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oin] 드라마 ‘정년이’ 속 지워진, 혹은 선명해진 인물들에 대해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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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여성 국극이라는 참신한 소재와 다양한 인물들의 밀도 높은 이야기로 주목받은 웹툰 <정년이>의 드라마화는 제작 초기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동시에 국극, 가부장제, 퀴어 등 원작 속 서사들을 잘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으며, 실제로 주요 등장인물인 ‘부용’ 캐릭터를 삭제하며 많은 비판을 받았다.
반면 극중 정년이의 라이벌인 ‘영서’는 드라마를 통해 입체감을 더하며 웹툰을 넘어서는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웹툰 <정년이>와 드라마 <정년이> 모두를 좋아하는 팬으로서, 웹툰과 드라마 속 달라진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부용이의 존재가 의미하는 것
여성 국극단이라는 특성상 <정년이>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정년이를 비롯해 미약하나마 각자의 서사를 가지고 있는 주조연들이 10명이 넘는다. 원작 속 ‘부용’은 이 모든 등장인물들을 속에서도, 어쩌면 주인공인 정년이보다도 가장 입체적인 면모를 가진 인물이다.
원작의 메인 이미지에서 알 수 있듯 부용이는 정년이, 영서와 함께 웹툰 <정년이>를 이끌어가는 한 축을 담당한다. 정년이를 응원하는 팬으로 처음 등장한 부용이는 부유한 집안으로 학생임에도 집에서 정한 정혼자가 존재한다. 그저 정년이의 든든한 지원군인 줄 알았던 부용이는 알고 보니 국극의 대본을 쓰는 작가였으며, 인간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정년이를 향한 욕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부용의 아버지는 여성의 사회활동을 반대하는 가부장적인 사람으로 아내 경자의 글을 자신의 것처럼 빼앗아 발표하고, 부용이 역시 자신의 글을 정혼자에게 빼앗긴다.
학교에서 친구들은 어린 나이에도 번듯한 정혼자가 있는 부용이를 부러움과 동시에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활발한 사회활동을 꿈꾸는 친구의 입장에서 부용은 시집을 잘 가는 것만이 살길이라 생각하게 만드는, 여성의 앞길을 막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부용이의 또 다른 비밀은 바로 그녀가 레즈비언이라는 것이다. 정혼자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어릴 적 식모와 선배, 정년이와의 만남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성향은 1900년대 초반이라는 배경 속에서 부용이라는 캐릭터가 지닌 입체감을 더욱 부각시킨다.
평생을 억압된 환경에서 자란 부용은 이런 상황에 소소한 반항을 하면서도 결국 순응하고 만다. 정년이를 떠나 약혼자와 결혼하기로 한 것이다. 마지막에는 다른 선택을 하기도 하나, 우리가 부용이의 선택을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그녀의 존재가 당시 여성의 삶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리를 하고 싶다는 이유로 무작정 상경해 앞만 보고 질주하는 정년이, 타고난 집안과 욕심으로 최고가 되고자 하는 영서와 달리 부용이는 자신의 재능을 무력하게 빼앗기고, 욕망을 드러내고, 혹은 도망치기도 한다.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자신을 마음껏 드러낼 수 없는 갑갑함과 무력감, 그럼에도 감출 수 욕망과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부용이의 내면은 당시에도 지금도 수많은 여성들이 마주하는 현실이자 전쟁이다. 그렇기에 부용이라는 캐릭터의 삭제는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부용이가 곧 여성을 대변하는 존재이기에.
그 시대의 남장여자, 고사장
드라마에서 삭제된 또 다른 캐릭터로는 ‘고사장’이 있다. 고사장은 부용이와 달리 주인공 축에 속하지는 않으나, 정년의 연기와 성장에 도움을 주는 인물이다. 고사장은 정년이가 일하는 다방의 단골손님으로, 정년과 부용을 괴롭히는 불량 남학생들을 쫓아낸다. 언뜻 남자인 것 같은 생김새에 정년은 왜 여자인 자신의 말은 무시하고 남자인 사장님 말만 듣냐며 화를 내자, 고사장은 모자를 벗으며 자신이 여자임을 드러낸다.
고사장이 남장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여자됨에 갇히지 않고 오롯한 한 사람의 대접을 받기 위해서다. 과거 낭독회를 보러 간 고사장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종업원 취급하는 낭독회 남자들에게 분노하여 양복을 맞추었고 이후 남장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여성인 걸 들켜 이상한 취급을 받기도, 때로는 두들겨 맞기도 함에도 그는 이를 지속한다. 긴 머리를 숨겨 양복을 입고 어깨를 떡 벌리고 걷는다고 남성이 되는 것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닌데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진다. 요즘이야 숏컷을 하고 양복을 입는 여성들을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그러나 80년 전 사회에서 성별만으로 요구되는 복장과 태도를 전면으로 거부한 고사장이라는 캐릭터가 지닌 의미는 남다르다. 또한 고사장은 정년이가 남역을 연기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인물인 만큼, 그의 존재가 지워져버린 것에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영서와 정년이, 진정한 세기의 라이벌
드라마 <정년이>에서 가장 화제가 된 장면을 꼽으라면 단연코 영서의 방자 연기를 꼽을 것이다. 국극단에 처음 들어와 제대로 연기하는 법을 모르는 정년이를 째려보던 영서는 잔뜩 찌푸린 얼굴을 180도 바꿔 신명나는 방자 연기를 선보인다. 최고가 되겠다는 목표 하에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하는 노력형 천재 영서는 무서운 재능을 가진 정년이를 질투하면서도 구태여 숨기지 않고, 서로의 원동력이 되어 앞으로 나아간다. 드라마에서 목이 쉬어라 연습하는 정년이를 찾아간 영서는 다음과 같이 소리친다.
"그래, 이기고 싶어. 실력으로 맞붙어서 이길 거라고!
치사하게 수작 부려서 이길 거면 진작할 수 있었어.
내가 왜 이렇게 죽을힘을 다해서 노력하고 있는 건데?
난 네가 최고의 상태일 때 싸워서 이길 거야.
그러니까 이런 미친 짓 그만둬."정년이만 없다면 차세대 남역 후계자로 주목받을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임에도 영서는 정년이의 목을 지키고자 한달음에 달려가고, 국극을 포기하려는 정년이를 간절히 붙잡는다. 영서에게 라이벌 정년이의 존재는 눈앞에서 치워버려 할 존재가 아닌 죽을힘을 다해서라도 정정당당하게 맞붙고 싶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은연중에 국극을 무시하는 소프라노 어머니에게 인정받고자 평생을 바친 영서를 사람들은 노력형 천재라고 부르지만, 국극을 대하는 영서의 태도만큼은 그 누구보다 타고난 예인이다.
서로 밟아 없애려는 것이 아닌, 서로가 서로의 원동력이 되어 함께 성장하고 그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존재, 그것이 라이벌이라는 존재의 가장 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영서의 존재는 주인공 정년이가 가진 가장 큰 행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타고난 소리보다도. 원작에서보다 선명한 목소리로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드러내는 영서를 온 맘 다해 응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현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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