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의 전쟁, 10년의 방랑을 거쳐 마침내 고향 땅을 밟기까지,
트로이 전쟁 영웅 오디세우스의 모험과 귀환!
단 한 번뿐인 유한한 생(生)이기에 갖은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간 한 인간의 위대한 여정!
원작의 감동과 재미를 되살려 새롭게 풀어 쓴 레히너판 [오디세이아]
불멸의 고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전 24권, 약 1만 2,000행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 운문 서사시로 되어 있는 낯선 형식, 반복적이고 틀에 박힌 서사시 특유의 묘사 등은 원전을 읽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적잖은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구성에 있어서도 호메로스의 원작은 오디세우스의 귀향이 임박한 시점에서 시작되는데, 초반에는 오디세우스의 아들인 텔레마코스의 모험담이 주를 이루고, 오디세우스는 5권에서부터 등장한다. 그의 10년간의 여정은 회상 형식으로 서술되는데, 이 때문에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들에게는 이야기의 흐름을 파악하기에 다소 복잡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레히너는 이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서두에서 트로이 전쟁의 전말을 간략히 제시하고 산문 형식으로 트로이 전쟁 후부터 오디세우스 일행이 겪은 사건들을 시간순으로 재구성하여 보다 쉽게 흐름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특유의 생생한 묘사로 오디세우스의 여정을 생동감 있게 재현하여 독자들이 보다 쉽고 흥미롭게 작품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써 원작의 내용을 잘 살리면서도 재미와 감동을 배가시킨 작품으로 호평을 받으며, 반세기 넘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또한 고향을 향해 가는 동안 온갖 역경을 슬기롭고 유연하게 대처해 나가는 오디세우스의 모습에서 인간의 굳은 의지와 지혜의 힘 등을 되새길 수 있다. 이뿐 아니라 2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정절을 지키며 남편을 기다리는 페넬로페, 불의를 행하는 구혼자들에게 동조하지 않고 주인의 재산을 지키며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충직한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 등 청소년 독자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인간상을 제시한다.
이름을 빌린 사람
신화 속 인물은 이름을 듣는 순간 초월적이고 전설적인 이미지가 먼저 그려진다. 이 이야기는 20년짜리다. 전쟁에 10년, 그 뒤의 방랑에 다시 10년. 그만한 시간을 담은 이야기는 결국 한 사람의 안쪽까지 들어가야 한다.
이 책은 아우구스테 레히너가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각색한 판본이다. 원작의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장면을 되도록 줄이고, 인간 정신의 위대함과 곤경을 헤쳐 나가는 용기에 더 주목한다. 좋은 인간상의 모델을 여럿 제시하며 청소년 문학으로서의 역할에 힘을 실었다. 오디세우스의 지략과 정신력도 강조되면서 위기 앞에서 그가 어떻게 침착하게 해결책을 찾는지가 상세히 서술된다.
그에 반해 이번에 개봉한 영화 <오디세이>는 영웅담보다 오디세우스라는 사람, 그가 품은 취약성을 더 조명한다. 신과 닮은 면모나 지략가의 위엄보다, 두려움과 의심과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한 인간을 담아낸다. 거인의 동굴을 벗어난 직후가 그렇다. 책에서 그는 배 위에서 고함을 지르고, 그 소리에 분노한 폴리페모스가 던진 바위에 부하들이 죽는다. 영화는 그 자리에 화살을 놓는다. 부하들이 말리는데도 그는 활을 든다. 그 화살이 부른 분노 때문에, 미처 배에 오르지 못한 부하들이 죽는다.
한 장면에서 두 사람이 갈린다. 책의 그는 참지 못한 사람이고, 영화의 그는 만류를 뿌리친 사람이다. 취약함이 실수에서 선택으로 옮겨 앉는다. 못 참는 것보다 듣지 않는 것이 더 약하다.
