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 둘 입장하는 관객들. 차례대로 마주하는 건 무대 위에 미로처럼 놓인 밧줄과 그 사이에 정지한 상태로 놓여있는 마네킹. 조명이 무대 위로 집중되고 마네킹은 여전히 정지한 상태로 놓여있다. 그 사이로 관객들의 숨소리와 의자의 덜컹거림, 자세를 고치는 소리와 함께 퍼포머의 준비된 사운드가 순서대로 입혀진다.
모두의 눈동자가 사운드 퍼포머에 집중하는 사이 무대에서 무언가 벌떡, 눈동자가 일제히 움직인다.
헉! 마네킹이 움직인다!

움직임과 사운드의 결합
무대 위 마네킹으로 보여진 것은 바로 움직임 퍼포머 오현택이다. 지난 8월 5일부터 6일까지 서강대학교 메리홀 대극장에서 진행된 공연 [TRANS III - 주어 없는 움직임]은 움직임 퍼포머 오현택과 사운드 퍼포머 오명석이 공동으로 작업한 실험적 퍼포먼스이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주어 없이 시작된 공연은 진행되면서 계속해서 주어가 바뀐다. 입장하는 관객이 될 수도, 사운드나 안무가가 될 수도, 밧줄이 될 수도, 그 무엇이든 주어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주어가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행위를 하는 사람에 따라서, 지켜보는 사람에 따라서 각자 제 안의 주어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바뀌는 주어 속에서 아무도 주체를 강요하지 않고 아무도 계획된 대로 순응하지 않는다. 그저 감각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만이 제 안에서 주어를 형성할 뿐이다.
오현택 VS 밧줄

ⓒ최근우
퍼포머 오현택은 본인의 몸 하나로 밧줄에 맞선다. 처음에는 가지런한 밧줄 미로 사이 사이를 온몸을 써서 탐색한다. 밧줄을 전혀 건드리지도 않고 부딪치지도 않으며 놓여 있는 밧줄 틈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런 밧줄을 꼬아보기도 하고 모양을 만들기도 하면서 조금씩 건드리고 밧줄을 타보기도 한다. 무대 가장자리를 밧줄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힘겹게 타기 시작했을 때는 그가 매우 힘든 여정 속에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가벼운 몸짓으로 밧줄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밧줄에 순응하지 않으려, 억압당하지 않으려, 밧줄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밧줄을 이끌고 싶었던, 앞다투어 주어를 차지하고자 하는 열정이 머리에 맺힌 송골송골한 땀에서 보였다. 그런 밧줄에 저항하면서 본인의 몸을 연신 땅에 내리치는 장면이 있었다. 그의 실감 나는 묘사는 보는 내 마음을 쪼그라들게 했고 내 등이 땅에 꽂혀 멍드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비로소 내가 저 밧줄에 감싸진 주어가 된 것이다.

ⓒ최근우
처음에는 밧줄이라는 구조에 순응해 열을 지켰지만 조금씩 그 안에 분열이 일어나고 밧줄에 저항하면서 잠시 밧줄을 지배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밧줄을 어깨에 올릴수록 몸 전체를 감싸는 밧줄로 작용하며 본인을 지배하는 주어는 순식간에 바뀐다. 그리고 남은 것은 퍼포머를 감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뒤섞인 밧줄 덩어리이다.
오명석 VS 정적
"듣는 것을 넘어 몸으로 감각되며 음악이라기보다 환경"
정적마저 사운드가 될 수 있는가, 이에 오명석은 기꺼이 정적마저 사운드로 만든다. 처음에는 낯설었다. 정확히 어떤 사운드였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한 버튼을 누르니 출력된 공기음을 시작으로 금속선 소리, 무엇인가 돌아가는 소리, 파이프 소리 같은 것들이 차례대로 입혀졌다. 소리를 분류하고 싶어서 눈을 감고 들었는데 눈을 뜨니 모든 소리가 합쳐졌다.
그리고 오현택 안무가의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시각에 매료되어 청각으로 들리는 사운드는 동떨어진 느낌보다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로 공간에 잘 어우러졌다. 공간 안의 가구들에서 시작한 사운드는 점점 안무에 어울리는 거대하고 웅장한 소리로 변했고 어떤 때는 정적마저 사운드로 만들었다. 사운드 사이사이에 느껴지는 공명과 정적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긴장감을 만들어냈고 공연에 더욱 집중하게 했다.
“우리는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가, 아니면 움직이게 되는가?”
현대 사회 구조로 인한 동일성과 표준화가 개인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에 관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는 밧줄과 사운드라는 오브제를 통해 각각 만들어지지만, 결국엔 합쳐져 하나의 무대를 이룬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려면 누구나 어느 정도의 규칙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 정도를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현대 사회에서 내가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사회에 이끌리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한 만큼 어렵긴 하지만 필수적인 것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것이 나를 잃지 않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양한 개인들이 모여 복잡한 동시에 단순화되어가고 있는 모순적인 사회에서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의식적으로 필요한 행위이고, 그 이야기를 두 퍼포머는 우리 머릿속에 자각시켜주려 하고 있다.

ⓒ최근우
개인을 드러내기 용이해지고 있다. 이전보다 많은 개인이 수용되지만 그만큼 많은 개인이 보편화되기도 한다. 이 사이에서 우리는 밧줄로 만들어진 미로를 영원히 따라갈 것인지,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밧줄 위를 올라타 볼 것인지 생각해보는 것에 마모되지 않아야 한다. 물론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것이 쉬울 수 있다. 그리고 그게 정답이라고 배워왔을 수도 있다. 반대로 길을 타파하고 주체성과 개성을 기르는 것이 정답이라고 배워왔을 수도 있다. 사회로부터. 하지만 어느 쪽에도 정답은 없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면 된다. 정해진 길을 따라갈 수도, 새로운 길을 만들 수도 있다. 그 선택을 누구도 비난할 수는 없다.
다만 주어 없이 움직이지는 말라는 것이다. 어떤 움직임이든 상관없으니까, 움직임의 결과따위 중요치 않으니까, 그 움직임을 선택하는 주체만은 본인이었으면 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주어 있는 움직임이야말로 형체 없는 덩어리를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