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종의 기원>이 지난달 막을 내렸다.
2022년의 초연에 이어 2024년의 서늘한 겨울, 재연으로 돌아왔던 뮤지컬 <종의 기원>을 본 후 인상 깊었던 몇 가지 지점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무력해질 만큼 거대한 악
극에서의 모든 사건은 유진이 ‘리모트’라는 약을 먹지 않음으로써 발생한다. 유진에게 있어 리모트는 자신을 조종하는, 남의 손에 쥐어진 리모컨과도 같다. 약을 먹지 않음으로써 유진은 자유를 얻는다.
유진이 리모트를 복용하게 된 계기를 찾으려면 그의 유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산 정상에 있는 종탑에 빨리 가는 게임을 제안한 형 유민을 유진이 절벽에서 밀쳐버린 사건이다.
바다에 빠진 유민을 구하려던 형제의 아버지는 그대로 유민과 함께 목숨을 잃었고, 그 일로 유진의 어머니는 정신과 의사로 일하는 자신의 동생 혜원을 찾아갔다.
혜원은 열 살이었던 유진에게 사이코패스를 지배하는 사이코패스, 그 중 최상위 포식자인 ‘프레데터‘라는 진단명을 내렸고, 앞으로도 이런 사건이 계속될 수 있으니 제대로 된 약을 처방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유진이 먹기 시작한 약이 바로 리모트였다. 유진이 리모트를 끊으면서 느끼는 정신적 자유와 개운함은 유진의 악행을 막을 최소한의 족쇄가 사라지며 나타난 증상이다.
약을 먹으면 세상이 널 가두겠지
기분은 가라앉고, 몸은 늘어지지
너를 지배하는 무력함
나는 알아 이건 그들의 리모컨M01. <리모트> 중
유진이 리모트를 복용하면 무력감이 유진을 지배하지만, 유진이 약을 끊는 동시에 그 무력감은 유진을 둘러싼 모든 인물, 심지어는 객석의 관객들에게까지 향한다.
유진보다 더 오래 살아서 유진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던 어머니, 적절한 감시와 통제를 권했던 이모, 유진을 끝까지 설득했던 해진까지 하나씩 유진에 의해 제거되는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그나마 남은 희망마저 하나씩 사라지는 느낌을 받는다.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자수를 권하는 해진 앞에서 유진은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근데 나 배고파. 이모가 사 온 케이크만 먹고 내가 내 발로 갈게.”
그렇게 극이 끝나갈 무렵에는 같은 인간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존재만이 무대 위에 남게 된다.
두 가지 자아가 드러나는 방식
극 내내 두 명의 유진이 등장하는데, 작품 바깥에서는 편의상 각 역할을 ‘한유진 A’, ‘한유진 B’로 구분하곤 한다. 유진 B는 마치 투명 인간 같아 자기 자신(유진 A) 외의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다소 절제된 모습의 유진 A와 다르게 상대적으로 거칠고 충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유진의 본성이자 내면을 유진 B로, 외면을 유진 A로 표현한 것이다.
극의 초반에는 어머니를 살해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혼란스러워하는 유진 A와 이를 여유롭게 바라보는 유진 B가 명확하게 구분되었지만, 극의 후반부로 향할수록 유진 A와 유진 B의 유사성이 높아진다.
리모트 복용을 중단하고 범행을 계속할수록 유진은 새로운 자극을 얻었고, 이에 따라 시간이 지날수록 ’날것의’ 유진, 즉 유진 B의 개입이 잦아진 것이다. 특히, 유진이 가장 증오하던 이모를 살해하는 장면에서는 유진 B만이 직접적으로 움직였고, 이모 또한 유진 B를 바라보며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보였다. 유진 B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첫 장면이자 처음으로 타인에게 인지된 순간이었다.
커튼콜 이후에는 에필로그로 <심판자>라는 넘버가 나온다. 본인을 ‘심판자’라 칭하는 한 명의 유진만이 무대 위에 등장해 객석을 지나치며 퇴장하는 장면이다. 유진 A만이 해당 넘버를 맡았던 초연과 다르게 재연에서는 매회 공연마다 그날의 유진 A 또는 유진 B가 무작위로 등장했다.
항상 두 명으로 보였던 유진이 한 명으로 보인다는 연출은 유진이 완벽히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프레데터로 다시 태어났음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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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종의 기원>은 앞서 언급했듯 정유정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어 원작과 전개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극이 진행될수록 암울하고, 끝내 차가운 결말을 맞는다.
찬란한 칼질 삶과 죽음 결정하는
나는 전능한 너희들의 심판자
긴장해 평범함을 가장한 비범한
난 어디에나 있어
너희들 곁 바로 여기
M21. <심판자> 중
본인의 행위를 감히 심판에 비유하는 이 악인의 변명과도 같은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간악무도함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비겁해질 수 있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다.
결국 이 뮤지컬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소설 속에 존재하는 인물을 굳이 무대 위에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배우들의 완벽한 연기 덕분에 책장 한구석에 잠들어 있던 한유진은 관객들 앞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객석에 앉아 극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두려워하기도, 분노하기도 하며 끝까지 유진을 이해하지 못한다. 끝까지 이해할 수 없어야 한다. 우리는 한유진 같은 인간상을 경계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극을 보는 우리의 내면은 어땠는지를 돌아보며 경계할 수도 있다. 뮤지컬 <종의 기원>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