책에서 그는 대개 이야기로 상황을 모면했다. 겪지 않은 일을 상상 속에서 조직해 그럴듯한 내력으로 만들고, 그것으로 상대의 환심을 산다. 고향 이타케에 돌아와서까지도 만나는 사람마다 거짓된 모습으로 거짓 신세를 지어낸다. 자기 집 마당에서까지 그는 남의 이름을 빌려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 재주가 아내 앞에서 가로막힌다. 기대와 실망이 오래 반복된 끝에, 그가 또 남의 이름으로 먼저 다가온 탓에 이번에는 환심이 아닌 의심을 산다.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가장 오래 멀리 있었다. 그녀와의 거리를 좁힌 것은 잘 짜여진 이야기가 아닌 단 둘만이 품은 기억이었다.
페넬로페도 이야기를 짓는 사람이었다. 수의를 다 짜면 재혼하겠다 해두고, 낮에 짠 것을 밤마다 풀어 시간을 벌었다. 오디세우스는 이름을 바꿔 시간을 벌고, 그녀는 실로 시간을 벌었다. 지략가가 꾀로 설득해내지 못한 유일한 인물이 그가 사랑하는 아내였다.
원작에서 이 모험담의 화자는 오디세우스 본인이다. 이야기를 꾸며내는 데 능한 사람이 과거를 회상하며 자기 모험을 제 입으로 묘사한다. 그 구조가 이 이야기를 극적이고 초월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힘이었다. 레히너는 그 순서를 풀어 시간 순으로 정렬하고 3인칭으로 바꾸었다. 독자는 긴 항해를 처음부터 온전히 따라가고, 의심의 거리는 좁혀지며, 모험에는 더욱 생동감이 붙는다. 대신 오디세우스의 입을 통과하면서 부풀던 초월이 사라졌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위대한 영웅의 초월성보다, 인간의 유한성과 그 한계를 끝내 넘어서게 만드는 한 사람의 정신에 보내는 찬사였다.
신이 없었다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람이지만, 오디세우스는 수많은 유혹에 빠진다. 거인 앞에서 그는 이미 한 번, 참지 못해 잃었다. 키르케가 내어주는 안락함에 빠져 1년을, 아름다운 요정 칼립소와 7년을 보내기도 한다.
신들은 인간을 관찰하고 시험한다. 궁지에 빠뜨리고 곤경에서 건져 올리며 이야기의 전개를 돕는다. 그렇다면 신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는 과연 계속 움직였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신들이 일으킨 파도는 그를 어딘가로 내모는 장치일 뿐, 그 앞에 놓인 시험은 우리 앞에 놓이는 것들과 닮아 있다. 배가 부서지고 사람이 죽고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 일에는 신이 필요하지 않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쉽게 입을 연다. 신념이나 정체성, 가치관 따위는 삶을 위해 기능할 뿐 죽음 앞에서는 아무 힘이 없다. 평생 섬겨온 신의 금기조차 깨게 만드는 것이 죽음의 두려움이다. 굶어 죽는 쪽을 면하려 손대면 안 되는 것에 손을 뻗는 선택은 제3자에게 쉽게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수많은 괴물과 신의 시험을 통과한 인물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만드는 것도,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도, 그토록 기다린 남편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같은 두려움이다.
오디세우스에게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아가멤논의 영혼이 나타나 아내를 믿지 말라고 말한다. 귀향한 뒤 아내의 손에 죽은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 한마디에 아내와 고향을 향한 마음이 순식간에 흐려진다. 그래도 원래 있던 믿음이 지워지지는 않는다. 칼립소가 주는 편안함을 누리면서도 그는 뗏목을 모은다. 한 번 심어진 믿음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특성이 그를 강인하게도, 한순간에 나약하게도 만든다. 전쟁을 일으키면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돌아가고 싶으면서 돌아가기 싫고, 사랑하면서 믿지 못하는 것은 전부 같은 곳에서 지어진 것들이었다.
