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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활처럼 휘어지다 부러진 사람 - 박하사탕 [영화]

들꽃을 찍고 싶어 하던 청년은 어떻게 사람을 고문하는 형사가 되었을까. 거꾸로 흐르는 영화는 한 사람의 삶에 남은 시대의 흔적을 되짚어간다.

by 김지현 에디터
2026.08.17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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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을 봤다.


대학교 교양 수업에서 이 영화가 시간을 거꾸로 배치한 작품이라는 것, 1980년대를 지나온 한 남자의 트라우마를 다룬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거의 잊은 채 영화를 봤으니, 사실상 아무런 정보 없이 본 셈이었다.


영화는 1999년, 마흔이 된 김영호가 20년 만의 야유회에 불쑥 나타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한때 함께 어울렸던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어딘가 이상하고 불안해 보인다. 그러다 철교 위로 올라가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외친다.

 

 
"나 다시 돌아갈래!"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질문은 하나였다. 

 

‘도대체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들꽃을 찍고 싶었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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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끝내 만나게 되는 스무 살의 영호는 순박한 청년이다. 이름 없는 들꽃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사진으로 간직하고 싶어 하는 사람. 사진기를 갖는 것이 꿈이었던 사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수줍게 웃던 사람이다.


그런 영호에게 1980년대의 군인이라는 역할은 너무 가혹했다. 사람을 해치기는커녕 들꽃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하던 사람에게 총을 들고 누군가를 향해야 하는 역할은 그의 천성과 너무도 맞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영호를 보며 활을 떠올렸다. 활은 화살을 멀리 보내기 위해 크게 휘어진다. 어느 정도까지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지만,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을 넘어 휘어지면 결국 부러지고 만다. 영호도 그랬던 것 같다. 시대가 한 사람을 그의 천성과 반대 방향으로 있는 힘껏 잡아당긴 결과였다. 그에게 처음 생긴 균열은 그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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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점에서 영호는 분명 시대의 피해자다. 하지만 이 영화가 어려운 것은, 그렇다고 이후의 영호까지 마냥 안타깝게 바라볼 수는 없다는 데 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눈물을 흘리던 마음 약한 군인은 어느새 사람을 때리고 고문하는 형사가 되어 있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폭력적인 역할을 견디지 못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그 폭력을 다른 사람에게 행사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시대가 그를 한 번 꺾었다고 해서 그가 이후 저지른 모든 일까지 시대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나는 거기에서는 조금 망설여졌다. 영호는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분명한 가해자이기도 하다. 두 모습이 한 사람 안에 겹쳐 있다는 점 때문에 그를 안타깝게만 볼 수도, 그렇다고 미워하기만 할 수도 없었다.

 

 

 

순임, 그리고 영호가 밀어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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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의 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여주는 인물은 첫사랑 순임이다.


순임은 공장에서 박하사탕을 포장하며, 군대에 간 영호에게 박하사탕을 보내주던 사람이다. 들꽃을 찍고 싶다는 영호의 꿈을 기억하고, 훗날 그에게 사진기를 건네려 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순임은 영호에게 한 명의 첫사랑이기 전에, 부러지기 전의 자신을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다.


형사가 된 영호가 자신을 찾아온 순임에게 일부러 못되게 굴어 돌려보내는 장면이 그래서 아팠다. 순임이 싫어져서가 아니라, 이제는 순임 앞에 설 수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순임을 밀어내는 일은 영호가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는 방식처럼 보였다.


그렇게 순임을 밀어낸 뒤에도 영호의 폭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내 홍자에게 냉담하게 굴고, 다른 여자들을 함부로 대한다. 시대의 폭력이 영호를 부러뜨렸다면, 부러진 영호의 날카로운 단면은 이번에는 곁에 있는 사람들을 벤다.

 

 

 

거꾸로 흐르는 이야기가 준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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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시간을 거꾸로 배치한 구성이었다.


영화 초반, 그러니까 시간상으로는 영호의 삶에서 가장 마지막에 가까운 시점에 그는 권총을 들고 자신의 인생을 망친 사람들에 대해 광남에게 이야기한다. 증권회사 직원에게 속았고, 동업하던 사람은 돈을 들고 도망갔다고 말한다. 내 인생을 망친 사람들 중에 누구를 죽여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 장면을 보며 나는 ‘이제 곧 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하나둘 나오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는 전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영호가 말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점점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물론 그 일들 역시 그의 삶을 어렵게 만든 사건이었겠지만, 그것만으로 영호라는 사람이 왜 그렇게까지 망가졌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을 찾아가 모두 복수한다고 해도 영호의 삶이 원래대로 돌아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과거로 갈수록 알게 되는 것은 영호의 인생을 망친 범인을 어떤 한 사람으로 지목하기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역순 구성은 그 사실을 관객이 서서히 깨닫게 만든다. 앞으로 흐르는 영화였다면 한 순박한 청년의 예정된 몰락을 지켜보는 이야기가 됐을 텐데, 거꾸로 흐르는 덕분에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질문하게 된다. ‘도대체 누가,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영화는 더 오래전으로, 더 오래전으로 계속해서 돌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아직 아무것도 망가지지 않았던 한 청년 앞에 멈춰 선다. 나에게는 그것이 일종의 반전처럼 느껴졌다. 범인을 찾아가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남은 것은 어떤 악인도 아니었다. 한 사람에게 처음 상처를 남긴 시대와, 그 상처를 품은 채 살아오면서 그 자신이 했던 선택들이었다.

 

 

 

거꾸로 달리는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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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는 기차가 계속해서 나온다. 챕터가 바뀌며 시간이 과거로 넘어갈 때마다, 화면에는 기차에서 찍은 풍경이 거꾸로 흐른다. 지나쳐온 풍경이 반대 방향으로 되감기는 것을 보고 있으면, 지금 영화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영화 속 기차는 정해진 선로를 따라 앞으로 달린다. 멈추고 싶다고 멈출 수 없고, 돌아가고 싶다고 돌아갈 수 없다. 이미 지나온 풍경은 뒤로 멀어질 뿐이다. 그 점에서 기차는 영호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처럼 보였다. 기찻길이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을 함께한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스무 살의 소풍도 철교 아래였고, 마흔의 영호가 마지막으로 서 있던 곳도 바로 그 철교 위였다. 영화 속 시간으로 보면 영호의 삶은 그 선로 아래에서 시작해, 같은 선로 위에서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영호가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장면은, 절대 거꾸로 달려주지 않는 것을 향한 외침이기도 하다. 현실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속 시간은 그럴 수 있다. 챕터마다 거꾸로 흐르는 기차의 풍경은, 영호가 그토록 원했던 '돌아가는 일'을 영화가 대신 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되감기의 끝에서, 영화는 우리에게 스무 살의 영호를 보여준다.


*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시간상으로는 모든 일이 시작되기 전, 1979년의 소풍이다. 스무 살의 영호는 훗날 자신이 죽음을 맞게 될 바로 그 철교 아래에 앉아 있다. 그때의 영호는 아직 맑은 얼굴을 하고 있다. 사진기를 갖고 싶어 하고, 들꽃을 찍고 싶어 하고,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서툴게 웃는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고 나면 영화의 첫 장면에서 영호가 외쳤던 말도 조금 다르게 들린다. “나 다시 돌아갈래.” 처음에는 그저 죽음을 앞둔 사람의 절규처럼 들렸던 말이,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어디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이었는지 조금은 짐작하게 된다.


그가 돌아가고 싶었던 곳은 성공하기 전도, 결혼하기 전도 아니었다. 들꽃을 찍고 싶어 하던, 아직 아무것도 부러지지 않은 자기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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