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하고 파격적인 경험을 하면 처음에는 그 충격을 불쾌감이라 해석하기 쉽다. 누구나 인터넷에 접속만 하면 짧은 시간 안에 짜릿한 자극을 느낄 수 있는 현대 사회에서, 대중의 입맛에 맞는 정제된 기법을 선택하지 않은 예술은 그런 감각으로 다가올 수 있다. 사실 오락을 위해 대중에 봉사하지 않는 예술에 당황하는 건 그만큼 우리가 알기 쉬운 메시지에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양한 예술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예술은 깊은 사유의 산물이다. 훌륭한 예술가는 사람과,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치열하게 연마한 테크닉으로 최선을 다해 자신이 관철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그려낸다. 우리는 그 예술을 통해 대중문화와 예술의 가치가 인간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존재의 중추에는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고민하며 더 나은 삶을 그려보는 것이다.
<사랑의 죽음. 피비린내가 눈에서 떠나지 않아. 후안 벨몬테>가 외설과 폭력, 자기 비하,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메타포로 가득 채워진 와중에도 그것을 보고 기쁨을 느낄 수 있던 것은 깊은 예술과 예술가의 최선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안헬리카 리헬이 자신의 몸을 붓 삼아 자신의 철학을 한 터치 한 터치 그려내는 2시간은 신에게 바치는 의식에 가깝게 느껴졌다. 투우가 주는 엑스터시 속에서도 후안 벨몬테가 그러했듯 영적인 속성을 발견하고 마치 제사처럼 연극을 '치르는' 안헬리카 리델은 놀라운 폭발력으로 장내를 경악과 경이에 빠뜨렸다. 가슴에 신비를 향한 열망의 불꽃을 지피는 순간이었다.
신비의 부활을 갈망하는 피의 연극
글을 쓰려면 피로 써라. 그러면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
- 프레드리히 니체
안헬리카 리델은 극본, 연출, 무대와 의상 디자인을 맡아 연극의 모든 부분에 깊이 관여한다. 그는 그 모든 부분을 피로 썼다. 무대 위에서 그토록 광기에 젖은 모습으로 춤을 추고, 흐느끼고, 숨 돌릴 틈 없이 대사를 읊는 안헬리카는 무대 뒤에서는 차분한 편이라고 한다. 배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고로 그가 펼치는 연기의 의미가 그 자신을 고백하는 것임을 증명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발산하는 무대 위에서 안헬리카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 내심 두려웠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은 고작 커튼만으로 구분되지 않는 또 다른 현실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헬리카는 2시간 내내 계속 관객을 불편하게 하고 불쾌감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연극의 막이 오르고 투우사처럼 화려한 의복이 아니라 상복 같은 검은색의 의상을 차려입은 안헬리카는 한 차례 투우 공연을 마치고 지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팽팽한 긴장감은 그에게서 눈을 떼면 당장이라도 무슨 일을 칠 것만 같은 느낌을 줬다. 곧 그는 투우에 있는 영적인 의미를 보지 못하고 기술과 눈앞의 쾌락에 열광하는 이들을 매도했다. 그 천박한 관객들은 누구인가. 그 정체는 이후 그의 독백을 통해 밝혀진다. 정치인, 자본가, 그리고 피상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는 모든 풍조를 그는 경멸한다. 머지 않아 그는 면도칼로 무릎에 상처를 내고 그 피를 빵으로 닦아 그 빵을 씹어 삼켰다. 강렬한 음악 '아싱가라(Asingara)'에 맞춰 춤을 추며 그의 선혈이 무대에 흔적을 남긴다. 그는 이로써 피를 낸 후의 고통과 흥분에 더욱 몸부림치는 한 마리의 소가 되기를 자처한다. 소는 투우 공연이 끝나면 죽는다. 무대 위에 쓰러진 안헬리카는 취한 사람처럼 신음을 흘리다 곧 귀가 찢어질 듯한 괴성을 지른다. 아직 그의 의식은 제대로 시작하지 않았다.
