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봄, 여름, 가을, 겨울 [도서/문학]

백수린 작가의『여름의 빌라』
글 입력 2022.04.05 14:38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계절감 있는 독서를 좋아한다. 여름에는 청량한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겨울에는 눈보라가 떠오르는 소설같이 계절에 어울리는 책을 일부러 골라 읽곤 한다.

 

어떤 책들은 처음 만났던 계절로 기억되는데, 백수린 작가의 단편집 ‘여름의 빌라’는 사계를 모두 담고 있다. 그래서 첫 완독을 마친 후에도 햇볕이 따뜻한 날, 장마철의 눅눅함에 지치는 날, 버석한 낙엽들이 쓸쓸하게 느껴지는 날, 옷을 아무리 겹쳐 입어도 한기를 떨쳐낼 수 없는 날이면 어울리는 단편들을 찾아 읽었다. 나에게 ‘여름의 빌라’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다.

 

책에 수록되어 있는 8편의 단편 소설 중, 가장 마음에 깊이 남아있는 소설을 소개해보려 한다.

 

 

131.jpg


 

 

흑설탕 캔디


 

할머니의 사탕을 기억하는가. 어릴 적, 할머니의 방에 들어가면 가지각색의 포장지로 쌓인 사탕들이 있었다. 포장지가 어찌나 화려하던지, 세상 모든 색을 모아둔 것만 같았다. 그만큼 맛도 다양했는데, 먹을 때마다 이에 달라붙던 분유 맛 사탕, 홍삼 맛 사탕, 커피 맛 사탕, 여러 과일 맛 사탕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흑설탕 사탕을 제일 좋아했다. 친구들과 나누어 먹던, 단순히 달기만 했던 사탕들과는 다르게 어딘가 오묘한 맛이 섞여 있는 그 사탕이 좋았다. 할머니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그 사탕을 아셨는지, 흑설탕 사탕만은 항상 떨어지지 않고 TV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탕을 먹으러 할머니의 방에 갔던 오랜 시간 동안 나는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사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흑설탕 캔디’는 주인공인 ‘나’가 할머니의 일기장을 읽고 상상을 가미해 서술해 나간다. 남동생 ‘상우’가 ‘나’에게 ‘브뤼니에 씨’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며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나’가 할머니와 같이 살게 시작된 것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이다. 할머니는 혼자만의 집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하고 손녀, 손자를 돌보기 위해 아들의 집으로 들어오신다. 그래서 ‘나’의 과거 곳곳에 남아있다. 어릴 적 먹었던 셀 수 없이 많은 도시락에, 자기 전 들었던 옛날이야기들에, 학교 가기 전 챙겼던 알림장과 준비물에. 할머니는 ‘나’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존재였다.


‘나’의 가족들은 프랑스에 주재원으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이민을 가게 된다. 프랑스에서의 삶에도 할머니는 여전히 ‘나’의 곁에 머문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할머니가 자신만의 시간을 보낼 방법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할머니 안의 고독은 눈처럼 소리 없이 쌓였다. 

처음엔 곧 녹을 수 있을 듯 얇은 막으로. 

하지만 이내 허리까지 차오를 정도로 두텁고 단단한 층을 이루었겠지

할머니가 막 생리를 시작한 나에게 생리대를 사주기 위해 슈퍼에 갔지만 탐폰들만 

잔뜩 늘어선 진열장 앞에서 그것들이 무엇인지 몰라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긴긴 하루를 견디다 지루해지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일부러 일본 식품점에 가지만 일본인 주인과 유창하게 의사소통 할 때마다 

자긍심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꼈다는 사실 역시 알지 못했다

 

183p

 

 

머나먼 타국에서 작은 방에 고립되어 가던 할머니에게 나갈 수 있는 조그만 틈이 생겼다. 같은 아파트에 살던 브뤼니에 씨를 만나고 할머니는 마음의 여유를 갖기 시작했다. 둘은 비록 대화할 수 없었지만, 한-불, 불-한 사전을 통해 마음을 교환했다.


