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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고등학교 시절, 야간 자율학습이 시작되기 전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봤던 한 편의 영화. 아이는 할 말을 끝내 하지 못한 채 그저 흐느끼며 울지만, 그 진의를 알아차린 다른 아이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그 소녀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달려간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이 엔딩 때문에 나는 션 베이커 감독의 신작을 몇 년 전부터 무척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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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션 베이커 감독이 이 아노라라는 작품으로 황금종려상을 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깜짝 놀라면서 나의 소소한 추억이 떠오름과 함께 기쁜 감정이 들었던 것 같다.

 

스트리퍼가 주인공인 영화이다 보니 자연스레 스트립쇼를 하는 장면을 달리샷으로 쭉 찍으며 자연스레 주인공 애니, 즉 아노라를 비추며 영화가 시작하는데 그런 식으로 영화의 오프닝을 시작하니 시작도 전부터 이미 영화에 압도되는 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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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영화의 중후반부부터는 극 중 인물이 토를 했던 것처럼 나도 정신없이 쏟아지는 대사들과 교차편집들로 인해 화면에 체하는 느낌도 들었지만 보는 내내 그런 긴 대사들을 마구 쏟아내는 배우들을 교차해서 보여주는데 난잡한 느낌보다 정말 깔끔하게 샷이 전환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정말 편집 센스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이렇게 교차해서 보여주는 편집, 그리고 아노라가 소리 지를 때 입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신은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고 또한 그 아노라와 다른 패거리가 몰려다니며 이반을 찾아헤메는 장면에서 가게들 앞을 지나갈 때 롱샷으로 그들을 담는데 그런 연출 역시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아이들이 여러 가게 앞을 지나가는 샷의 구도와 사이즈가 거의 일치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영화 역시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그 아이의 엄마처럼 매춘을 하는 주인공이라는 설정인데 그 영화도 그랬지만 이 영화도 그런 주인공들 옆에 항상 묵묵히 그들을 지켜보는 조력자 같은 존재가 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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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는 윌렘 데포가 연기한 그 호텔 사장이 그런 역할이었다면 이 영화에선 이고르가 그런 역할이다. 이 영화는 블랙코미디의 향이 짙은 영화이다. 분명 중간중간 재밌는 장면이 무척 많은데 그 재미가 유쾌함보다는 웃고 나서 찝찝함과 불쾌함이 드는 그런 재미이기에 마냥 코미디라고 부르는 건 무리가 있는 영화이다.

 

그럼에도 이반이 집을 뛰쳐나가고 아노라가 그 집에서 그 패거리들에게 포획당하는 신은 정말 감탄이 나오는 코믹한 순간의 연속인데 이건 편집, 대사, 연기 모든 요소들이 하나같이 환상적인 합을 이뤄 탄생한 명장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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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이전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슬픔의 삼각형을 상당히 많이 떠올리게 했다. 어떤 빈부격차의 문제, 젊은 남자와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 때문에 특히나 많이 떠올랐고 영상미 혹은 영화적 태도 또한 비슷한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감탄했던 장면들은 풍부한 광량, 즉 햇살이 내리쬐는 것을 로우앵글로 인물의 얼굴과 미묘하게 맞물리게 찍어 화사한 영상미를 만든 건데 이런 신이 2,3번은 나왔던 것 같은데 상당히 찍기 어려웠을 것 것이다.

 

자극적인 측면이 강할수록 되려 이성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측면이 영화에선 있는 것 같다. 아노라와 이고르의 케미가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케미이고 그 모든 코믹함과 씁쓸함 역시 이 둘의 미묘한 케미에서 왔던 게 아닐까 한다.

 

모든 게 마무리 되고 둘이 집에서 나누는 대화들도 겉으로는 코믹함을 유지하는 듯하지만 그 속 내용들은 뭔가 씁쓸한 느낌도 든다. 다른 이들이 없었다면 자신을 강간했을 거라 확신하는 아노라와 그런 말에 너무도 태연하게 자기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이고르.  그런데 오히려 왜 그런 생각이 없었냐고 또 되묻는 아노라. 웃음이 터져 나올 수도 있는 장면이지만 뭔가 파고 보면 씁쓸함도 든다. 이 대사에서 어쩌면 아노라라는 여성이 그동안 살아온 삶, 그리고 그런 삶들로 인해 그녀가 갖게 된 생각과 가치관이 드러나는 측면도 있는 것 같고 그런 어쩌면 폐쇄적이기도 염세적이기도 한 생각에 너무도 해맑고 무해한 표정으로 응수하는 이고르의 대사들도 내게 꽤나 큰 울림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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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가장 큰 여운이 남았던 건 마지막 엔딩인데 처음에 그녀를 포획했을 때 그녀에게 빼앗았던 반지를 손에 품고 있다 그녀에게 선물하고 묵묵히 내려 흩날리는 눈발에서 그녀의 짐들을 그녀 집 앞으로 빼내 주는 그를 배경으로 의미심장한 표정의 아노라의 측면샷이 찍히고 그 뒤 다시 차에 돌아온 이고르에게 도발적으로 다가가더니 이내 그녀가 늘 그랬던 것처럼, 마치 스트립쇼에 온 손님에게 대하듯 그의 무릎 위에 올라타는 그녀의 모습을 카메라가 담는데 점점 고조되다가 이내 그가 당혹스러우면서도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키스하려 하는데 그녀는 그런 그의 행동에 거부감을 내비치며 그를 때리다 이내 그의 가슴에 파묻혀 흐느껴 운다.

 

이 장면은 여러 해석이 존재할 수 있겠지만 내 해석은 아마 그녀는 늘 그랬듯 감사함을 표하는 방식을 일종의 서비스처럼 그녀의 몸을 통해서 또 한 번 그에게 표하려 했지만 진심은 그다지 담기지 않은 그녀의 행동과 대비되게 그는 여태까지 그가 보였던 태도와 동일하게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키스라는 행위로 사랑을 전하려 하자, 그런 그를 보며 스스로가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지고 그에게 어떤 일종의 죄책감도 느껴지고 그간 그녀가 살아온 삶, 그녀가 감사함을 표했던 방식 등 많은 행위들이 스스로 부박하게 느껴져 그를 때리다 이내 그에게 파묻혀 울었던 게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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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 베이커의 영화는 지극히 추하고 씁쓸한 현실을 말하는 것 같다가도 그 끝에는 아주 작은 희망이 늘 도사리고 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 속 마지막 두 아이가 결국 그토록 뛰어서 도착한 곳은 디즈니랜드였고, 그녀가 온 진심을 쏟아부어 팔자가 필 거라 생각했던 이반이라는 남자는 역시나 금세 떠나버리고 다시 예전의 삶으로 회귀하는 듯했지만 그런 그녀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녀를 보살폈던 이고르라는 남성이 있었던 것도 그렇고, 어떤 추한 현실에도 영화가 가진 힘을 통해 그런 추한 현실을 영화에서나마 희망으로 그 끝을 장식하고 싶은 감독의 소망이 엿보여서 참 좋았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보고 싶어지고 앞으로의 영화들도 너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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