막이 오르고 곧 젖먹이 아이들과 팔다리가 각 한 개씩 없는 배우가 모습을 드러낸다. 예기치 못한 사건인 듯하지만, 세례식에서 한 아기가 큰 울음을 터뜨렸다. 이 울음은 탄생의 증표다. 갓 태어난 아이가 울면 주변의 모두가 웃는다. 그 순간 그 아기는 안헬리카가 연출한 신성한 의식에서 죽음의 반대편에 선 삶과 삶의 고통의 상징이 되었다. 곧 무대 위에 등장하는 장애를 지닌 배우의 모습은 이러한 아기의 이미지와 상충되고 연결되며 삶의 총체적인 그림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윽고 무대 위 등장한 검은 소를 마주한 안헬리카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죽음에 뛰어든다. 그러한 와중에도 그는 소를 향한 사랑을 표현한다. 안헬리카는 자신이 무대 위에서 죽을 수 있도록 날뛰며 소를 도발하고 유혹한다. 파괴 충동을 동반하는 강렬한 감정인 사랑과 죽음은 궤를 같이 하는 면이 있다. 안헬리카의 사랑은 필연적으로 죽음과 맞닿아 있었고 성경 속 예수가 그러했듯 대속을 통해 정화와 예술의 부활을 꿈꿨다.
안헬리카는 여전히 죽지 않았다. 안헬리카는 타오르는 열망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죽이겠노라 선언했다. 다시 막이 내리고 그토록 아름다웠던 검은 털의 소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형상으로 무대에 내려왔다. 마치 신이, 천사가 지상에 강림하듯 내려온 것과는 달리 그의 단면은 허무하고 공허했다. 축 늘어진 날개와 같이 대칭을 이루는 소의 고기 앞에 안헬리카는 칼을 들고 섰다. 그 모습은 앞서 맹렬한 투우 공연을 펼치던, 자신을 희생하려 하면서도 맥동하는 생명력으로 날뛰던 여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소를 죽음으로 이끈 미망인이자 도살자의 모습을 한 안헬리카에게 위풍당당했던 소가 그 풍채를 잃었던 것처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극이 클라이맥스에 다다르자 안헬리카는 이 극의 본질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달콤한 사랑의 말도 관객을 현혹하려는 미사여구도 없다. 그는 자신을 보러 온 관객의 수준과 그들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증오하는 듯 보였다. 한바탕 관객을 향한 공격적인 언사를 퍼붓다 곧 안헬리카는 철학가들과 위대한 예술가들처럼 되기를 꿈꾸는 자신의 마음을 폭로하며 자신 안의 도통 가시지 않는 결핍을 낱낱이 까발린다. 자신이 꿈꾸는 예술을 향해 손을 허우적대는 자신의 모습을 비꼬다가 예술이 정치와 경제, 모든 현실의 목적에 퇴색되어 가는 걸 고발한다. 안헬리카가 강간에서 사랑을 느끼고 배우가 아니라 창녀를 선택하는 이유는 폭력만이 이 세상의 부조리함을, 그 세상의 본질을 느끼도록 해주는 무언가이기 때문이 아닐까. 피를 흩뿌리며 자신의 피와 같은 색의 천에 달려드는 소를 보면 오히려 소가 죽어간다는 사실보다 소의 생을 실감하게 되는 것처럼.
연극의 끝에 가서도 안헬리카는 대사를 쏟아낸다. 무대 위에는 여전히 안헬리카가 흘린 피가 있다. 이제 사자가 있는 아프리카의 이미지를 안헬리카는 꿈꾸기 시작한다. 사자는 야성과 굶주림으로 그를 물어 죽일 수 있는 존재다. 아프리카에서 그런 사자를 사냥하다 죽는 것은 투우 공연을 하는 것보다도 비이성적이지만, 그렇기에 안헬리카는 사냥이라는 투우의 본질과 투우가 제공하는 죽음의 가능성에 근접하게 된다. 마사이족 왕자와 춤을 추며 퇴장하는 안헬리카의 모습은 안헬리카가 자신의 육신과 영혼을 번제물로 바친 끝에 얻은 신비와 환상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안헬리카 리델은 연극을 통해 신비와 끝없는 꼬리잡기를 하는 그의 예술 세계를 보여주었다. 나아가 지워지지 않는 피의 흔적으로 자신의 생을 무대 위에 남겼다. 지우려 해도 사라지지 않는 피의 흔적을 좇아보면 그가 치렀던 희생을 알 수 있다. 뜻을 알 수 없는 스페인어 대사와 전위적인 장치를 집요하게 이해하려 애썼던 것이 무색하게, 연극이 끝나고 그가 흘린 피의 궤적, 그 분명한 사랑의 증거를 보며 그가 사랑하는 예술이 살아있음을, 신비는 부활하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