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의 자신감으로 뭘 해도 될 것 같은 날이 있다.
레몬과 라임의 상큼함이 치솟는 날. 엉뚱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싶고 비가 와도 맑아 보이는 세상. 알고리즘에 박혜경의 레몬트리가 떴다.
홀린 듯 재생을 누르고 대나무 돗자리에 나른하게 누워서 바로 앞에 있는 베란다 창문을 바라보면 깨끗한 하늘에 여러 모양의 구름이 둥둥 떠다닌다.
봄의 여린 연두색 잎에서 조금은 더 짙고 단단해진 여름의 초록빛을 한 모금 마신 나무. 집안의 모든 곳에 창문을 열어놨더니 선풍기가 필요 없을 정도로 시원하고 연한 바람이 분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하루.
오늘은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두고 싶어서 밥도 식탁에서 안 먹었다. 베란다에 쪼그려 앉아 아기들이 놀이터로 뛰어가는 걸 보면서 오이가 가득 든 냉면을 먹었다. 집에서 먹는 냉면에는 오이가 반이다.
아삭하고 시원하고 새콤한 냉면을 우물우물 씹으며 "올해는 매미가 좀 늦게 오네" 괜스레 아쉬움의 점들도 남겼다.
있으면 맴맴 울어 귀가 아파도 없으면, 괜히 여름의 친구가 안온 것 같아 매일매일 기다리게 되는 게 많은 여름. 그렇게 엄마가 틀어둔 라디오를 친구 삼아 여름을 구경했다.
그러다 심심해서 지난여름 제주도에서 산 여름 문구사라는 책을 천천히 읽는다. 누군가의 일기장을 엿보는 느낌 귀엽고 닮고 싶은 책이다.
이리저리 글쓴이와 상상의 대화를 나누다 지난여름의 추억을 되새겨 보기도 하고 뒹굴뒹굴하다 닿은 과일 접시에는 누군가의 애정이 담겨 있다. 아주 먹기 좋게 한 입 크기로 잘라둔 체리, 살구, 참외, 자두, 복숭아는 달고 상큼하고 시원하다.
역시 여러 색채의 제철이 좋다.
구름처럼 둥둥거리며 누워있었더니 어느새 저녁에서 밤이다.
낮에는 여러 새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밤에는 풀벌레들의 잠꼬대를 들었다. 여름밤엔 유독 해가 안 진다. 진한 남색 밤하늘의 별들 사이로 항공로의 비행기가 별똥별처럼 사라진다.
여름은 추억을 부르는 향이 있다. 눈을 감고 킁킁 맡아보면 시원한 풀냄새와 푹 젖은 흙 향기가 난다. 왜 사람들은 청춘을 생각할 때 여름을 떠올릴까 이것저것 혼자만의 답을 내놓다가 지금 내가 이러고 있는 것도 청춘의 하루 중 하나겠지 생각하며 스르르 잠이 든다.
연한 산들바람을 맞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