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아이스쇼의 진화 - G-SHOW : THE L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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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겨스케이팅의 인기가 올라가며 아이스쇼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2024년이지만, 실제로 직접 아이스쇼를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한정적일 것이다. 지금까지 아이스쇼 관객은 기존의 피겨스케이팅 팬들이 좋아하는 선수의 경기 외 모습을 보러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피겨스케이팅 팬이 아닌 관객까지 아이스쇼에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무언가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
2022년부터 시작된 'G-SHOW'는 아이스쇼에 스토리텔링을 더하며 아이스쇼라는 장르에 더 다양한 관객이 유입되도록 노력해 왔다. 기존의 아이스쇼가 선수 개개인의 무대를 차례대로 감상하는 형태였다면, G-SHOW는 스케이터 각각에게 배역을 주고 이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게끔 구성한다. 신라시대 수로부인 설화를 다뤘던 작년, 재작년에 이어 올해 G-SHOW는 한발 더 나아갔다. 'THE LUNA'라는 제목과 함께 '뮤지컬 아이스쇼'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관객을 찾은 것이다.
공연이 시작되고 장막이 걷혔을 때의 첫인상은 무대가 생각보다 굉장히 넓고 깊다는 것이다. 웬만한 대형 뮤지컬 무대 만한 아이스링크 위에서 모든 출연진이 스케이트화를 신고 나와 군무를 추고 합창을 하는 모습을 봤다. 그제서야 생소하게 느껴지던 '뮤지컬 아이스쇼'라는 게 무엇인지 조금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공연은 기후위기가 극심해져 여름과 겨울만 남은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바다가 얼어 있는 겨울에만 갈 수 있는 섬, '루나'. 그곳에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봄과 가을을 함께 볼 수 있는 환상의 나무 '노르말리스'가 존재한다. 겨울이 되면 마지막 희망인 이 나무를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루나를 찾아오고, 이때 열리는 루나 선발대회는 모두가 기대하는 연례행사다. 작품은 제10대 루나 선발대회를 앞두고 노르말리스를 지키려는 윈터와 친구들의 여정을 그린다.
'뮤지컬 아이스쇼'라고 했을 때 아이스쇼가 중심이 될 거라 생각했지만, 합창과 군무로 열어젖힌 첫 장면은 앞으로 본격적인 뮤지컬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는 듯했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 음악은 단순히 분위기를 조성하는 배경음악에 그치지 않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넘버'로 활약한다. 장소가 체육관인지라 음향이 아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기대 이상으로 다양한 넘버를 만날 수 있었다. 스케이팅과 노래가 적절하게 배분되어 있고, 스케이팅 선수들이 노래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덕에 어색한 느낌도 없었다.
무대 디자인도 인상적이다. 별다른 소품 없이 조명과 음악만 사용하는 보통 아이스쇼와 달리 'THE LUNA'에는 꽤 다양한 무대장치가 등장한다. 루나의 호텔 풍경은 일반적인 뮤지컬 무대에 등장해도 이질감이 없을 것 같았다. 환상의 나무 노르말리스는 종이와 비닐을 업사이클링한 형태처럼 보였는데, 기후위기를 다루는 이야기에 잘 어울리는 데다가 흔한 나무 형상이 아니라서 계속 눈길이 갔다.
아이스링크로 만들어진 무대의 특성상 많은 장치를 사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지만, 조명과 영상이 이를 보완한다. 그것으로도 다 채우지 못하는 무대의 빈 부분은 스케이팅으로 메워진다. 작품은 바다까지 꽁꽁 얼어붙어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타고 다니는 게 어색하지 않은 배경을 설정하여 스케이팅이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끔 했다. 인물들은 대화하며 무대 위를 활주하고, 함께 페어 안무를 선보이기도 한다. 인물의 갈등이나 감정선이 스케이팅으로 어떻게 표현되는지 지켜보는 것 또한 이번 공연의 색다른 재미이다.
작품 자체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배경이 되는 기후위기 상황은 지금 우리가 현실에서 직면한 상황인 만큼 여러 가지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미 지구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노르말리스로 대표되는 헛된 희망을 버리고 거기에 우주정거장을 지어야 한다는 아틀라스와, 그럼에도 집길 수 있는 것은 지켜 나가야 한다는 윈터의 갈등은 두 사람이 부녀지간이라는 점에서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대립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이미 늦었다고,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에 대항하는 젊은 세대의 목소리는 '멈춰 있을 순 없어'라는 넘버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넘버는 거대한 흐름에 맞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한 명씩 목소리를 보태며 완성되는 곡이다. 갈등의 해결로 나아가는 이 곡이 어린이들에게는 즐겁겠지만, 어른의 입장에서는 어쩐지 뭉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이야기 속에서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고, 그 결과 이들이 작은 기적을 마주하기 때문일까.
젊은 세대, 어린 세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이들을 긍정하는 것은 작품 내부에서만이 아니다. 공연 외적인 부분에서도 어린이 친화적인 부분이 눈에 띄었다. 공연장에 입장하기 전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는 어린이 관객에게 한결같이 친절하게 응대하던 스태프들, 입장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관객을 위해 마련되어 있던 대기석 등이 기억에 남는다. 막간을 이용한 선물 증정 이벤트 시간에도 신이 난 어린이 관객의 목소리를 잔뜩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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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에게는 색다른 경험이, 출연진과 스태프에게는 큰 도전이었을 이번 공연은 아이스쇼라는 장르의 확장 가능성과 새로운 진화를 상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단순히 도전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대 위와 아래 모두에서 내실 있는 공연을 위해 노력한 G-SHOW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진다.
[김소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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