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연의 선율>은 많은 대사나 기교 없이 아이들의 영역을 비춘다.
사랑과 보호를 원하는 수연과 선율, 그리고 사랑을 줄 권력이 있는 동시에 책임은 없는 어른들을 여름 속 아이들의 시각에서 담아낸다.
“수연이는 혼자니?”
“네?”
“언니나 동생…. 없어?”
“아, 네... 혼자예요.”
“외로웠겠다.”
형제 관계를 묻는 말에 존재를 질문받는 것처럼 움츠러든 열세 살. 수연이는 말 그대로 혼자다. 태어날 때부터 안 계셨던 부모님에, 유일한 보호자였던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복지사, 아는 할머니 등 이따금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있지만 그들이 가족에 대한 수연의 허기를 채워주지는 못한다.
수연은 주변 어른들에게 끊임없이 울타리가 되어달라는 신호를 보내본다. 그러나, 표면만 건드리는 위로와 동정의 따뜻한 눈빛이 책임 앞에선 단번에 차가워진다.
수연은 어른들의 계산법으로 그어진 ‘선’ 앞에서 매번 무력해지고 만다.

곧 보육원에 들어갈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한 수연에겐 ‘공식적’ 가족이 필요하다. 자신과 비슷한 아이들이 존재할 그곳에 가게 되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
생존 전략이 필요한 수연의 눈에 ‘선율’이라는 아이가 들어온다. 7살 선율은 유리와 태호에게 입양되어 자라고 있다. 부부의 유튜브 채널에는 가족의 따뜻하고 소소한 일상, 입양에 대한 조언, 소신, 고충이 모두 담겨있다.
할머니의 영정이 놓인 방에 누운 수연은, 영상 속 선율을 바라본다. 가족의 울타리 속에서 물과 햇빛을 머금으며 자랄 아이의 표정이 어딘가 어둡다.

‘혼자’라는 감각은 아이를 어른으로 만들어 놓았다.
빠르게 선율과 친해진 수연은 가족의 집까지 입성하며 엄마인 유리와의 유대관계를 쌓고, 유리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뚝딱 차려낸다. 피곤해하는 유리에게 선율의 하원길을 책임지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영화를 보며 아이가 아이답지 못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건 수연 나름의 생존 전략이다. 가족의 눈에 들기 위한 최선의 전략.
그러나 관객이 기억해야 할 것은, 수연이 유리를 위해 만든 갈치조림의 까맣게 탄 밑바닥 아닐까. 미숙한 아이들의 미숙한 생존 전략은, 필요에 따라 어른보다 치밀하게 세워지곤 한다. 유리는 수연에게 꿈이 무엇인지 묻는다. 어린 입술 새로 “좋은 엄마”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받지 못한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어른스럽고도 가엽다.

7살 선율은 ‘지켜주는 통’에 다 죽어가는 곤충을 넣고, 부순 크래커를 넣어주며 정성을 다해 보살핀다. 작은 플라스틱 통 속 존재들을 세상의 변수와 공포로부터 차단하는 선율은 자신이 생각하는 보살핌의 행위를 해나간다. 그런 선율이 유리와 태호의 집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착하고, 말 잘 듣는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다.
수연이 주체성과 어른스러움을 무기로 삼았다면, 선율의 ‘표현성 언어장애’는 버림받음에 대비하는 또 다른 생존 방식이다. 침대 밑이나 옷장 안에서만 잠들 수 있는 선율의 공포는 ‘지켜주는 통’에 다치고 병든 곤충을 가두는 행위에 투영되어 있다.

쏟아지는 장대비 속 아이들은 우산 없이 재개발 현수막 밑을 지난다.
유리와 태호는 책임을 피해 달아났고, 아이들이 남겨진 동네는 곧 거대한 변화를 겪을 예정이다. 두 아이는 옥상의 그네에 앉아 철 소리와 매연이 가득한 재개발 구역을 내려다본다.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보는 쌓아 올림과 파괴의 반복.
현장을 내려다보는 두 개의 작은 등을 마주하니, 아이들을 감쌀 물방울이, ‘지켜주는 통’이 그 무엇보다 절실하게 느껴졌다.

신용불량자에 실종 상태였던 할아버지가 돌아오고, 중학교 교복을 입은 수연은 밥상을 차린다. 그러고는 한 보육원을 찾아가, 놀이터에 홀로 있는 선율을 본다. 드리워진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선율의 모습은 여전히 작고 외롭다.
선율이 수연을 돌아본다. 눈빛에선 7살의 해맑음을 찾아볼 수 없다. 원망과 체념이 공존하는, 지친 두 눈. 마주 본 수연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생존 전략은 달라도, 외로움은 서로를 알아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