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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에브리씽 웨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뭔가가 이상해

영화의 시작, 에블린은 세무 조사를 위한 준비에 한창이다. 정신없는 그녀에게 남편 레이먼드가 다가와 말을 전하려 하지만 에블린은 시간이 없다며 그를 외면한다. 레이먼드의 손에는 이혼 청구서가 들려있다. 다음으로 그녀를 찾아온 딸 조이도 그녀와 대화를 시도하지만 역시나 에블린은 냉랭하다. 아버지 웨이먼드에게 조이의 여자 친구 벡키를 ‘친한 친구’라고 소개한 에블린에게 실망한 조이는 에블린의 세탁소를 박차고 나가버린다. 조이를 쫓아간 에블린이 망설이다 겨우 내뱉은 말은 ‘살쪘다’는 잔소리. 결국 조이는 그대로 떠나버리고 만다.
전쟁과도 같은 하루를 보내는 에블린과 그녀에게 닿지 못하는 가족들의 목소리는 그들에게 결여된 무언가를 드러낸다. 또한 이는 그녀의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서막과도 같다. 그것은 목적도 욕망도 없는 순수한 혼돈의 화신, ‘조부 투바키’와의 싸움이자 그녀의 가족들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기 위한 전투이다. 그녀의 사명을 전해주기 위해 찾아온 ‘알파 레이먼드’는 언젠가부터 시작된 세상의 변화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알파 레이먼드 : 당신도 느끼고 있지? 뭔가가 이상해졌어. 옷이 전처럼 편하지 않고 머리카락도 왠지 부스스하고 심지어 커피 맛도… 이상해. 사회 규범들이 무너지고 있고 이젠 이웃을 믿지도 않고 밤마다 뜬눈으로 자신에게 물어.
에블린 : “어떻게 돌아가지?”
알파 레이먼드 : 그게 알파버스의 사명이야.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려놓는 것.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조부의 혼돈에 맞설 사람부터 찾아야 해.
에블린 : 그게 나라는 거야?
조부 투바키로 인해 시작된 세상의 변화는 ‘혼돈의 화신’인 조부 그 자신을 닮았다. 이때의 혼돈은 단순히 질서의 반의어가 아니라 무언가의 부재로 인한 혼돈이다. 그리고 곧바로 그녀에게 첫 번째 임무가 주어진다. 조부의 부하 디어드리에 맞서게 된 에블린이 다른 세계의 자신으로 ‘점프’하기 위해 취해야 하는 ‘통계적으로 개연성 없는 생뚱맞은 행동’, 즉 ‘점프대’는 ‘사랑을 고백하기’였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그녀에게 진심을 전하는 데 성공하자, 에블린은 무술을 연마한 세계의 자신과 연결된다.
옳음과 다정함

급박한 상황, 슬로 모션 처리된 장면에서 ‘I love you’를 외치는 에블린의 눈빛은 간절함으로 반짝인다. 그러나 디어드리를 물리친 기쁨도 잠시, 조부 투바키가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모든 우주와 모든 가능성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객관적 진리에 대한 믿음과 도덕관념’을 잃고 만 조부는 에블린의 딸 조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조부는 그녀에게 세상 모든 것을 올려놓은 베이글과 그것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알려준다. 그것은 무, 즉 ‘부질없음’이었다. 조부가 원했던 것은 뜻밖에도 그녀와의 싸움이 아닌 ‘동행’이었다.
조부 투바키 : 당신 딸이 느낀 것들을 나도 다 느꼈어. 그리고 당신을… 어머니로 둔 기쁨과 괴로움도 알지.
에블린 : 그럼 알 거 아니야. 걔를 위해선 옳은 일만 할 거란 거. 너를 위해서.
조부 투바키 : ‘옳음’은 두려워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좁은 상자야. 그 상자에 갇히는 기분은 내가 알지. 당신을 죽이려고 찾아다닌 게 아니야. 나와 같은 걸 볼 수 있는 사람을 찾던 거지. 내가 느끼는 걸 느끼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당신이야.
한편, 현 우주의 또 다른 분기점에서 레이먼드는 에블린의 세탁소를 찾아온 세무 조사관 디어드리를 설득하고 있었다. 에블린은 그가 일을 키우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뜻밖에도 디어드리는 그들에게 기회를 주기로 한다. 영문을 묻는 에블린에게 레이먼드는 ‘그냥 얘기만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알파버스의 수많은 사람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현 우주에서의 레이먼드 또한 그들에게 ‘얘기’하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내가 아는 거라곤 다정해야 한다는 거예요. 제발… 다정함을 보여줘.
나약한 줄로만 알았던 레이먼드의 가장 강력한 무기, ‘다정함’은 깐깐한 디어드리의 마음의 장벽을 두 번이나 무너뜨린다. ‘객관적 옳음’을 바탕으로 한 행정 절차, 즉 세무 조사를 통해 에블린의 가족을 재단하고자 했던 디어드리는 같은 상실을 경험한 에블린의 아픔에 동화되고 만 것이다. 에블린은 이 ‘다정함’의 힘으로 새롭게 혼돈과 맞설 용기를 얻는다.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돌이 된 에블린은 또 다른 돌, 조부에게 조금씩 다가간다.

