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토록 아름답고도 고통스러운 세계를 안고서 - 나는 그림을 보며 어른이 되었다

빛과 어둠의 실타래
글 입력 2024.12.25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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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책 속의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남겼다.

 

 

(···) 내 인생에 대한 경고처럼 들리던 순간, 나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찾았다. 그곳은 잘 정돈된 곳이었다. 주변이 너무 소란스럽게 느껴지고 복잡한 세상이 버거울 땐. 기꺼이 나는 정적이고 고요한 세계로 숨어들었다.

 

(···) 그림은 작가 자신이 살아가던 시대와 사회, 동료 시민들을 어떤 방식으로 응시하고 있는지 가감 없이 알려주었다. 예술가들은 영락없이 그 시대가 낳은 인물이었다. 당대의 공기를 체화한 사회인이기도 했던 셈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탄생시킨 작품을 본다는 건 그것을 낳은 시대와 직면한다는 말과 같았다.

 

어쩌면 우리가 알던 '위대한 예술가'의 이면을 보게 되어 실망할 수도, 작품에서 느낄 수 있었던 품격과 분위기마저도 반감될 수 있겠다. (···) 하지만 이런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대가들의 작품 세계를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작가에게 가닿은 또 하나의 통로를 확보했다고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아름다운 것만 보거나 경험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 오히려 좌절이나 고통을 기꺼이 감내해나갈 때 마침에 아름다움을 꿰뚫을 수 있는 깊은 시선이 생긴다는 사실. 그림이 내게 준 이 같은 깨달음이야말로, 오답투성이였던 내 삶을 바로잡아준 소중한 선물이었다.

 

- <나는 그림을 보며 어른이 되었다> 작가의 말

 

 

'작가의 말'에서 가장 공감됐던 부분은 미술관 및 박물관을 찾게 된 이유와 시대를 직면한 그림과 맞닿아 있다. 다양한 매체와 넘쳐나는 정보를 마주하며 깊이 생각해 보는 힘을 기르고, 나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관망하는 것.

 

빠르게 지나가는 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다시금 되새겨보는 하나의 기회를 꾸준히 부여함으로써 삶의 방향성을 확립해 나가는 것이다.

 

또한 일종의 사유 시간을 통해서 생애 곳곳에 펼쳐진 역동적인 삶과 격변하는 세계를 관찰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선택'이라는 단어로 한정 지을 수도 있겠지만, 보편적인 측면에서는 여전히 아픔으로 가득하고 동시에 눈부신 생을 살아가는 모두에게로 뻗어간다.

 

오답노트 같았던 삶에 그림이 알려준 것들 <나는 그림을 보며 어른이 되었다>은 그림을 통해서 '생의 빛깔'을 발견하고, 그림의 이면에 숨겨진 '생의 민낯'과 마주하며, 그림이 던지는 여러 질문 속에서 알게 된 '생의 깨침'을 보여준다.

 

'그림'과 함께 무엇을 읽고,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면서 앞선 질문을 떠올려보면, 그림을 보는 시선이 한층 더 밝아졌음을 느껴질 것이다. '밝은'이라는 뜻에는 '불빛이 환하다'는 것 이외에도 '빛깔의 느낌이 환하고 산뜻하다', '감각이나 지각의 능력이 뛰어나다', '생각이나 태도가 분명하고 바르다', '인지가 깨어 발전된 상태에 있다', '예측되는 미래 상황이 긍정적이고 좋다'는 의미가 있다.

 

이로써 빛과 어둠이라는 대립하는 존재, 또는 선(善)과 악(惡)이라는 양면성은 <나는 그림을 보며 어른이 되었다>의 또 다른 부제처럼 느껴진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 스웨덴 한림원에서 2024년 노밸문학상 수상자 강연 <빛과 실> 본문 중에서


 

 

경계 : 변화의 물결에서 이어지는 사유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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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표현주의 화가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의 주도로 창설된 다리파. 당시의 주류 예술이었던 고전의 아카데미 미술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꿈과 환상, 광기 등을 토대로 내적 갈등을 즉각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로 시각화하였다.

 

이어서 1937년 7월 뮌헨에서는 '퇴폐 미술'이라는 주제로 전시회가 열렸다. 이곳에서 가장 심한 공격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 화가는 바로 '에밀 놀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독일의 정체성과 예술을 인정받기 위한 행동으로 나치당에 가입한 이력이 있으며, 출판한 자서전에서 당시의 독일 정부를 옹호하는 내용을 실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공격의 대상이 돼버렸다.

 

'중립'이라는 말의 의미를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경계'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시대의 예술성을 대표하는 두 화가가 그린 그림 속에서, 또한 '독일 표현주의 예술'이라는 문장 뒤에 가장 먼저 등장할 두 이름이 떠올렸다.

