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왜 가난하고 그래?" - 코미디로 포장된 계급과 욕망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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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웨이에서 큰 성공을 거둔 후 지난 2018년 한국 초연을 올린 <젠틀맨스 가이드 : 사랑과 살인편>은 올해로 4번째 시즌을 맞이한 인기 뮤지컬이다.
1900년대 초 영국, 가난한 청년 ‘몬티’는 어느 날 자신이 ‘다이스퀴스’ 가문의 8번째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몬티는 가문의 백작 자리를 차지하고자 자신보다 높은 서열의 후계자들을 한 명씩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젠틀맨스 가이드는> ‘사랑과 살인’이라는 다소 무시무시한 부제와는 달리 코미디 장르의 뮤지컬이다. 가장 큰 재미 요소는 몬티의 제거 대상인 ‘다이스퀴스’ 가문의 후계자들을 모두 한 배우가 연기한다는 점이다. 다이스퀴스 역의 배우는 성직자부터 은행장, 한량, 배우, 사업가에 이르기까지 직업과 성별을 넘나드는 분장과 연기를 통해 죽어도 죽지 않는 듯한 느낌을 준다. 더구나 이번 시즌에서는 정문성, 정상훈, 이규형, 안세하가 다이스퀴스 역을 맡아 몰입감 넘치는 연기를 선보였다.
그러나 <젠틀맨스 가이드>를 단순히 코미디 뮤지컬이라고만 보기엔 무리가 있다. 본인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귀족들의 무식한 태도, 살인이라는 잔인한 행위를 반복하며 죄의식이 무뎌지는 몬티, 그리고 몬티를 둘러싼 시벨라와 피비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왜 가난하고 그래?" – 거만한 다이스퀴스
몬티의 제거 대상인 다이스퀴스 가문의 후계자들은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무능하고 거만한 귀족이다. 한량인 에스퀴스 다이스퀴스 2세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불륜을 저지르고, 배우인 살로메 다이스퀴스는 연기를 못함에도 불구하고 당연하다는 듯 주연으로 무대에 오른다. 심지어는 자비를 베풀어야 할 성직자 에제키엘 다이스퀴스 마저도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핑계로 자신을 도와달라는 몬티의 부탁을 거절한다.
현 다이스퀴스 백작인 애덜버트 다이스퀴스는 유일하게 몬티가 아닌 다른 인물에게 제거된(몬티 역시 살해 시도를 하긴 했지만) 다이스퀴스이다. 공연 초반 몬티는 다이스퀴스 가문에 대해 알아보고자 관광 패키지를 통해 백작의 성에 들어간다. 몬티는 백작의 꿈을 꾸며 백작 의자에 앉아 허세를 부리다가 들키고, 꾸지람을 듣는다. 이때 백작이 부르는 넘버가 바로 “왜 가난하고 그래”이다.
가난한 것은 누군가의 잘못이나 선택이 아님에도 “왜 가난하고 그래”라며 몬티를 구박하는 듯한 백작의 태도에는 자신은 절대 가난해질 리 없다는 확신이 깔려 있다. 노력 없이 얻게 된 혜택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타인을 무시하고, 이러한 태도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백작의 모습은 비단 몬티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의 불만을 샀을 것이다. 그가 몬티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것은 바로 그래서이지 않을까? 이렇듯 오로지 돈과 명예만으로 사람을 재단하는 다이스퀴스들의 태도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들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고, 몬티의 살인을 정당화하게 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나는 다이스퀴스!” – 몬티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자신이 다이스퀴스 가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몬티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은행장인 에스퀴스 다이스퀴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몬티는 자신이 다이스퀴스 가문임을 밝히며 은행의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지 부탁한다. 그가 다이스퀴스가 되고자 한 것은 어릴 때부터 이어진 가난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연인 시벨라와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에스퀴스 2세에게 부탁을 거절당한 뒤, 몬티는 곧바로 다이스퀴스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을까?
귀족 신분을 얻어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몬티의 목적이었다면, 다른 선택지들도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다른 다이스퀴스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거나, 감정에 호소하거나, 혹은 부패한 귀족인 그들의 약점을 잡아 모종의 거래를 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몬티가 아들을 죽인 사실을 모르는 그의 아버지 에스퀴스 1세는 몬티에게 은행 일자리를 준다. 은행을 물려주려던 아들을 대신해 자신을 돕게 하려던 것이다. 그렇게 은행 일을 시작한 몬티는 점차 에스퀴스 1세의 신뢰를 얻고, 그는 몬티를 자신의 후계자로 발표할 결심을 한다. 몬티 역시 자신의 어머니를 무시했으나 자신에게 도움을 베푼 에스퀴스 1세를 두고 고민에 빠지는데, 불현듯 에스퀴스 1세가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이제 백작의 자리를 얻기까지 단 한 명만이 남은 것이다.
7명의 다이스퀴스 제거해 1순위 후계자가 된 몬티는 어느덧 가난에서 벗어나 여유 있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연인인 시벨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귀족인 피비의 호감을 사 그녀의 청혼을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그토록 원했던 부와 명예, 사랑까지 다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몬티는 멈추지 않고 현 백작인 애덜버트 다이스퀴스마저 제거해 완벽한 귀족이 되기 위한 욕망을 품는다. 본인이 다이스퀴스 가문임을 알게 된 순간부터 몬티의 목표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 ‘다이스퀴스’가 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어쩌면 이는 미스 슁글이 몬티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며 “너는 다이스퀴스” 넘버를 부를 때, 몬티가 함께 “나는 다이스퀴스”라고 기뻐하며 외치던 순간 이미 예고된 일일지도 모른다. 공연 말미에 등장하는 약간의 반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한번 자리하기 시작한 욕심은 점점 커져 마침내 몬티를 잡아먹게 될 것이다.
이처럼 <젠틀맨스 가이드>는 목적을 잃은 몬티의 욕망을 통해 당시 계급사회를 풍자함과 동시에 되풀이될 비극을 예고함으로써 계급사회가 끝난 지금도 여전한 인간들의 욕심을 비판한다. 단순한 코미디 뮤지컬인 줄 알고 보았던 이 작품이 더욱 와닿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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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와 연출적인 부분을 제외한 <젠틀맨스 가이드>의 또 다른 매력 포인트는 바로 배우들의 쫀득한 애드리브이다. 나는 몬티 역에 김범, 다이스퀴스 역에 정문성 배우인 회차를 감상했는데, 중간중간 몬티를 바라보며 꽃보다 남자의 ost를 부르는 다이스퀴스의 개구진 표정이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다. 또 에스파의 노래를 활용해 개사한 대사는 뮤지컬을 함께 본 우리 엄마도 함께 흥얼거릴 만큼 재밌었던 포인트다.
올해 7월 서울에서 시작한 이번 시즌은 여수, 군산 등을 거쳐 12월 부산, 강릉, 대구 공연을 앞두고 있다. <젠틀맨스 가이드>가 선사할 기분 좋은 유쾌함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한 번쯤 감상하기를 추천한다.
[김현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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