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위키드', 대비되기에 조화롭다는 마법 [영화]

글 입력 2024.11.29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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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오피니언에는 영화 <위키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고양감이 느껴지는 영화를 보고 나오면 무빙워크를 걷고 있는 것처럼 발걸음이 가볍다. 시야는 선명해도 어쩐지 몽롱한 기분에, 주변 소음이 잘 들리지 않기도 한다. 그동안 이 감정을 한마디로 '마법 같다'고 짧게 정의했다. 영화관을 나서며 느끼는 이 감상과 이에 따른 변화를 글로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 몸을 일으키면 최고조에 다다른 감정이 온몸으로 빠르게 퍼진다. 이때 가슴에서 끓는 감정이 아직 머리로 옮겨가지 못해 그 감정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는 상태지만, 환상적인 경험을 했다는 것만큼은 느낄 수 있다. 머릿속에서는 정리되지 않은 감상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이것이 대체 무슨 감정인지를 묻는 단 하나의 질문만이 선명하다. 영화관을 나서고 바깥바람을 좀 맞은 후에야 이러한 감정이 조금 사그라든다.

 

요점은 이 마법 같은 기분은 말 그대로 마법처럼 그 원리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고 찰나의 기쁨에 가까우며 그렇기에 한 번 더 느껴보고 싶은 감정이다. 제목에서 예상했겠지만, 사실 이는 최근 감상한 뮤지컬 영화 <위키드>를 보고 나오며 느낀 감정을 정리한 것이다.

 

장르의 특성상 음악과 안무를 활용하기 때문에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것이 그만큼 쉽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위키드>를 굳이 영화로 봐야 하는 이유는 '뮤지컬' 영화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위키드>에서는 그 주제를 진실되고 섬세한 방식으로, 그리고 직관적이지만 그만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장치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러한 장치에서 감독의 배려가 돋보였고 그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영화관을 방문할 가치가 충분했다.

 

본 오피니언에서는 영화 속 특히 인상적이었던 장치였던 조명과 색, 그리고 그것이 전달하는 바에 관한 이야기를 짧게 나누어보려 한다.

 

 

 

분홍과 초록, 그 성격과 운명을 가르는 색의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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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드>는 포스터만 보더라도 쉽게 연상할 수 있듯 분홍색과 초록색을 활용해 대비와 조화를 보여주기 위한 방식으로 채택한다. 글린다는 그 사랑스러운 이미지에서 연상할 수 있듯 분홍색을 적극 활용하는 반면, 엘파바는 오즈의 그 누구도 지니지 않은 초록 피부의 소유자로 자신의 의사와는 별개로 초록색이 곧 그의 정체성이 되었다.

 

흔히 분홍색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떠받들어지는 것을 좋아하고 까다로우며 위선적일 것이라는 편견이 지배적인데, 영화 초반부터 중반까지 글린다라는 캐릭터는 이러한 편견을 사실상 재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린다를 완전히 미워하기는 힘든데, 'Popular'의 가사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보이는 것을 무척 의식하는 인물이고 우리 또한 상당수가 이렇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분홍색은 편견의 앞모습부터 캐릭터의 이면까지 고르게 비추는 색이다. 글린다의 분홍색은 모두의 주목을 모으는 사랑스러움,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는 습관, 다수가 바라고 따르는 이상을 거스르지 못하는 순종적인 자세, 혹은 자신이 품었던 이상에 역으로 갇혀 버리는 모순 같은 여러 맥락을 아우른다. 이는 '착한 마녀'가 된 글린다의 상징이 여전히 분홍색인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렇다면 엘파바의 초록은 어떠한가? 영화의 시작부는 엘파바가 '악한 마녀'가 될 운명을 제시한다. 셰익스피어는 초록색 눈을 질투 어린 눈이라고 해석했고 초록색을 생각하면 독극물이 연상되기도 한다. 나아가 엘파바의 초록색 피부는 '다름'인 동시에 '악'의 이미지와 쉽게 연결된다. 영화를 보면 이러한 상징이 무색하도록 엘파바는 정의로운 인물이다. 초록이 현재에는 안전이나 승인과 같은 긍정적인 의미로 통용되듯, 엘파바는 구시대의 초록에 관한 관념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인다.

 

이를 통해 엘파바의 초록은 엘파바가 편견과 충돌하는 과정, 즉 서로 다른 의미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 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록은 권력 유지와 편의를 위한 수단으로 차별 정책을 활용하는 것이 흔했던 과거에서 찾아보기 드문, 현대의 감각에 가까운 인권 감수성을 지닌 진보적인 운동가로서 엘파바의 캐릭터를 완성하는 색이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색의 대비를 세트와 의상, 소품을 활용해 곳곳에서 활용하고 있었다. 엘파바가 "Wizard and I"를 부르는 장면에서는 연못에 떠 있는 연꽃을 볼 수 있는데, 엘파바와 글린다가 계속해서 엮일 미래를 암시하고 두 개성이 꽃과 잎사귀처럼 대비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분홍과 초록, 그 경계를 허무는 조명이라는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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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는 연꽃 뿐만 아니라 꽃과 수풀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글린다의 대사처럼 초록과 분홍은 잘 어울리는데, 서로의 대비가 곧 조화이기 때문이다. 색의 활용이 캐릭터를 구분하는 데 효과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동시에 우리는 두 색의 조화 또한 기대해보곤 한다. 이를 위해 감독이 선택한 방법은 바로 조명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글린다와 엘파바는 살아온 배경과 가치관이 굉장히 다르고 둘 중 한 사람이 누군가를 감화하거나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를 받아들일 뿐,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는 경험은 두 사람에게 무척 소중한 경험으로 남는다. 이렇게 서로를 받아들이는 극적인 순간을 영화에서는 두 사람의 빛으로 서로가 물들어 가는 순간으로 표현했다.

