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나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즐겨보았다. 저물어가는 일요일 밤을 달래고,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기에 앞서 옹기종기 티비 앞에 앉아 희극인들의 개그를 보는 것은 나를 포함한 당시 대다수 사람들의 루틴이었다. 그중 한 코너가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떠오른다. 사극 콘셉트의 코너였고, 감정이 여린 왕, 장군, 신하가 서로에게 핀잔을 주며 만담을 나누는 내용이었다.
시대극인 만큼 연기자들은 모두 고대의 전투 복장을 갖춰 입었다. 그들 가운데, 유난히 낯선 옷과 머리스타일을 갖춘 인물이 눈에 띈다. 살집이 많으며, 앞머리를 밀고 긴 뒷머리를 땋은 그는 조심스럽게 신하들 틈에 숨어든다. 관객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에게 쏠린다.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에 그를 발견한 장군이 크게 소리친다. “오랑캐다!”
어린 나는 오랑캐가 어느 쪽에서 침입한 적군인지도 몰랐다. 왜는 일본이니, 오랑캐는 중국일려나. 라고 가볍게 생각한 정도였다. 어쨌든, 텔레비전을 통해 한가지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뚱뚱하고, 우스꽝스러운 말투. 결정적으로 변발을 한 사람이라면 틀림없는 오랑캐라는 사실이었다.
조금 자란 나는 정규 교육과정을 성의 없이 거치며 오랑캐가 어떤 민족을 부르는 멸칭인지 정도는 아는 청소년이 되었다. 그러나 나에게 유목민족의 이미지는 이전과 다를 게 없었다. 여전히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각종 미디어를 통해 여전히 오랑캐로 불리며 회화화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누볐던 초원과 세계사에서의 족적, 거느렸던 속국을 비추는 건 가끔 심야 시간대에 방영하는 역사 다큐멘터리뿐이었다.
이처럼 북방의 유목민들은 최소한의 거름망도 없이 한국 사회, 미디어 속에서 조롱의 대상으로 소비되어왔다. 그러다 보니 당연하게도, 우리는 그들이 어디에서 왔고,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살아가는지 알지 못하고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배명훈 작가의 신작 장편 소설, [기병과 마법사]를 읽기 전의 나도 그러했다. 제목의 ‘기병’은 그저 말을 탄 병사가 아니다. 걷기 시작할 때부터 말 타는 법을 배우고, 광활한 대지를 지배하는 마목인을 뜻한다. 그들은 일평생 태어난 곳을 벗어나지 않고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경작인과는 태생부터 다른 존재로 묘사된다.
책을 읽으며 유목민족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강인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장을 휘젓는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불쑥 찾아온 수상한 손님을 환대하며, 대가 없이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저 “오랑캐로” 폄하하기엔 무척 멋진 민족이고, 무엇보다 우리 민족이 지닌 가치가 그들의 것보다 특출 난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타 민족의 문화는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 민감한 영역이다. 등급을 나누는 것이 아닌,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한 민족의 고유한 사고방식에는 다양한 요소가 영향을 미친다. 정치 체제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고, 기후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많은 이유 중 하나만을 꼽자면 역사를 기반으로 한 생활 문화를 고르고 싶다. 아득한 시간의 흐름 속 나와 먼 조상이 함께 공유하는 경험. 이는 민족의 뿌리를 이루는 핵심 요소가 되기에 아주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소설 [기병과 마법사]의 두 주인공. 다르나킨과 영윤해의 관계는 매우 흥미롭다. 유목생활을 하는 마목인 다르나킨과 경작생활을 하는 나라의 왕족인 영윤해. 그들은 서로 다른 역사와 생활 양식을 지녔지만, 대의를 이루기 위해 손을 맞잡고 온갖 역경을 헤쳐나간다.
기병이 적을 무찌르고 마법사가 마법을 부려 위기를 탈출하는 서사가 책 속에 담겨있지만, 무력과 지력은 책의 재미 중 부분적인 요소이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가듯, 다른 세계에서 살던 두 주인공. 다르나킨과 영윤해가 서로를 존중하고 교감하는 방식이 소설 [기병과 마법사]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성장하는 예언자 영윤해
고대 문헌이나 종교 경전에서 묘사되는 예언자는 신과 견줄 수 있을 정도의 비범함과 신성함을 자랑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성경의 예수, 쿠란의 무함마드가 대표적인 예언자이다. 경전에서 이들의 행동에는 일말의 빈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 속 예언자로 등장하는 영윤해는 이들과 달리 인간적인(?) 편에 속한다.
물론 그도 인간 중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배경과 지력을 지녔다. 무려 숙부가 왕인, 왕가의 일족이며 술름이라는 지역을 이끄는 대영솔이라는 직책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그는 예언자라는 역할에 큰 부담을 느낀다. 박하게 자신을 평가하며 자학하기도 하고, 꿈에 등장하는 선대 예언자에게 왜 자신을 후대 예언자로 골랐냐며 원망하기도 한다.
