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부서진 과일은 조각이 된다 - 파과 [도서]

마성의 흡입력, 소설 [파과]가 지닌 매력들
글 입력 2024.10.29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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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개봉 예정인 영화 [파과]의 포스터

 

 

 

할머니 킬러, 독자를 사로잡는 마법같은 두 단어의 조합


 

파과, 암살자가 주인공인 소설이다. 그런데 이 암살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요원의 모습이 아니다. 시장에서 복숭아와 귤 몇 개를 사들고 홀로 집을 지키는 노견의 곁으로 향하는 평범한 할머니. 번뜩이는 칼날를 품에 숨기는 것보다 강아지를 품에 안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조각이지만, 그녀의 직업은 공연히 암살자, 킬러다.


우리는 암살자를 어떤 형태로 떠올리는가. 짙은 선글라스를 쓴 레옹. 짙은 화장과 타이즈를 창작한 블랙위도우 등…. 이 밖에도 다채로운 개성을 지닌 수많은 암살자 캐릭터가 떠오른다. 생각해보면 모순적이다. 킬러의 본분은 암살 아닌가. 최대한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목표물을 제거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일 것이다.


파과의 주인공, 할머니 암살자인 조각은 이런 면에서 가장 완벽한 암살자다. 노년 여성이라는 사회적 계층은 어떤 직업으로 위장해도 무해하게 느껴지며 어느 상황에 끼어있어도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 무엇보다 물리적으로 상대를 제압할 능력이 없다고 여겨지기에 수사 대상에서도 제외될 가능성도 다분하다.


이런 장점을 바탕으로 조각은 살인청부업의 대모로서 수 십 년 동안 활약했다. 수도 없이 생명의 혼을 꺼트리고 가정을 파괴했으며 누군가에게 극심한 충격을 심어주기도 했다. 그 대가로 소중한 것을 잃기도 했지만 그녀의 칼날은 여전히 날카롭고 번뜩인다.


소설 [파과]의 재미는 이 지점에서 나온다. 노년기로 접어든 조각이 급격히 떨어져가는 신체능력을 베테랑의 경험을 바탕으로 극복해가며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 그러나 그 안에서 피어나는 연민과 미련의 감정으로 인해 뒤늦은 나이에 그녀는 암살자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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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를 위해 꺼내든 칼


 

학창시절 선생님을 존경했거나 영화나 음악 등 예술을 접하고 운명적으로 이끌렸을 수 있다. 현실에 치이거나 경제적인 이유 같은 다소 심심한 이유로 직업을 정했을 수도 있지만 그런 사유도 직업을 정하는 대표적인 동기가 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조각이 킬러가 된 동기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몸부림에서 비롯됐다. 싸이코패스, 냉혈한, 살인 기계. 이런 특성들은 조각과는 거리가 먼 단어들이다. 어린 조각은 그 나이 대에 걸맞은, 감정에 치우친 행동으로 혼자가 되었으며 귀가 중 물리적 위협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살인을 저질렀을 뿐이다.


조각의 실력에 감명 받은 그녀의 암살 멘토, 류는 그 일을 계기로 조각을 거두었으며 한 번 버림받은 조각은 새로운 가족에게 내쳐지지 않기 위해 암살 실력을 갈고 닦는다. 프로 암살자가 된 그녀는 본격적으로 암살자로서 맹위를 떨치지만 그 행위의 동기는 돈이나 재미 따위가 아니다.


조각의 암살 행위는 그저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한 것과 홀로 남겨지는 것을 무서워하는, 지극히 기본적인 욕구를 보장받기 위한 방어기제에서 기인했다. 조각의 잘못을 정당화하려는 설명이 아니다. 노인이 된 그녀가 암살자로서, 그리고 인간 조각으로서 존립의 위기를 겪게 되는 계기가 그녀의 과거사에 있기 때문이다.

 

 

 

이른(?) 나이에 깨달은 본연의 모습


 

조각의 후배 암살자 투우는 그녀의 암살 행각으로 아버지를 잃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조각에게 원한을 가지게 된 그는 조각과 가벼운 인연이 있을 뿐인 어린 아이를 납치하여 그녀를 사자굴로 불러들인다.


아이를 구하는 행위는 분명히 업무 외의 일이다.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위험할뿐더러 상대인 투우도 전문 암살자인지라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살아 돌아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그러나 조각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투우의 부름에 응한다.


이 순간을 위해 암살 경력을 쌓아온 것처럼 그녀는 무던하다. 숨이 멎은 반려견을 보고는 덤덤하게 소각업체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총기상에게 실탄을 구매하며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이는 의사가 생명을 구하고 청소부가 낙엽을 쓰는 것처럼 일상의 순간으로 묘사된다.


앞서 저지른 수많은 암살보다, 인질인 어린 아이를 구하러 가는 모습이 인격체 조각의 본분처럼 느껴진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 어린 조각이 할머니가 되어 타인을 지키기 위해 사지에 뛰어드는, 완벽한 수미상관.


일이 마무리되고 조각은 어린 아이의 가족에게서 느꼈던 미련을 어느 정도 떨쳐내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 그녀는 가질 수 없는 것을 희망하기보다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따뜻한 가족의 보금자리를 희망했던 오랜 세월을 마침내 떠나보낸 그녀는 늦은 나이에 자신의 정체성을 구체화시킨다. 자신과 주변 사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 그 결과에 따라 행복을 느끼기도 좌절하기도 하지만 주저앉지 않고 노력을 이어나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직 조각은 그만둘 때가 아니다. 이제야 알아차렸는데 멈추기엔 나이가 아깝다. 아직 팔팔한 그녀는 여느 때처럼 차가운 금속을 품 안에 숨긴 채 시장을 활보한다. 날은 종종 번뜩일 테지만 그녀의 의중은 이전과 다를 것이다. 떠나간 그와 남아있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조각은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리라 추측할 수 있다.


구병모 작가의 [파과]는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암살 장면과 사이사이에 독자의 연민을 이끌어내는 휴머니즘 서사의 교차가 매력적인 소설이다. 워낙 흡입력이 높았기에 장편소설이지만 금세 완독할 수 있었다.


이미 긴 호흡으로 쓰여 졌지만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매력 있게 설계되었기에 이 인물들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길게 설명했지만, 후속편을 원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어떠한 형태여도 좋다. [파과]의 IP를 이용한 무궁한 이야기가 세상을 빛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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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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