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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가면 너머로 엿보는 가장 위험한 광경 - 이머시브 시어터 ‘슬립 노 모어’ [공연]

Hello There, HELL HERE.

by 이진 에디터
2025.08.20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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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옳은 말이지만 무심코 흘리기 쉬운 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한 공연을 보러, 혹은 체험하러 갔을 땐 이 말의 진짜 의미를 뼈저리게 실감할 것이다.


관객은 객석에 앉지 않는다. 고정된 건 백여 개의 방, 즉 무대뿐이다. 배우와 관객은 걷고, 뛰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약 3시간 동안 계속 움직인다. 이야기를 보고 싶은 캐릭터 몇 명만 쫓을 수도 있고, 또는 특정 공간에 머무르며 여러 명의 캐릭터를 만나도 된다. 대사 없이 연기와 움직임, 춤만으로 진행되는 무언극, 즉 논버벌(Non-verbal) 공연이지만 운이 좋으면 배우에게 선택돼 캐릭터의 숨겨진 이야기를 대사로 들을 수도 있다.


목격한 장면들을 조합하면 이야기가 완성된다. 기승전결이 갖춰진 서사일 수도 있고, 혹은 파편적인 장면들의 나열일 수도 있다. 어느 쪽도 정답은 아니다. 한 번 보곤 모든 인물의 이야기를 아는 건 불가능하다. 한 무대에서 한 공연만이 진행되는 일반 극과는 달리, 이 공연은 여러 무대에서 여러 인물이 동시에 자기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건 결코 공연의 전부가 아니다. 2003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돼 2009년 미국 보스턴, 2011년부터 2025년까지 미국 뉴욕, 2016년부터 현재까지 중국 상하이를 거쳐 2025년 7월 대한민국 서울에 상륙한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는 이머시브 장르를 개척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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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머시브 아트(Immersive art), 즉 몰입형 예술의 사전적 의미는 ‘관객과 공연자 사이 제4의 벽을 넘어선 공간에 예술 작품을 설치하여 관객의 몰입감을 강화하는 예술 기법’이다. <슬립 노 모어>는 음악이 없는 연극이라기엔 배경음악을 많이 활용하고, 공연 전후 ‘맨덜리 바’에선 배우들이 노래를 부른다. 뮤지컬이라기엔 본 공연에선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슬립 노 모어>는 연극도 뮤지컬도 아닌 ‘이머시브 시어터(Immersive Theater)’라고 하는 것이 적합하다. 이머시브의 핵심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것, 또한 관객의 몰입과 적극성이다.


영국 공연 제작사 ‘펀치드렁크’는 셰익스피어 4대 비극 <맥베스>를 스릴러·느와르·액션으로 재구성해 2003년 런던에서 <슬립 노 모어>를 처음 선보였다. 극은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의 스릴러 영화들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뉴욕 공연장인 ‘매키트릭 호텔(Mckittrick Hotel)’은 히치콕 영화 <현기증>의 호텔 이름을 딴 것이다. 또한 공연 전후에 방문하게 되는 재즈 바 ‘맨덜리’는 영화 <레베카>의 배경이 되는 대저택 이름이다.


<슬립 노 모어> 등장인물엔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을 연상시키는 인물(맥더프 가에서 일하는 캠벨 부인) 및 ‘이히(나)’를 연상시키는 인물(아그네스·혹은 캠벨 부인이 안주인 레이디 맥더프를 조종하고 가스라이팅하는 관계성)도 존재한다. 중국 상하이 공연장은 ‘매키넌 호텔(Mckinnon Hotel)’이다. 중국 설화 <백사전> 관련 인물들과 이야기는 상하이에서만 체험할 수 있어 큰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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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마녀에게 왕이 된단 예언을 받은 스코틀랜드 장군 맥베스. 아내 레이디 맥베스의 부추김과 스스로의 욕망에 눈이 멀어 왕을 살해하고, 친구까지 살해하다 결국 자신 또한 파멸에 이르는 것이 <맥베스>의 결말이다. <슬립 노 모어>는 맥베스가 던컨 왕을 살해한 후 죄책감에 사로잡혀 내뱉는 대사 ‘Sleep no more’, 즉 ‘다시는 잠들지 못하리라’에서 따온 것이다. <슬립 노 모어>의 관객, 즉 가면을 쓴 유령들 또한(무대와 객석의 경계 없이 코앞에서 공연이 진행된다. 따라서 배우와 관객을 구분하기 위해 관객은 하얀 가면을 쓴다. 공연 진행을 돕는 스텝들은 검은 가면을 쓴다) 세 번의 루프 동안 잠들지도, 쉬지도 못한다.


