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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베이컨>은 프랑스 스톡 출판사에서 기획하고, 뮤진트리에서 펴낸 <미술관에서의 하룻밤>시리즈이다. 프랑스 퐁피두 센터에서 보낸 밤의 이야기로, 이곳에서의 시간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과 함께 저자의 자전적 경험으로 흘러간다.

 

이야기는 수수께끼와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로 시작되었다가, 어떠한 지점에서는 시공간의 결속성을 드러낸다. 베이컨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각각의 전시관으로 이동하는 장면과 어린 시절을 보냈던 아프리카에 대한 기억이 교차하며, 이는 조르주 바티유와 카프카, 마르셀 뒤샹, 반 고흐, 블레즈 파스칼, 니체와 헤겔 등의 '영혼'과 이어진다.

 

이러한 배경을 토대로 12장 ‘내 영혼의 이야기 (1)’와 ’13장 내 영혼의 이야기 (2)’는 앞서 쓰인 글로 하여금 일련의 단서들을 제공한다. 각 장에 얽힌 이야기의 단면과 한 사람의 경험의 총체가 더욱 단단한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한 편의 소설과 어느 날의 일기처럼 비밀스럽고도 진솔한 ‘내면의 고백’’은 그림을 향한 그의 감상을 더욱 풍부하게 이끈다.

 

바로 앞장(11장)에서 언급된 “나는 출발했고, 그림들은 내게 새로운 방식으로 말을 걸었다. 그림들이 변한 것이다. 나는 그림들이 만들어낸 변화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를 테면 그 그림들에 어린 시절과 관련된 정서적 연속성이 존재했었다는 말은 할 수 있다. 베이컨의 그림을 볼 때 눈에 띄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p.111)은 다음과 같이 연결된다.

 

"나는 길을 잃은 것일까, 아니면 치열한 삶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그 당시 나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지 않기 위해 이런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지곤 했다." (p.128)

 

"그래서 변한 것은 나였다. 눈을 뜬 나는 내게 큰 고통을 주었던 이 그림이 나를 죽인 살인자들을 그린 것이 아니라 고통받고 있는 희생자들을 그린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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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림을 대하는 ‘야닉 에넬’(저자)의 태도와 그의 영혼의 소리가 들려주는 하모니는 그림을 감상하는 것, 그림을 좋아하는 것, 그리고 ‘그림’ 자체를 더욱 다채롭게 볼 수 있는 감각을 선사한다.

 

 

나는 이 그림의 신비를 알아내려 애쓰지 않는다. 게다가 이 책은 해설서가 아니라 오히려 강한 충격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즉 베이컨의 그림처럼 심연으로 가득 채워진 그림들에 다가가면 그것에 흡수될 위험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날 밤 내내 나는 이 그림으로부터 나를 보하면서 이 그림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고 애썼다. (p.95)


 

저자는 그림이 자신을 통과하도록 내버려 두었고, 다른 그림보다 더 좋아하게 된 그림의 무언가(이유 또는 의미)를 찾았다. 어느 때는 한 그림에서 다른 그림으로 넘어가는 시선으로, 다음은 양쪽 끝을 넘나들며 이동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현존하는 공간은 퐁피두 센터였지만, 책 속에서 내내 등장한 '존재'의 근원은 어느 때든지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존재 자체는 상처를 통해 경험한다. 그것이 비극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것을 “존재의 영원한 상처”라고 불렀다. 그리고 지금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는 이 그림은 인간의 삶을 옭아매는 이 결핍의 비극을 암호화한다. 결핍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p.103)

 

재현에 균열이 생기고 불가능한 것이 드러나는 또 다른 차원이 열린다. 우리는 더 이상 숨 쉬는 삶 속에 있지 않고,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숨의 정지 상황에 있다. 이러한 공간은, 어떤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계속해서 빠져드는 미스터리가 펼쳐지는 심연 속에 있다. (P.110)


 

인간의 모습을 담아낸 그림, 그 안에 피어나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밀려온다. 저자의 삶에서 시작된 존재감이 무한히 뻗어 간다. 이내 어느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다른 작품을 보는 순간에도 펼쳐지고, 다시금 같은 그림을 보고 싶어서 뒤돌아보는 순간에도 마주한다.

 

이로써 ‘나’를 바라보고, ‘베이컨’과 그의 그림을 통해서 발견한다.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고, 지금을 인식하고, 현실감을 느낀다. 예술작품은 때때로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주지만, 언제나 현실을 보여준다. 빛과 어둠을 직시하는 ‘눈’은 존재를 관통한다.