조부 투바키 : 오지 마! 여기선 움직이면 안 돼. 당신은 돌이잖아.
에블린 : 규칙 따윈 없어! 너한테 갈 거야!
질서의 빈 자리를 메우는 것
사랑과 증오, 가난과 풍요,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채 넘쳐흐르는, 즉 혼돈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인간은 질서를 만들었다. 질서의 가장 강력한 형태는 선, 즉 ‘옳음’이다. 옳음은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옳음은 법이기도 하고, 절차이기도 하고, 상식이기도 하다. 옳음의 구속력 안에서 우리의 일상은 안정적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그 힘이 항상 건재하는 것은 아니다. 질서가 무너져 되돌아간 혼돈의 상태. 그것은 에블린이 갑작스레 뛰어들게 된 이 전쟁과도 같은 상황이기도 하고, ‘조부 투바키’ 그 자체이기도 하다. 객관적 옳음에 대한 기준을 상실한 조부는 혼돈의 화신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너무 많은 것’과 결별하기 위해 죽고자 하는 그녀를 멈춰 세운 것은 에블린의 목소리였다. ‘나는 너의 엄마야!’
레이먼드처럼 ‘다정함’을 무기로 싸우는 법을 배운 에블린은 웨이먼드에게 벡키를 조이의 ‘여자 친구’라고 소개한다. 이는 조이가 그토록 기다려온 순간이다. 상식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 서로에게 닿는 것. 즉, 진실한 사랑을 주고받는 것. 그러나 조이는 이 순간을 온전히 만끽하지 못한다. 사랑에 대한 간절함만큼, 불안이 생겨난다. 불가능한 영원에 대한 두려움이다.

에블린 : 어쩌면 네 말대로 그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지. 우릴 하찮은 쓰레기로 느끼게 해줄 새로운 뭔가가. 네가 그 모든 소음을 뚫고 날 찾아다닌 이유를 설명해줄 무언가가. 그게 무엇이든 간에 난 너랑 여기 있고 싶어. 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너와 여기 있고 싶어.
조이 : 그래서 뭐? 나머지 문제들은 다 무시할 거야? 뭐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잖아. 왜 그런 곳으로 가지 않는 거야? 엄마 딸의 모습이… 안 이런 곳. 이곳은 그래봐야… 상식이 통하는 것도 한 줌뿐인 곳이야.
에블린 : 그럼 소중히 할 거야. 그 한 줌의 시간을.
‘상식이 통하는 것도 한 줌의 시간뿐’이란 표현은 앞서 조부의 입을 빌려 등장한 바 있다. 조부는 조이의 마음을 통해 에블린을 설득하려 했다. ‘정은 깊을수록 상심이 크고 아름다운 꿈은 쉽게 깨지는 법’. ‘모든 건 알아서 균형을 되찾’는다. 조부는 이러한 세상의 본질을 ‘허무’라 명명하고 그것과 결별하려 했다. 그러나 에블린은 조부와 같은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다가간다. ‘옳음’이라는 객관적 질서가 사라진 세계에서 어떤 가치도 찾지 못한 조부에게 에블린은 단 하나의 진실을 들려준다. 조부가 ‘그 모든 소음을 뚫고’ 그녀를 찾아다닌 이유. 그것은 조이와 에블린이 나눈 뜨거운 포옹과 에블린과 레이먼드가 나눈 진한 키스 속에 있다.
이상해줘서 고마워

이 영화는 온통 어이없는 장면들로 넘쳐흐른다. 점프대, 즉 다른 세계의 자신과 연결되기 위해 취해야 하는 ‘통계적 필연성이 낮은’ 행동들은 관객의 상상을 한참 뛰어넘는다. 그 가운데 최고는 의미심장한 모양의 상패를 항문에 쑤셔 넣기 위해 벌이는 각축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긴박하고 진지한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은 화면 밖의 상식마저도 뒤흔든다. 이는 B급 영화의 특성을 뛰어넘어 오직 이 이야기만을 위해 설계된 연출로 느껴질 만큼 절묘하다.
상식과 질서는 우리의 일상을 고정하는 울타리이자 마음을 보호해 주는 장벽이다. 상식적으로 행동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상처받을 일이 그리 많지는 않다. 하지만 한 번도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세무 조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에블린의 냉랭한 태도에 그녀의 가족들이 서운함을 느낀 것처럼, 상식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찬 세상이다. 결국 사랑이란 이 모든 소음을 뚫고 상식이라는 문 뒤에 숨어있는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근본적인 속성은 의외로 ‘이상함’이 아닐까. 그 모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굳이 내 곁에 있는 이상한 사람들에게, 나는 오늘도 사랑을 배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