극은 의도적으로 불친절하게 만들어졌다. 한 번의 체험만으론 절대 모든 인물의 이야기를 알 수 없는 계산적인 설계는 혁신이자 파격이다. 또한 극도로 어두운 공연장에선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어렵다. 영화관이었던 옛 대한극장을 개조한 서울 공연장 ‘매키탄 호텔(Mckithan Hotel)’은 계단의 층고가 높다. 특정 캐릭터를 쫓다 보면 건물 3~4층을 한꺼번에 빠른 속도로 오르기도 해 체력과 기동력은 필수다.


인파에 치이다 보면 배우를 놓치는 일도 빈번하다. 다른 관객과 몸이 부딪치고 발이 밟히기도 한다. 공연 전엔 캐스팅보드가 공개되지 않아 출연 배우가 누군지, 배우들이 어떤 역할을 맡는지도 알 수 없다. <맥베스>를 원작으로 한 공연인 걸 알고 가도, 정작 맥베스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단 뜻이다. 일반적인 공연은 스포일러는 물론이고 일부러 작품의 컨셉조차 모르고 가는 관객도 많다. 편견 없이 순수하고 열린 마음으로 작품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다. 반대로 <슬립 노 모어>는 정보를 찾아보고 가지 않으면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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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진입장벽이 높지만, 그럼에도 <슬립 노 모어>는 인생을 살며 한 번쯤은 꼭 체험해 봐야 후회가 안 남을 작품이다. 관객이 공간과 배우를 찾으며 적극적으로 작품을 관람하는 이머시브 형식, 완성도 높고 디테일하게 구현된 공간들은 더없이 매력적이다. 대사가 없음에도 연기와 움직임만으로 스토리와 감정을 전달하는 배우들의 표현력과 몰입력 또한 경이롭다.


특수한 공연 형태와 퀄리티 높은 공간·독특한 연출이 합쳐져 다른 공연에선 쉽게 볼 수 없는 강렬하고 매력적인 장면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세 마녀(운명·남자·대머리)의 두 번째 예언이자 광기 어린 악마 숭배 같기도 한 EDM 파티, 즉 ‘Rave(광란의 파티)’ 장면이 그것이다. 살인을 저지른 맥베스가 피를 뒤집어쓴 채 침실 욕조에 웅크려 있고, 레이디 맥베스가 그의 피를 씻겨주는 장면 또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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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루프 동안 주요 배우들이 모두 모이는 만찬 장면에선 같은 장면이 반복된다. 하지만 마지막 루프 엔딩은 다르다. 권력욕에 눈이 멀어 살인이란 죄를 지은 맥베스는 대가를 치른다. 복수 당하는, 혹은 심판받는 그의 마지막은 그가 루프 내내 보여준 잔혹하고 폭력적인 살인들과는 달리 고요하다. 그가 왕이 된다고 예언한 마녀들, 그의 숨은 권력욕을 자극한 레이디 맥베스 또한 감정 없는 얼굴로 최후를 지켜본다. 가면 뒤에 숨어 그를 관찰, 혹은 관음하던 유령들 또한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적극적으로 훔쳐보다 연회장을 단숨에 빠져나간다.


세 번의 루프라는 반복되는 삶에서도 계속 같은 선택을 해 결국 혼자가 된 그의 모습에선 우린 무엇을 읽어야 할까. 기회가 여러 차례 주어지는데도 계속 같은 길을 택하고, 운명을 거부하지 못하는 건 맥베스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욕망이 있는 인간이라면 모두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래서 매키탄 호텔에 갇힌 모든 이들은 오늘 밤도 잠들지 못한다. 나만의 욕망을 찾아 나서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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