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배명훈이 데뷔 20주년을 맞아 선보인 한국형 판타지 『기병과 마법사』는 한반도 북부 너머의 대륙과 전근대를 연상하는 상상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작품이다. 서양 중세 속 '기사'는 우리 문화권의 '기병'으로 재탄생하며 작가 특유의 한국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실제로 한반도 지역 내 기병에 관한 역사학·군사학 분야의 논문 수십 편을 찾아본 작가 배명훈은 마목인, 초원, 온돌의 신비함 등 당시의 사회 문화적 배경을 책 곳곳에 녹여냈다. 그 때문인지 『기병과 마법사』의 1부를 읽는 데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처음 듣는 단어는 물론이거니와 새롭게 변형된 명칭들에 몇 번씩이나 책을 덮고 사전을 찾아봤다.
무려 400쪽에 달하는 장편소설의 초입부터 난관을 겪다 보니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표가 절로 자라났다. 그렇지만 작가가 창조한 '기병'과 '마법사'의 세계는 스스로 움직이는 힘이 있었고, 자연스레 그 안에 몸을 맡기다 보니 몰랐던 단어들이 서서히 이해되는 마법이 발동됐다.
마치 한 편의 전쟁 영화를 보는 듯한 박진감 넘치는 전개와 생생한 전술 묘사에 책을 멈추지 않고 읽어내렸던 것 같다. 그러면서 '영윤해', '은낙조', '토르가이', '다르나킨', '하살루타', '마로하' 등 어딘가 익숙한 듯 이질적인 이름들과 '술름고리', '거문담', '보창', '보사', '좌기대', '등자' 등 난생처음 듣는 표현들 역시 차차 익숙해졌다.
『기병과 마법사』는 '영윤해'라는 가장 약하고 특별한 고리, 작은 파멸의 신전이자 이 세계의 예언자인 주인공을 통해 힘차게 질주한다. 그녀는 1021년마다 나타나는 파괴자(괴물)를 저지하기 위해 자신을 구하고, 또한 세계를 구한다. 원래라면 역사에 한 줄조차 기록되지 못했을 운명인 그녀가 세상과 싸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긴 미세한 균열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파멸을 덮친다.
"엄마, 나도 송곳이라고. 아빠를 똑 닮은 송곳이라니까. 이대로 영원히 지워지고 싶지 않아. 이렇게 사라지고 싶지 않다고." - p.30
"방법은 모르지만, 정말로 윤해가 자신을 구하기로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그러자 변화가 밀려왔다." - p.44
"이제 모든 것은 윤해의 뜻대로 되었다. 이겨야 할 싸움이 있었고, 그 싸움을 이겨냈다. (중략) 윤해는 칼날이었고, 주머니를 나온 송곳이었다." - p.245
불안함을 이기지 못해 폭군이 된 왕의 자애롭고 현명한 형 '영유'의 딸로서 살기 위해 침묵을 택했던 '영윤해'. 그녀는 난폭한 약혼자 '종마금'으로부터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송곳이 주머니를 나오고부터 발휘된 마법은 곰개를, 봉황을, 화염과 벼락을, 마침내 다른 시대의 예언자들을 부르며 앞으로 있을 1021년간의 평화를 가져왔다.
마법사 '영윤해'와 함께 재앙 앞에서도 불같이 달려들어 전투를 승리로 이끈 기병의 수장, 좌기대대감 '달낙현'(다르나킨)은 글에 능한 경작인과 승마에 능한 마목인의 특징을 모두 지니고 태어났다. '달낙현'은 '영윤해'를 만나고 나서야 처음으로 마목인의 경지를 깨닫고 속도만 남은 존재가 되었다. 마법 같은 그녀와의 만남에 그는 날개이자 말이 되어 그녀가 믿고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초원의 동반자가 된다.
그와 달리 과거 '영윤해'와 혼담을 나누었던 '은낙조'는 그녀에 대한 연모의 감정을 끝까지 마법으로 착각한다. 시골의 열 살짜리도 다 아는 이야기를 천문을 공부하는 일관 '은낙조'만 몰랐기에 둘은 우애 깊은 친구 사이로 남는다. 마법으로도 관장할 수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인데도 그 단순한 명제를 믿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와 함께 1021년의 진실을 좇은 유일한 사람으로서 소중한 은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그이다.
이처럼 '영윤해'의 주변에 있는 인물들은 그녀와 만나며 저마다 다른 '마법'을 체험한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수동적인 사람이 능동적인 사람으로 변하고, 나쁜 사람이 착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마법을 겪었을 뿐이지 내재한 본질은 똑같다. 그들은 마법 없이도 마법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로서 서로에게 위안과 안식이 되어준다.
'영윤해'가 시대를 넘어 다양한 세계에 존재하는 예언자들을 불러 종말을 무찔렀듯 『기병과 마법사』는 사람 간의 연대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애초부터 '영윤해'에 대한 사람들의 신의가 없었다면 이 모든 게 비극으로 끝났을 터다. '하살루타'가 겨울을 나기 위한 털옷을 넘겨주지 않았다면 역모는 실패했을 것이고, 수만 병의 기병이 '영윤해'를 신뢰하지 않았다면 궤멸했을 것이고, '달낙현'이 '영윤해'를 파괴자라 믿고 죽였다면 세계는 멸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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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세상과 세상을 연결하는 문이 되어준 수많은 '영윤해'의 싸움은, 우리의 세계를 몇 번이고 구했다. 가장 악한 고리를 가장 약한 고리가 끊어낸 이야기는 앞으로 닥칠 싸움들이 그리 두렵고 무섭지는 않으리라 강조한다. 무엇보다 우리 곁에도 '달낙현’과 같은 용감하고 든든한 기병이 있을 테니, 부디 숨지 말고 '너'의 세계를 지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