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한다는 건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일이기 때문에 언제부턴가 1월은 그리 기쁜 달이 아니었다.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느끼고 싶지 않아서 새해 일출을 보러 간다거나, 새해맞이 목표를 세운다던가 하는 뻑적지근한 새해맞이 없이 그저 평범한 하루와 같은 날들을 보내기 위해 애써왔다. 그러나 2026년은 달랐다. 2025년, 과거의 기특한 내가 피 튀기는 클릭 전쟁 속에서 예매해둔 뮤지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티켓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고대하던 그날이 왔다.

2002년 국내 개봉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수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표작으로, 200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장편 애니메이션상과 2002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가족들과 함께 이사를 하던 주인공 '치히로'는 우연히 신들의 세계에 발 들이게 되고, 정체불명의 소년 하쿠의 도움을 얻어 인간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모험을 떠나는 내용이다. 공연은 2022년 3월, 공연 및 제작사 토호에서 창립 90주년 특별 기획으로 도쿄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초연하였으며, 제47회 키쿠타 카즈오 연극상 대상 수상, 2024년 영국 웨스트엔드 진출하여 대성공을 이루었다. 그리고 2026년 1월 드디어 국내에 상륙했다.

상상을 뛰어넘는 초호화 스케일의 무대
용이 하늘을 날고, 바다인지 호수인지 모를 물 한가운데 기찻길이 나있고, 부모가 돼지로 변하는 모습 등의 판타지스러운 모습을 연극으로 어떻게 표현할지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혹여나 표현이 힘든 것은 "관객의 상상에 맡긴다"라는 식의 형태로 가진 않을까 우려가 되기도 했지만, 이미 극장에 들어설 때부터 괜한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웅장한 무대의 모습이 필자를 반겼다.
초록빛의 이끼들이 무대 전체와 무대를 넘어선 2, 3층까지 덮여져 있었고, 푸른 하늘이 무대 가운데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무대 너머까지 광활하게 이끼들이 뻗쳐있는 걸 보니 무대와 관객과의 선이 분명하지 않아 딱딱한 느낌이 들지 않아서 좋았다. 또 하늘 배경을 흘러가게 하니 마치 영화 오프닝에서 치히로가 차에 누워 하늘을 바라볼 때 시선이 이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재밌기도 하였다. 인터미션 시간엔 하늘 배경이 반대로 흘렀는데, 아마 신들의 세계에 치히로가 있는 시간이기 때문에 이와같은 장치를 한 것이 아닐까? 역시 디테일에 강한 나라구나 싶었다.
퍼펫(인형)을 활용한 캐릭터들도 굉장히 인상 깊었다. 애니메이션을 연극이나 뮤지컬화하다 보면, 2D나 3D로 귀엽게 표현되었던 캐릭터들이 간혹 인간 화가 되어 무대에 올라와 당황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렇게 되면 극의 몰입이 깨지기 쉬워지는데 '가오나시' 등과 같이 워낙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들이 유명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캐릭터를 그대로 퍼펫화 시키는 대신 퍼펫티어가 연기하게 했다. 그 예로 '가마 할아범' 캐릭터는 무려 6명의 퍼펫티어가 모여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늘어나는 가마 할아범의 팔(혹은 다리)을 표현했고, 신의 세계 사람들을 잡아먹는 가오나시의 몸집이 점점 커지는 장면은 몸집이 커질 때마다 퍼펫티어가 추가되어 걷잡을 수 없는 괴물의 형태로 돼버린다. 애니메이션으로 볼 땐 캐릭터들의 이미지나 변화하는 모습의 상상력에 놀라웠는데, 이를 아날로그 형태로 이 극의 스케일에 또 한 번 안 반할 수 없었다.
특히 무대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바로 '회전형 세트'이다. 뮤지컬 '레베카' 등에서 봐왔듯이 회전형 세트 자체를 처음 본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이 무대 장치를 잘 살린 극이 또 있을까 싶다. 장면에 따라 공간이 계속해서 바뀌는 애니메이션 특성상 이를 극에 올리기엔 '각색'이 필요할 거라 예상되었는데, 감독의 선택은 각색이 아닌 '원작 그대로'의 것을 살리는 것을 목표로 한 것 같다. 회전형 무대는 타이밍에 맞춰 부모를 돼지로 만들기도 하고, 집에서 온천장이 되기도 하고, 유바바의 사무실에서 린과 센의 숙소로 바뀌기도 한다. 또 180도로 돌아가는 모습이 시간의 흐름이나, 치히로가 가는 길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여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단순한 재현을 넘어 새로운 무대예술로의 탄생이 상상력의 무한함을 느끼게 해주어 경이로운 순간들이었다.

