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에서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우는 걸 넘어서서 나를 에워싸는 느낌이 들 때, 황홀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작품들이 사방에 전시되어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나를 둘러쌀 때는 숨어버리고 싶을 때가 종종 있었던 걸 생각하면 단순히 무언가가 나를 에워싸는 느낌을 좋아하는 건 아닌 듯했다. 그래서 촉이 느껴졌어도 확신까지 가기 어려웠다. 워커힐호텔에서 진행한 빛의 시어터를 관람한 날, 비로소 확신이 들었다. 대형 규모의 전시장을 꽉 채운 미디어파사드를 감상하면서 예술이 나를 에워싸는 느낌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미디어, 음악, 그림 등이 나를 감싸는 느낌. 그런 느낌을 좋아하고 있었다.
이처럼 미디어나 작품이 사람을 에워싸는 듯한 형태 또는 관객 참여형 공연이나 온몸으로 작품을 향유하고, 몰입하는 것을 이머시브라고 한다. 최근에 관람한 전시회가 이머시브 특별전이었다.
몰입형 전시 ‘시네마천국 이머시브 특별전 - 투.토토’는 한국과 이탈리아의 수교 14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됐다. 예상보다도 더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 이에 보답하고자 전시를 5월 11일까지 연장했다. 이 전시는 영화 ‘시네마천국’ 자체를 표현하여, 이 영화를 봤거나 좋아했던 관객에게 추억여행을 선물한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를 본 사람만 재밌는 전시는 아니다. 영화를 안 본 사람도 몰입과 감동을 경험할 수 있다. 영화를 안 본 사람인 필자가 증인이다.
영화를 안 본 사람도 몰입할 수 있는 이유.
전시장 입구부터 남달랐다. 영화 속 극장 입구를 재현했다. 심지어 필름 모양의 티켓까지 받으니 실제로 영화표를 사고 입장하는 듯했다. 여기서 1단계. 판타지 이야기처럼 ‘시네마천국’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니 액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액자에는 촬영 현장의 순간들과 영화 장면들이 있었다. 2단계. 전시회를 관람한다는 인식이 사라지고 토토에게 빙의되었다. 토토의 관점에서 벽면에 걸려 있는 알프레도와의 추억 사진들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알프레도가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준비한 걸까’라는 망상에 빠졌다.
3단계. 추억여행을 시작했다. 토토가 신기해하던 사자의 입에서 레이저빔이 나오는 극장을 구현한 곳에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시네마천국의 주요 장면들을 관람했다. 진짜 영화 속 파라디소 극장에 앉아 있는 듯 했다.
4단계. 이머시브룸에서 완전히 몰입했다. 이머시브룸이 하나가 아니라서 걸으면 걸을수록 몰입도는 치솟고,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이머시브룸에는 대형 스크린들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운데에 서 있으니 영화 속 장면들이 나를 에워싸는 듯했다. 내가 좋아하는 느낌이었다. 예술이 나를 감싸는 느낌. 스크린 속에는 알프레도와 우정을 나눴던 순간들, 첫사랑 엘레나와 감정을 주고 받던 순간들이 담겨 있었다. 관람객으로서 스크린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토토로서 과거의 빛나던 순간들을 보는 듯 했다. 문득 나의 추억도 이렇게 전시되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토토에게 빙의했지만, 토토가 부러운 순간이었다.
전시장 곳곳에는 영화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많았다. 영사실과 영사기, 누오보 시네마 파라디소의 네온간판, 영화 속 의상과 자전거, 원본 디자인 스케치, 명대사 등이 있었다. 영사기, 의상 등 촬영소품은 이탈리아 누오보 시네마 파라다이스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을 직접 가져왔다고 한다. 덕분에 영사기를 가까이에서 보는 경험을 했고, 토토처럼 필름을 들여다보며 신기해했다. 이는 토토에게 빙의해서 나온 행동이 아니었다. 5단계. 완전히 토토가 되었다.
영화에서 알프레도가 광장 벽면에 영상을 띄워 사람들에게 영화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공간도 있었다. 건물 벽면부터 바닥을 돌로 꾸며놓은 것까지 시칠리아의 마을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돌바닥을 밟으며, 벽면에 띄워진 영화 속 장면을 보면서 진짜 그 시대의 그 마을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기분이 묘했다.
엘레나와 토토의 로맨틱한 장면 중 하나였던 밀밭을 뛰어다니던 곳도 완벽히 재현했다. 내 키만 한 밀밭, 위를 올려다보면 디지털로 구현한 파란 하늘, 자연의 냄새, 걸을 때마다 들리는 사각사각 소리가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같이 간 연인의 손을 잡고 걸으며 로맨틱한 장면을 연출해 봤다.
밀밭을 지나면, 중장년이 된 영화감독 토토가 보인다. 토토는 알프레도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마을에 방문하여 알프레도가 남긴 선물을 발견한다. 버려야 했던 키스 장면이 몽타주로 이어지는 영상을 보며 토토는 눈물을 흘린다. 그 필름은 토토가 갖고 싶어 했던 거다. 토토가 눈물을 흘릴 때, 따라서 울컥했다. 전시장에는 비하인드 스토리도 상영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숨겨진 이야기까지 알게 되어 감동이 배가 되었다.
주요 장면과 영화 속 장면은 재현해 놓은 곳들을 전시한 덕에 영화를 안 봤는데도 줄거리가 파악되었다. 주인공에게 감정이입까지 됐다. 그 상태에서 시네마천국 OST를 청음 하는 곳에 들어갔다. 스크린을 통해 오케스트라 연주를 보며 서라운드 사운드로 음악감상했다. 눈앞에 (토토의) 추억들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스크린을 통해 연주를 보며, 청음을 하면서 추억들을 회상하고 정리했다. 온갖 감정이 몰아쳤다.
마지막으로 알프레도가 토토에게 전하는 편지가 띄워진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토토를 생각하는 친구 알프레도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이미 완전히 토토가 되어버려서 내가 알프레도의 응원을 받는 듯했다. 편지를 다 읽으니, 벽면으로 명장면들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빙 돌면서 일렬로 한 장면씩 등장하고 사라지는 걸 바라보면서 목이 메었다. 눈물을 참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단단히 착각의 늪에 빠진 게 분명했다.
TO.TOTO
전시를 다 본 후, 부제가 ‘TO.TOTO’인 이유를 알았다. 이 전시는 영화 속 순간들을 직접 체험하고, 주인공이 되어보는 몰입형 전시를 넘어서서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토토에게 알프레도의 따스한 응원을 전하고자 했다.
우리는 꿈, 사랑, 우정 중 하나라도 관련된 추억이 있을 거다. 꼭 이것들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노스탤지어는 있을 테다. 노스탤지어를 느끼는 게 때론 쓸쓸하고 사무치게 아프지만,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듯이 힘들 때 ‘추억’은 ‘알프레도’처럼 든든한 존재다. 관람하면서 내게도 있는 ‘알프레도’를 꺼내보며, 그 존재에 새삼 고마웠다.
필자의 고대
영화를 바탕으로 이머시브 전시가 생겼다는 건 매우 기쁜 소식이었다. 드라마나 소설을 활용한 이머시브 전시가 생기고, 많아지길 바란다. 좋아했던 작품의 이머시브 전시가 열리는 날을 고대한다. 대중성과 트렌드의 성격이 강한 드라마를 활용한다면, 이머시브 전시도 하나의 트렌드 또는 즐길거리가 될 거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