장 좋다고 말하면,
매번 친구들에게 '너무 짧잖아'라는 반박을 듣습니다.
그럴 때면 할 말이 없어지고는 했는데요,
'짧게 스쳐가니 아쉬워서 좋다'는 말씀이 정말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저도 가을의 아쉬움마저도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아는,
대충 사랑한다는 말로 퉁치지 않고 이유들을 자꾸 떠올릴 줄 아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사진은 직접 찍으신 거겠지요?
가장 좋아하신다는 계절이라는 것이 이해가 될 정도로
사진에서 가을의 흥취가 가득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제가 가을을 좋아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습니다.
미술에 소양이 깊진 않지만, 저도 미술관을 무척 좋아해요. 어딘가 고즈넉하고 평화롭고 천천히 사색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가 좋더라고요. 사진과 함께 소개해주신 일부 작품들과 주변 공간들이 모두 그렇게 보여서 흥미로웠습니다.
지영님이 미술을 애호하시는 마음이 느껴져 더 잘 읽히기도 했어요. 베이징 여행을 하게 된다면 저도 꼭 미술관 한 군데쯤은 방문해보고 싶네요. 2편도 바로 읽으러 가보겠습니다!
지영님의 큐레이팅에 따라 오랜만의 미술관, 더군다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베이징이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기회가 된다면 미술관에 같이 가서 지영님의 감상을 들으며 관람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기도 하네요:)
모든 계절과 모든 미술관에 대한 지영님의 큐레이팅과 감상을 기쁘게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