강렬한 여운의 11인조 라이브 오케스트라
'나는 매일 감동을 만나고 싶다'라는 지브리 대표 작곡가 히사이시 조의 책 이름처럼, 무대 위 음악은 첫 선율부터 관객들을 감동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든다. '언젠가 몇 번이라도'나 '또다시'와 같은 명곡들을 수차례 이어폰 너머로 들어왔지만 라이브 오케스트라를 통해 현장에서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음악이 배경으로서의 역할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감싸며 극의 감정을 더욱 올려주는 느낌이 든다 표현하는 게 맞겠다. 더욱이 이 극을 처음 본 사람을 제외하고 애니메이션으로 처음 접한 3040의 세대라면 무려 23년 전, 초등학생 혹은 중고등학생 시절도 아스라이 가져왔을 거라 생각된다. 영화는 때론 내용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기억과 얽힌 감동을 가져다 주곤 하는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또다시'가 내게는 그렇다. 어딘가 벅차오르면서 아련한 이 음악은 신의 세계에서의 추억을 잊지 않으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치히로'의 마음과 그 신비한 세계를 온전히 담은 따뜻한 노래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당시의 초등학생인 내가 생각나 자꾸만 스스로 성장하려는 치히로에게 응원을 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무대가 끝난 뒤에도 가장 마지막까지 무대를 꽉 채운 건 바로 11인조의 라이브 오케스트라였다. 무려 10분간의 커튼콜과 기립박수가 끊이지 않는 와중에도 할 수만 있다면 계속해서 그들을 위해 박수를 치고 싶었다. 다른 극들과는 다르게 오케스트라의 위치가 꽁꽁 숨겨져 있는데, 이끼를 활용한 무대 장치의 효과와 같이 무대와 관객 간의 간극을 없애고 환상의 세계로 오로지 몰입하게끔 만드는 연출의 힘이 아닌가 싶다. 극을 보면서 숨어있는 오케스트라들을 찾는 재미도 느껴보면 좋을 것 같다.

애니메이션 고증 200%, 캐릭터들의 실감 나는 연기
앞서 말한 초호화 스케일의 무대장치도, 강렬한 여운의 11인조 라이브 오케스트라도 중요하지만 결국에 극을 이끄는 가장 큰 힘은 '배우'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원작이 너무 유명한 이 극의 경우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원작과의 '싱크로율'을 따지게 된다. 그런 부분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캐릭터의 성격뿐만 아니라 목소리 톤, 걸음걸이, 대사를 주고 받을 때의 호흡마저도 원작의 감성을 그대로 가지고 와 있다. 특히 '유바바/제니바' 역을 맡은 '나츠키 마리'는 원작에서도 해당 캐릭터를 연기했던 실제 성우이기도 해 해당 캐스트 일의 티켓팅의 주요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싱크로율 높은 캐릭터 표현과 수준 높은 감정 신들은 애니메이션보다 더욱 캐릭터에 감정 이입을 하게 만든다. 특히 주인공인 '치히로'에 대해 이야기 안 할 수 없는데, 애니메이션에선 그저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고학년 정도로 성장했구나 하고 느껴졌던 치히로의 마음이 실제로 눈앞에서 울고 웃으며 역경들을 헤쳐나가는 모습들을 보니 혼자 생각한 것보다 더욱 단단한 마음으로 성장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또, 신들의 온천탕 안에서 박자에 맞춰 춤을 추고 바닥을 닦는 캐릭터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역사 속의 명화의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들어 더욱 극에 몰입할 수 있었다. 용이 된 '하쿠'의 모습을 연기한 퍼펫티어들의 연기에도 감탄하였는데, 가장 인상 깊게 남은 장면은 하쿠가 먼 시야에서 가까워질 때의 원근감을 퍼펫의 크기를 다르게 하여 표현한 부분이었다. 이 부분의 움직임에 있어서도 가장 멀리 있을 땐 속도를 빠르게 하고 다가올수록 점점 몸집이 커지며 느려지는 것이 실제로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놀라웠다.

AI를 활용한 3D 공연이 대세인 가운데, 아날로그 공연이 과연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 극이었지만, 오히려 인간의 따뜻한 면모를 보여주는 '지브리' 특유의 이야기와 연출들이기에 사람들의 손때가 많이 탄 '아날로그'식 공연이 더욱 어울렸던 것 같다. 이 공연을 시작으로 다른 '지브리 스튜디오'의 명작들도 연극 혹은 뮤지컬로 한국에서 만나게 되는 날이 더욱 잦아지면 좋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