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중국인 친구의 유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휴대폰 통신사에 동행했다. SNS로만 연락하던 친구와 직접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리는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달라 번역기를 사이에 두고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눴다. 번역기로도 완전히 옮겨지지 않는 의도가 있을 때면 서로 멋쩍게 웃었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헤어졌지만, 짧은 만남 동안 나는 그 친구를 좋아할 만한 이유를 몇 가지 발견했다. 매장 문을 잡아줄 때마다 수줍게 건네던 “thank you”나 당황할 때마다 짓던 표정 같은 것들이었다.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 친구의 모습에서 이따금 나와 닮은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헤어진 뒤 나는 메시지로 다음에는 중국어를 연습해 오겠다고 했다. 몇 시간 후 친구는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는 사진을 보내왔다. 언젠가는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답장과 함께였다.
늘 그렇듯 해야 할 일들을 마친 뒤 저녁에는 옷을 갈아입고 집 근처 도서관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는 오래 알고 지낸 친구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작은 부탁 하나를 꺼내는 데에도 괜히 긴장이 되어 한참을 뜸 들인 뒤 말을 꺼냈다. 그러자 친구는 다정하게 말했다.
“그건 부탁도 아니지. 난 또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네.”
도서관에 도착해 평소 앉던 3층 창가자리를 찾았지만 오늘은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2층 창가자리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창문 안으로 선선한 가을 바람이 들어왔다.
도서관이 닫을 시간이 가까워지자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며 문득 생각했다. 아름다움은 특별한 하루에만 찾아오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모든 일이 뜻대로 풀린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에 남는 하루였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 영화 <패터슨>(2016)과 <퍼펙트 데이즈>(2024)를 다시 떠올렸다. 두 영화는 주인공들의 반복적인 일상을 조명하는 영화이다. 두 영화 모두 다른 영화같이 매우 극적인 장면, 이를테면 남녀 간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나 주위 사람의 배신과 죽음 같은 절정의 순간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반복되는 하루가 더 이상 단조롭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법한 순간들이 눈에 들어온다.
영화 - <패터슨>(2016), <퍼펙트 데이즈>(2024)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 버스 운전사나 공중화장실 청소부와 같은 각자의 일을 하고, 시간이 날 때는 시를 쓰거나 책을 읽기도 한다. 때로는 평화를 무너뜨리는 특별한 사건이 생길 때도 있지만 그 원인이나 해결 이후의 결과가 명료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는 것이 영화의 결말도 아니다. 그저 그렇게 이어지는 하루가 반복된다.
물론 영화 속 인물들의 삶은 전문적인 감독의 연출 아래 조형요소와 원리를 고려한 구도로 촬영되고 편집된 장면이다. 그러니 우리의 삶과 그들의 삶을 같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더군다나 두 주인공의 취미 역시 인스타그램 릴스나 유튜브 쇼츠를 보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의 취미와는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일상을 바라보며 우리가 눈여겨볼 만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그저 흘려보내지 않는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익숙한 풍경과 사물에 자신의 시선을 머무르게 한다. 아름다움은 어쩌면 특별한 삶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삶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선은 영화 속 인물들뿐만 아니라 미술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참여형 작품 - 김영글 <이딴 걸 팝니다>(2026), 천근성 <시장 커피>(2025)
지난 7월까지 진행되었던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글짓, 쓰는 예술》에서는 김영글 작가의 <이딴 걸 팝니다>(2026)를 볼 수 있었다. 작가는 이사를 앞두고 사용하지 않은 채 지니고 있던 평범한 사물들을 전시했다. 각각의 사물에 얽힌 이야기도 함께 소개했다. 관객은 물건과 이야기를 감상한 후 원하는 한 물건에 직접 가격을 책정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압구정역 근처 아름다운가게에서 산 오만 오천 원짜리 손목시계, 언제 주웠는지 모르지만 거친 산행을 함께했던 나무 지팡이, 세상을 떠난 친구가 선물해 주었던 칫솔과 가장 비슷하게 생긴 붉은 칫솔 등이 있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했던 물건들이 그 이야기를 이해하고 나면 다르게 보인다. 그러나 그 물건들이 일순간 ‘아름답게’ 보였다거나 ‘예술답게’ 보였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물건 자체보다는 그 물건에 묻어나는 ‘삶’에 대한 느낌에 가까웠다.
작가만이 아니라 관람객의 이야기에서도 예술의 가능성을 찾는 참여형 작품도 있다. 작년 8월에 종료된 수원시립미술관 《모두에게: 초콜릿, 레모네이드 그리고 파티》에서는 천근성 작가의 <시장 커피>(2025) 프로젝트를 마주했다. 작가는 전시 시작 전 한 달간 수원 역전시장 상가에 카페를 임시로 개업하여 무료로 음료를 제공하는 대신 방문객의 그림이나 글 등의 창작물을 대가로 받았다.
전시된 방문객들의 작품에는 그들만의 독특한 개성과 삶의 이야기가 녹아 있었다. 딸에게 전하는 사과의 편지, 모두의 평안을 비는 기도, 마음을 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고백하는 글 등이 있었다.
두 작품에서 사람들이 건넨 것은 거창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떼어 온 아주 작은 흔적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평범했던 물건과 글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시간을 담은 것이 된다.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일일 것이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반복되고 있는 하루를 조금 더 자세히 바라보는 것. 매일 지나치는 풍경과 익숙한 물건, 무심코 나누는 대화 속에 깃든 이야기를 잠시 들여다보는 것.
일상을 예술로 만드는 것은 특별한 하루가 아니라, 그 하루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