 

글린다와 처음으로 같은 방을 쓰게 된 날 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던 엘파바는 글린다가 켠 무드등 탓에 눈을 뜬다. 이때 분홍색 빛을 받은 엘파바의 피부는 밝은 낮 태양빛 아래에서 보이는 선명한 초록색이 아니라 짙은 갈색으로 보인다. 초록색 피부만 용납하지 않고 다양한 피부색을 지닌 오즈인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오즈에서 엘파바는 순간 '정상인'이 된 듯하다.

 

비록 두 사람이 이어 "What Is This Feeling" 넘버를 부르며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러한 연출을 통해 글린다가 보는 엘파바의 시선이 바뀔 것임을, 잠깐일지라도 글린다의 옆에 선 엘파바를 여느 오즈인처럼 다른 사람들도 받아들이게 될 것임을, 그리고 두 사람이 특별한 우정을 나눌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글린다의 존재만 엘파바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글린다가 엘파바에게 손을 내밀고 두 사람이 둘도 없는 친구가 되는 날 밤에도 조명이 절묘하게 활용되었다. 오즈더스트 블룸의 홀 중앙에서 모두가 비웃는 가운데 춤을 추는 엘파바에게 글린다가 나아가자, 그의 피부는 천장에서 내리쬐는 초록색 빛으로 물들어간다. 한 번도 관심과 사랑의 주인공이 아닌 적 없었던 글린다가 외로운 엘파바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이다.

 

오즈더스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초반에는 그런 글린다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지만, 두 사람이 춤을 추고 눈빛을 나누자, 모두가 같은 춤을 추기 시작한다. 엘파바가 오기 전까지 글린다가 자신이 관심을 두던 피예로와 춤추던 홀은 꼭 글린다가 이곳의 주인공이라는 듯 분홍빛 조명이 내리쬐고 있었고 그곳에 머무를 수 있었음에도 글린다는 용기를 냈다. 딱 한 걸음, 그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이미지 관리에 철저하던 글린다에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용기를 내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글린다가 그렇게 자신과 다르다고 여겼던 엘파바에게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척 했지만, 사실은 그럴 수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데 있다. 글린다의 얼굴 반에 초록색 조명이 앉는 순간 두 사람은 이제 더이상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뜻밖의 조화를 기쁘게 받아들이게 된다.

 

 

 

가공의 세계에 사회의 리얼리티를 담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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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위키드>는 이처럼 직관적인 방식으로 미장센을 활용해 능수능란하게 관객의 감정에 변화를 일으킨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그 내용과 감독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영화를 보면 엘파바의 다름이 눈으로 보이는 만큼 현실의 여러 소수자 차별 문제와 바로 연결된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중국계 미국인 존 추 감독은 그 캐릭터가 처한 상황에 맞는 연기를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배우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던 색의 의미를 연출의 의미에서 생각했을 때 엘파바는 오즈의 그 누구도 지니지 않은 피부색을 지닌 유일한 인물이라는 설정으로, 이는 엘파바가 느낄 감정에 관객이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극단적인 상황 속에 인물이 놓여 있다면 관객은 어렵지 않게 엘파바의 심정을 상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근래 많은 작품에서는 다양한 인물을 묘사하는 데 있어 보다 복잡하고 모호한 방식을 채택하고 누군가를 대변하는 데 있어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한다. 전달하고자 하는 가치와 문제에 관한 해답을 명확하게 제시하기보다는 의문을 던지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 작품들을 생각했을 때 <위키드>는 비교적 알기 쉬운 메타포를 활용한다.

 

<위키드>는 기실 뮤지컬 영화가 그러하듯 존재하는 원작과 뮤지컬을 충실히, 그리고 영화적 기법을 더해 아름답게 재현해내는 데 집중했다. 그러면서도 현실을 스크린 안으로 옮겨오기 위해 노력했다.

 

이에 대해 기존의 문법을 완전히 뒤집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그려내는 방식은 흥행을 의식한 안전한 방식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에서 기대하던 관습을 따르지 않고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를 선택하는 데 반발하는 목소리가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요즘, <위키드>의 흥행이 "PC로 성공하고 싶다면 이래야 한다"는 흥행 공식을 세운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현실의 문제를 이렇게나 직접적으로 다루는데도 우리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위키드> 뿐만 아니라 배역에 대한 당사자성을 지닌 배우들의 연기를 우리는 자연스럽다고 느낀다. 그저 그들이 느끼는 현실의 문제를, 영화를 계기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인 것이다.

 

PC에 대한 묘한 거부감을 우리는 조금 더 우리가 세계와 어떻게 상호작용해왔는지를 바탕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강요처럼 느껴졌다면 어째서 그것이 요청이 아닌 강요라고 느껴졌는지 그 기원을 찾아 깊이 사색할 필요가 있다. 어째서 그동안은 그들이 내는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에 관한 의문 또한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위키드>에서는 특히 색이 영화의 줄거리에 깊이 관여하는 만큼 색을 다양하게 표현하려 노력한다. 이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시시각각 바뀌는 빛 아래에서 '본연의 색'을 찾는 것, 혹은 그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오만이라는 것이다. 그 누구도 빛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의 법칙이란 이러한 색과 같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동적이다. 시대에 따라 핵심 가치가 변화하는 가운데 어떠한 기준에 매이는 것은 결국 허상을 따르는 것일 수도 있다. 영화관을 나온 후, 영화 <위키드>가 그것을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꼈다.

 

 

[서예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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