그 취약함에서 머뭇거리는 그들을 움직이게 하고 이야기를 밀어 올리는 건 신이다.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건 아테나의 뜻이고, 그와 아들의 귀향을 도운 것도 제우스의 이름으로 지켜진 손님의 법이었다. 죽음과 죽음 사이에 놓이는 결정 앞에서, 두려움과 의심이 심어지는데도 기어이 결정하게 만드는 건 믿음이라는 장치였다. 결국 믿음도 이야기다. 그가 남에게 지어낸 것이 거짓 신세였다면, 자기에게 지어낸 것은 돌아갈 집이었다.
평화를 좇는 존재
신은 평화를 원했다. 포세이돈은 제 아들을 해친 오디세우스를 벌했고, 아테나는 그를 도와 전쟁을 끝내게 했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오디세우스는 칼을 뽑아 들었다. 아테나는 더 이상 형제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라는 말로 그를 멈춰 세운다. 20년을 건너온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이 승리도 죽음도 아니라 중단이라는 것. 인간이 평화라 부르는 것은 그렇게 한 번 멈춘 칼에서 시작된다.
인간은 계속 평화를 좇는다. 자신과 가족, 동료와 나라를 지키는 평화. 그것을 만들기 위해 평화를 위협하는 적을 제거하는 싸움을 일으킨다. 앞에는 적을, 뒤에는 소중한 것을 놓고 앞만 보며 나아간다. 그러다 뒤에 있는 사람들도 한 명의 취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잊는다. 스무 해 만에 문간으로 돌아온 그를 단번에 알아본 건 늙은 개였다. 아르고스는 오디세우스를 알아보고 그제야 눈을 감는다. 과수원에서 흙을 파던 아버지는 늙어 있었다. 기다림도 낡는다. 스무 해를 짜고 풀며 남편을 기다린 아내는, 정작 그가 문 앞에 섰을 때 그를 믿지 못했다. 지키려고 바다를 건너는 동안 남은 것들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뒷모습은 끝까지 말이 없었고, 그 뒷모습을 향한 생각은 각자가 만들어낸 상상이었다.
인간은 죽음이 두려워 최악의 상황을 상상한다. 대비하려는 능력이 동시에 저주가 된다. 그 상상 속에서 상처와 의심이 자라고, 기억의 왜곡과 삭제가 일어난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싸웠는데 어느 쪽에도 평화는 없었다. 평화를 위해 싸운다는 신념이 평화의 가장 큰 적이 되어 버렸다.
레히너는 원작의 폭력을 덜어내고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세밀하게 그렸다. 감동을 남기려면 삭제가 필요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워진 것은 잔혹한 장면뿐이다. 부족하고 겁 많은 모습은 지우지 않았다. 인간의 평화는 사실 우리의 생각과는 거꾸로 지어진다. 자기 약함을 감추고 밖의 악을 지우려 드는 인간의 본성을 반대로 위치시킴으로서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위대한 이야기는 오래 힘을 얻게 되었다.
죽음을 없애려 죽이고 더 큰 죽음을 되돌려 받는 일이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 있다. 구혼자들을 베어 집을 되찾자 그들의 가족이 몰려왔고, 오디세우스는 다시 칼을 들었다. 스무 해를 견딘 사람이 집 안에서 같은 일을 반복한다. 허기를 없애려 더 많이 탐하고 더 큰 허기를 맞는 것도 같다. 결과를 예측하면서도 인간은 같은 결정을 내린다. 그렇게 대비하고 무너지는 사이에도 죽음은 다가온다.
평생을 그렇게 싸워도 인간은 자신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약함을 감추려고 평화를 좇는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정한 '악'에 저항하다, 자기를 통제하는 법조차 잃고 가장 큰 적이 자기 자신이 되도록 스스로를 몰아붙인다. 죽음이 가까이 드리우고 낡은 몸이 그 사실을 증명한 뒤에도 그들은 약함을 인정하는 대신 더 강한 신을 찾아 초월을 의탁한다. 평화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조금 더 미루기 위한 기도다. 3천 년 전의 이야기는 영웅은 만들 수 있어도 그에게 초월은 주지 못했다.
평화를 위해 죽음을 택하고, 죽음을 피하려 평화를 기도한다.
그렇다면 죽음이 곧 평화인가, 그 둘은 반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