대화 없이 진심을 전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을까? 할머니와 브뤼니에 씨는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사용했다. 브뤼니에 씨가 치는 피아노가 창가 앞을 지나던 할머니의 발걸음을 붙잡았듯이, 할머니가 연주하는 피아노도 브뤼니에 씨의 마음을 울린 것 같았다. 시디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은 둘 사이를 따뜻하고 부드럽게 메꾸었다.

 

할머니는 브뤼니에 씨와 시간을 보내면서도 종종 한국에서의 과거를 떠올렸다. 피아노를 보고 음악 선생님을, 음악을 들으며 피난길을 떠올렸다. 그리고 브뤼니에 씨가 탑을 쌓던 각설탕을 한 입 먹었을 때, 그것의 단맛은 인력거 손님이었던 여자가 쥐여줬던 흑설탕 캔디의 맛을 생각나게 했다. 고된 일상에서 달콤한 무언가가 주는 사소한 위로는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해서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 할머니가 떠올린 흑설탕 캔디처럼 말이다. 그리고 각설탕을 먹는 순간 느꼈던, 혀가 아릴 정도로 달았던 단맛으로 할머니는 프랑스에서의 고독을 조금은 잊었을지도 모른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주는 즐거움.

계획이 어그러진 순간에만 찾아오는 특별한 기쁨.

다 잃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어느새 한여름의 유성처럼 떨어져내리던 행복의 찰나들.

/

그리고 할머니는 일어나서 브뤼니에 씨와 함께 탑 위에 각설탕 하나를 더 쌓았다. 

하나를 더, 또 하나를 더. 그러다 탑이 무너져내릴 때까지. 

각설탕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할머니와 브리뉘에 씨가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릴 때까지.

 

201p

 

 

브뤼니에 씨와 할머니가 가까워지고 1년 즈음이 지났을 때, ‘나’의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온다. 프랑스로 왔던 것도, 프랑스를 떠나는 것도 무엇하나 할머니의 선택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냈던 브뤼니에 씨와의 관계마저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을 때, 할머니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나’의 상상 속에서 브뤼니에 씨와 할머니는 봄날의 공원에서 이별한다. 그리고 상우와 이야기했던 날의 밤, 꿈속에서 할머니를 만나고, 그 품 안에서 달콤한 냄새를 맡는다. 할머니가 손에 꼭 쥐고 주지 않았던, 달콤한 향기의 출처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왜인지 알 것만 같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했지만 놓아줄 수 없었던 마지막 한 가지는 각설탕에 담긴 추억이며, 바흐와 모차르트 음악이 언제나 은은하게 들려오고 우유가 섞인 달콤한 차의 향기가 나는 할머니의 봄이다.

 

 

나는 할머니의 품에 안기는 순간 어디선가 풍겨오는 달콤한 향을 맡는다.

하지만 할머니의 모자 속이나 치마 속 어디서도 향의 진원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나는 점점 초조해진다.

 / 

하지만 꿈속에서 할머니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안돼"

그리고 할머니는 또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다.

조금은 고통스러운 것 같지만, 사실은 조금도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 얼굴로.

주먹을 더 꼭 쥔 채. "이건 내 것이란다"

 

203, 204p

 

 

얼마 전 할머니가 나에게 젊었을 적의 가족사진을 보여주신 적이 있다. 흑백 사진 속의 할머니는 너무 어렸고, 처음 보는 얼굴들이 있었다. 그 순간의 나는 정말 어색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만 같아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할머니와 할머니의 엄마, 아빠. 그들도 나처럼 말하고, 울고, 웃고, 사랑했을 텐데. 마치 판타지 영화 속 등장인물을 마주한 것 같았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시간 앞에서 나는 이렇게나 작아지는구나.


어딘가 아득한 감정이 들었다. 흑백 사진에 색이 칠해지는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모르는 할머니의 가족을 그리워했을 할머니가 떠올라서. 그래서 알아가보기로 했다. 할머니가 간직하고 있는 봄은 어땠는지를 말이다. 일단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사탕부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TAG.jpg

 

 

[김민서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