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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세랑 작가의 <지구에서 한아뿐>을 재밌게 읽어 비슷하게 인간이 아닌 것이 나오면서, 세계관이 장황하지 않고 나름 현실적인 작품을 찾던 중 리러하 작가의 <악마의 계약서는 만기 되지 않는다>를 추천하는 글을 보고 빌려 읽었다. 이름이 특이해서 날개에 있는 정보를 보니 늑골(rib), 폐(lung), 심장(heart)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에서 한 글자씩 따온 필명이라고. 제목과 더불어 필명에서부터 작가의 호러 취향이 보이는 것 같아 바로 빌렸다.
주인공인 서주는 서울에서 하숙집을 하시는 할머니의 집에서 사는 휴학생이다. 어느 날 아침 서주는 식사를 하기 위해 간 부엌에서 음식 쓰레기를 양푼에 비벼 먹는 사람을 본다. 낯빛부터 먹는 음식까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을 바라보는 서주에게 할머니는 지옥에 세를 줬다고 말한다. 지옥에 세를 준 방을 제외한 공용 공간은 평소와 같지만 지옥에 세를 준 방은 문을 열기만 하면 지옥의 뜨거운 열기와 벌을 받는 죄인들이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열린 문틈으로 뛰쳐나오는 죄인들이 만들어낸 핏자국들은 조금만 지나면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지옥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현실에서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악마와의 로맨스보다는 사채를 쓰고 집을 나가 놓고 돈을 받으러 오는 사채업자들이 찾아올 때마다 집에 돌아와 돈을 달라고 난리를 치는 차남과 할머니. 그리고 사실상 가족이지만 서류로는 가족관계를 증명할 수 없는 서주와 할머니의 관계가 더 눈에 들어왔다. 나이에 비해 정정하신 할머니가 가끔 헛것을 보고 허공에다 말을 하게 된 원인인 차남이 언제 집에 찾아와 할머니를 쓰러지게 할지 몰라 서주는 전전긍긍한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닭갈비 집이 있는 먹자골목에서 최근 덩치가 큰 남자가 어떤 사람을 찾는다는 이야기로 서주는 차남이 주변에 있다는 걸 눈치채고 주의를 살피며 오간다.
서주가 정확히 몇 살 때 할머니 집에 들어오게 됐다는 말은 없지만 어쨌든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준 할머닌데도 서주가 너무 눈치를 많이 보는 게 느껴져 짠했다. 차남을 썩을 놈이니 없는 자식 취급하면서도 어쨌든 피가 섞인 가족이라고 챙기는 게 보여서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악마라는 존재가 얼마나 달콤하게 느껴졌을까.
아르바이트 가기 전에 마시고 가라며 쪽지까지 써두고 미숫가루를 타주는 악마라니. 심지어 엄청 맛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누가 만들어둔지 몰라 버리지만 집에 늦게 들어오던 날 악마와 마주치고 서주는 악마가 그 미숫가루를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된다. 통성명을 한 이후로 악마와 서주는 가까워진다. 솔직히 악마와 서주의 감정선이 엄청 와닿지는 않았다. 악마의 비중이 생각보다 크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기댈 곳도 없고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서주가 거의 유일하게 마음을 연 상대여서일까, 서주와 할머니가 위기에 빠졌을 때 지옥의 불길로 만든 것들로 빠져나갈 틈을 만들어준 임팩트는 컸지만 사랑에 빠질 정도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고 잘생겼다는 외관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장례식 이후 서주는 어떻게 됐을까.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서주에게 재산을 남기겠다는 유서를 썼다면 좋겠지만 먼 친척이 장례식장에 찾아온 걸 보면 유서를 남겼다 하더라도 일이 복잡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페이지는 몇 장 안 남았는데 그런 현실적인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안 보여 초조해졌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기댈 곳 없던 (그렇다고 할머니에게 기대지도 않았지만) 서주의 유일한 휴식처 같았던 악마와 잘 된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신경 쓰여 결말이 썩 후련하지는 않았다. 책 제목에 대한 의문은 풀렸지만.
하숙집에 세 들어 사는 지옥과 악마라는 소재가 신선하기도 하고 가독성이 좋아 글 읽는 속도가 빠른 사람이라면 금방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정세랑 작가의 <지구에서 한아뿐>을 재밌게 읽어 비슷한 느낌의 책을 찾고 있다면 리러하 작가의 <악마의 계약서는 만기 되지 않는다>를 추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