소설이 진행되며 영윤해는 전방위로 압박을 받는다. 마목인의 침입, 조정의 의심,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 이러한 여러 위험 요소들이 그와 술름을 조여오게 된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예언자 영윤해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역경을 이겨나간다. 왕족, 예언자, 지배자라는 이름과 자리에 자신을 의탁하는 것은 영윤해의 방식이 아니었다.
영윤해는 끊임없이 공부했다. 하늘에서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신과 달리,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배우는 행위는 인간만이 지닌 문제 해결 방식이다. 영윤해는 마목인 장수 다르나킨에게 조언을 구하고 병법서를 밤새 탐독하며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한 묘수를 생각한다.
영윤해가 마법을 익히는 방식도 비범함과는 거리가 멀다. 수수께끼처럼 주어진 숫자의 진실을 악착같이 파헤치며 사건의 진실에 조금씩 다가간다. 그에게 마법은 왕족의 핏줄처럼 선천적으로 주어진 특권이 아니다. 계속해서 두드리고,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고, 죽음의 위기에서 몇 번이고 벗어난 뒤에야 쟁취해낸 소중한 능력이다.
영윤해는 신과 같은 예언자가 아닌, 인간적인 예언자에 어울린다. 그렇기에 소설 내에서 영윤해를 흠모하는 이가 여럿 등장하는데... 어떤 부분이 그의 치명적인 매력이었는지는 소설 [기병과 마법사]에서 확인해보길 바란다.
경주마의 충성심 다르나킨
영윤해와 함께 소설의 주인공을 맡은 다르나킨이다. 앞서 소개했듯, 그는 기병이며 마목인으로 살아왔다. 소설 속 묘사로는 양부모 밑에서 자라 다른 마목인과 달리, 어린 나이에 글과 말타기를 동시에 깨우쳤다고 한다. 마목인 사이에서 컸기에 영락없는 마목인이지만, 작가의 섬세한 설정으로 인해 경작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서사적 장치를 갖춘 인물이다. 정리하자면 0.1% 정도 경작인 향이 미약하게 첨가된 마목인이다.
영윤해의 키워드가 인간적인 예언자라면, 다르나킨의 키워드는 충성심이다. 그러나 그의 충성심은 고전 문학에서 흔히 등장하는 절대적인 충성심이 아니다. 다르나킨은 영윤해의 직책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영윤해라는 사람이 지닌 고유한 매력에 충성한다.
이러한 충성심은 소설 속에서 다양한 감정으로 묘사된다. 연모나 존경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일 때도 있지만, 의심에서 비롯된 경계심을 표현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다르나킨이 영윤해를 바라보는 마음은 분명한 충성이다. 그는 한결같이 영윤해의 곁을 지키고자 했고, 몸이 떨어져 있더라도 마음속으로는 늘 영윤해를 생각했으니까.
다르나킨의 충성심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대가의 여부에 있다. 다르나킨을 활용해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영윤해와 달리, 다르나킨은 영윤해를 돕는다고 할지라도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매우 한정적이다. 하지만 영윤해의 인간성에 감화된 다르나킨은 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닥쳐오는 위협에서 든든하게 영윤해를 지켜내고자 노력한다.
소설 속에서 다르나킨과 영윤해의 관계는 단순한 군신관계로만 볼 수 없다. 두 사람은 서로의 부족한 점을 메워주는 파트너이자 외로울 때 옆에 함께 있어 주는 친구 같은 관계이다. 소설의 끝에서 두 사람의 형상이 어떻게 변화될지 지켜보는 것도 소설 [기병과 마법사]의 독서 포인트가 될 것이다.
두 인물 이외에도 소설 속에서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생소한 유목민족의 삶을 경험할 수 있다. 마법사가 등장하는 판타지 소설로 [기병과 마법사]를 정의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 책을 대체역사 장르의 소설로 정의하고 싶다. 한반도에 공존했던 마목인과 경작인. 중국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실제 역사와 달리, 매우 다른 삶을 살았던 두 민족이 함께 힘을 합쳤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이런 가정을 하니 책의 내용이 더욱 흥미롭게 다가왔다. 사극에서 등장하는 통상적인 전투 장면과 달리, 기병의 전투는 독특한 전술이 돋보여 소설을 읽는 재미를 한층 끌어올렸다. 작가가 펼치는 상상력의 세계와 독자인 나의 상상력이 맞물리는 순간. 이 매력적인 순간을 향유 하는 것이 판타지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흥미진진한 전투와 현실감 넘치는 묘사, 매력적인 인물들의 성장일기까지. 소설 [기병과 마법사]를 통해 많은 독자들이 판타지의 매력에 흠뻑 빠져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