 

 

시간은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되찾을 필요가 없다. 시간을 우리가 있든 없든 계속해서 존재한다. 삶이 우리를 가득 채울 때, 우리는 솟아나는 순간을 덕분에 시간을 만난다. (P.176)


그림에 굴복하지 않고 이 그림들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미셸 레리스는 베이컨의 그림이 “눈에 미치는 영향과, 이 영향을 통한 정신의 장악이라는 문제”를 지향한다고 쓴다. 즉, 베이컨은 눈을 통해 당신을 붙잡고 당신의 정신을 묶는 것이다. (p. 96)


 

이때 등장한 ‘눈’은 이후에 글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등장한다. 14장의 '자화상, 1971’에서는 “베이컨은 우리의 이미지가 거기에 반사되어 우리 눈을 멀게 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림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가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라고 쓰였다.

 

이어서 16장 ‘죽은 눈’에서는 “나는 생각했다. 죽음 쪽에는 눈이 없어. 이 머리는 반대편에서 왔고,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얼굴들이 찡그리고 있는 보랏빛 그 먼 곳을 보여주었다. 죽은 자들은 눈을 감고 있다, 그게 전부였다.” (p.156)이라는 문장이 있다.

 

그리고 이내 17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나는 베이컨의 그림에서는 파란색이 잃어버린 눈 대신 등장한다고 생각했다.”(p.170) 마침내 이 책을 관통하는 문장을 발견했다.

 

앞서 쭉 언급했던 ‘영혼’, ‘존재’, ‘눈’은 <블루 베이컨>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보았던 단어이다. 이 책의 차례가 25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초반에 읽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각 장은 개별적인 에피소드 형태로 이루어져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고, 저자의 경험이 곳곳에 내포되어 있으며, 이것이 베이컨의 그림을 보는 커다란 총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 예로 <블루 베이컨>에서 등장하는 베이컨의 작품은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자화상 – 1971], [물줄기], [3부작] 등으로 여러 그림이 소개된다. 분명히 많은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는 이야기가 단절된 것 없이 하나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보았다.

 

 

내 안의 모든 것이 문장이 되었다. 언어가 내 자리를 차지하더니 이 그림의 밤에 나 없이 떠다녔다. 나는 눈송이처럼 벌거벗겨져 완전히 빛과 거품, 두 빛 사이에 뜬 먼지, 투명하고 가는 무늬가 되었다. 그리고 무(無)가 되었다. (p.75)

 

파란 점 하나가 검은색 한가운데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p.38)

 

색들은 밤의 파란색 속에서 잠들었다가 다시 태어난다. 우리가 죽음에서 깨어나는 지점에 있다. 그리고 나는 빙글빙글 돌면서 숨이 끊어질 정도로 달린다. 삶은 우리를 빛으로 전달한다. 그리고 우리는 천체처럼 빛을 발산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우리는 도취된 상태에서 세상이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는 우주의 움직임을 접하게 된다. (p.229)

 

 

밤이라는 시간과 파란색의 심상. 이 불변의 조합은 <블루 베이컨>을 이끈다. 파란색은 차가움과 동시에 강렬하다. 많은 이들이 파란색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동시에 파란색은 빛에서 어둠으로, 그리고 다시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여정을 함께한다. 어스름이 내린 밤과 어둠이 짙어지는 밤이면 ‘내면’에 더욱 가까워진다. 베이컨의 그림이 그러하듯이, 저자의 시선 역시 물든다.

 

책에는 그림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오히려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와 그의 그림을 빗겨가지 않고, 그대로 통과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그림 곳곳에 담긴 삶의 관조는 보는 이의 생으로 연결된다.

 

본다. 눈으로 본다. 어떤 의식적인 감상의 가감 없이 바라본다. 그리하여 그림은 삶이다. 그동안 살았었고, 현재를 살아가며, 앞으로 살아갈 흔적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의 시선이 매일 밤 길을 잃고 헤맸던 라스코 동굴의 황홀한 창자 속에서 베이컨의 작품들을 관람하며 진화한 것처럼 말이다. (p.70)

 

조르주 바타유는 라스코의 벽을 마주하고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이 풍요로움의 놀라운 광채를 위해 태어났다고 느낀다. “이러한 광채, 이러한 경이, 이러한 풍요는 우리 존재의 가장 어두운 분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빛은 이 구멍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다. (p.78)

 

(· · ·) 나는 우리가 존재의 끝에 와 있다고 느꼈다. 바타유가 말했듯 “가능한 것의 극단”에서 시간이 그 자체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그러자 얼굴을 뜯어내는 비틀림이 길을 잃은 밤의 무자비한 균열 속으로 분출된다. (p.145)


나는 라스코에 있었다. 나는 다시 아프리카에 살때부터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천장이 파란 새들로 장식된 방에 이르기를 꿈꾸는 그 어린아이가 되었다.  그날 밤, 그림이 벽에서 나왔다. 나는 마치 동굴에서 그림이 내 손전등의 불빛에 나타나도록 했다. 그리고 그것의 존재는 동굴 벽에 사슴과 들소를 그린 갈색과 빨간색 안료 만큼이나 기적적이고 매혹적이었다. 나는 밤은 나의 젊음이라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밤은 생각의 도취다.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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