 

빛과 어둠이라는 양면성이 공존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외면할 수 없다면 입체적인 면모를 모두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부여해 보는 것이 어떨까? 마주하는 것의 힘이 존재하기를, 그로써 아픔이 외면받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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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호기심, 그리고 관심사를 넘어서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그 순간부터는 더 이상 '개인적인' 영역으로만 여겨질 수 없다. '과학'이라는 눈부신 학문을 발전은 인류의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고, 여러 분야에 걸쳐서 긍정적인 신호를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서 가장 악하고, 비극적인 측면을 부각하는 연구는 한순간에 어둠으로 뒤덮었다. 바로 '우생학'이 등장하면서 생명의 존엄성이 파괴되고, 역사적인 비극을 맞이한 것이다.

 

개인의 욕망에 의해서 또는 마음과 생각 속에만 존재했던 것을 누군가는 외적인 형태로 발산했을 때, 이를 따르는 추종자가 발생한다.

 

혐오를 바탕으로 '악(惡)'에 더 가까워지고, 온갖 나쁜 것을 형상화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걷잡을 수 없이 뻗어간 악의 근원은 생명을 파멸하고, '인간성'의 가장 극단적인 부분을 드러낸다. 때로는 '진리'로 받아들이며, 이를테면 자기 합리화에 빠지기도 한다. 옳고 그름의 선상에서 자신만의 기준선을 그리며, 끝내 '선(善)'을 가장한다.

 

 

 

사랑 : 불안과 상처를 안고 빛나게 타오르는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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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무수한 형태의 사랑이 존재하는데, 이를 다 헤아릴 수도 없이 정말 깊고 넓은 무한의 공간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보편적으로 사랑을 일컫는 것과 좀 더 특수한 관계성에 기인한 사랑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또한 사랑은 과연 아름다움에 가장 가까운 것일까.

 

페릭스 발로통과 오스카어 코코슈카의 그림들, 그리고 '이유리' 작가의 시선이 담긴 이야기에서 사랑이란 불안, 상처, 아픔 등의 감정이 함께 공유하는 것임을 다시 깨달았다.

 

'페릭스 발로통'이 42세에 남긴 자전적 소설은 창작과 현실의 모호함 속에서 그의 그림을 다각도로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특히 스무살에 남긴 자화상이 풍기는 분위기와 소설의 이야기가 어쩐지 하나의 서사처럼 느껴진다. 다소 불안한 듯한 표정과 슬픔이 묻어나는 눈빛에서 이 서사는 완성되었다.

 

한편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 및 극작가인 '오스카어 코코슈카'는 사랑의 다양한 감정을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냈다. 그림과 함께 남겨진 무수한 편지는 한 편의 이야기를 완성해 주는 장치가 된다. 강렬하고 뜨거운 마음의 이면에는 이별의 아픔과 함께 맴도는 차가운 공기가 존재한다. <바람의 신부>는 사랑이 언제나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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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무엇보다 절정을 지나 사라져가는 빛도 불꽃이라는, 휘슬러가 가르쳐준 그 진실이 사무치게 아름다웠다. 마치 우리네 삶처럼 말이다. 청춘의 시절이 소란스레 지나간 후 아프고 적막한 퇴화의 시간니 닥쳐와도, 죽음을 맞기 전까지 우리네 삶은 그 역시 소중하 생명이듯이.

 

P. 42

 

 

때로는 그림의 그 자체를 넘어서 그림을 그린 화가의 어떤 이야기에서 시작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화가의 그림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가 될 수 있고, 또는 개인의 경험과 연결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불꽃'의 심상이 붉은빛과 강렬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여러 의미를 더해가는 휘슬러의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 : 떨어지는 불꽃>처럼 말이다.

 

야상곡은 조용한 밤의 분위기를 나타내며, '밤'의 속성에 영감을 받은 음악 장르이다. 점차 사라지는 빛에 대한 쓸쓸함과 동시에 아늑함마저 느껴지는데, 어둠을 밝히는 '빛'의 상징이 더욱 두드러진다.

 

*

 

이처럼 그림을 보고, 그림을 보는 다양한 해석을 다시금 읽으며, 저마다의 관점에서 사유의 영역을 확대해 간다. 나만의 것이라고 여겼던 영역에서 조금씩 벗어나 보는 것. 아니, 나아간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유의 폭을 넓혀간다. 이를테면 더 많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

 

어쩌면 미처 알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었던 이야기이다. 어떤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막 피어날 때, 그리고 어느 순간이고 단 한쪽 면이라도 '생'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느끼면 작은 전율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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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곤충의 아버지' 앙리 파브르보다 170여 년이나 앞서 곤충을 연구하고 그린 독일의 예술가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을 알게 된 순간이 그러했다. 또한 1916년 새해 첫날, 폴리처가 친구인 '조지아 오키프'의 소묘 뭉치를 들고 길을 나서는 그 순간과 함께 새롭게 시작된 '예술가의 생'을 발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에게 가닿은 새로운 전율은 이 순간에도 도처에 머물러 있다. 잠시만 시선을 돌려보고, 발걸음 잠시 멈춘 순간마다 당신에게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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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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