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을 다 봤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제목에 끌려 속이 뻥 뚫리는 통쾌한 복수극을 기대하며 재생했건만, 이처럼 먹먹한 복수가 어디 있으랴. 뒤이어 시청한 <올드보이>와 <친절한 금자씨> 또한 그러하다. 복수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 그가 말하고 싶었던 복수는 대체 뭘까.
복수(復讎), 해를 입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해를 돌려주는 행위를 말한다. 이 간단해보이는 단어의 정의에는 수많은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해를 돌려주는' 행위라. 100만큼 받은 피해를 딱 100만큼 돌려줄 수 있을까. 만약 101만큼 돌려줬다면, 그건 복수가 아니라 가해가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아니, 애초에 피해는 정량화할 수 없지 않은가. 그것보다도 더 전에, 과연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지 구분할 수는 있는 것인가...........
<복수는 나의 것>을 보고 나면, 끝까지 중얼거리는 동진의 '복수는..나의 것..' 대사가 자꾸만 머릿속에 맴돈다. 결국 복수는 누구의 것이었을까. 류는 죽은 누나를 위해, 동진은 죽은 딸을 위해. 자신만의 복수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몸부림친다. 결국 류는 장기 매매범을 모두 잔인하게 죽이고, 동진도 신하균을 딸과 똑같은 장소에서 죽이는 데에 성공한다. 그럼 그들은 모두 복수를 성공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는 대답이 입에서 떨어지질 않는 이유는, 너무도 자기 파괴적인 복수의 결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영미를 죽인 동진에게 보복하기 위해 찾아온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을 보면, 그리고 칼에 찔려서 중얼거리는 동진을 보면, 어느새 복수는 잊어버린 채 그저 안타까운 마음만 솟구쳐 오른다.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또 그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른다. 끊어질 수 없는 이 복수의 고리를 지켜보는 우리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별해내지 못하고 결국 그것만이 진리임을 깨닫는다.
<복수는 나의 것>의 복수가 눈앞에 있는 것이었다면, <올드보이>의 복수는 머리 위에 있는 것이랄까. 15년 감금에 비해서는 다소 가벼워 보이는 오대수의 죄명에 대해, 이우진은 '모래알이든 바윗덩어리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고통은 그 크기를 감히 측정할 수 없다. 모래알과 바윗덩어리가 아니라 모래알과 모래알이더라도 말이다. 이수아의 존재 자체를 까먹고 있었던 오대수에 비해, 이우진은 지난 15년간 그 멈춘 시간 속에서 살아왔다. 오직 오대수를 향한 복수만을 바라보며, 자신의 모든 삶을 불타는 복수심을 위한 장작으로 썼다.
복수심은 건강에 좋다!
하지만, 복수가 다 이뤄지고 나면 어떨까?
아마 숨어있던 고통이 다시 찾아올걸?
이우진은 진실을 모두 깨닫고 오열하는 오대수를 본다. 미도만을 지키기 위해 개처럼 짖고 기어다니는 오대수를 본다. 결국 더 이상 타오르지 못하는 복수심 옆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장작은. 그 존재의 의미를 잃었다. 끝까지 오대수를 죽이지 않은 이우진은 스스로 권총으로 목숨을 끊으며 복수를 완성한다. 과연 그의 복수는 오대수를 향한 것이었까. 어쩌면 누나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복수의 탈을 쓴 건 아닐까. 15년간 감금당한 것은 이우진 본인일지도 모른다.
<친절한 금자씨>의 복수는 좀 더 경쾌하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백선생에게 아이를 살해당한 학부모를 모두 모아 함께 복수를 행한다. 복수하기 위해 우비를 입고 복도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장면. 그리고 복수를 끝낸 뒤 빵집에서 함께 케이크를 나눠 먹는 장면은 꽤나 기이하다. 기이함을 느끼는 스스로도 기이하다. 단지 집단이 복수를 행하는 주체가 되었을 뿐인데, 그 구도 자체에서 오는 폭력성이 너무나 단순해서 낯설게 느껴진달까.
그들은 그 날 잘 잤을까. 케이크는 맛있었을까. 하는 편치 못한 궁금증이 들 때쯤, 금자가 어린 원모의 환영을 만난다. 사죄하려고 다가가는 금자에게 원모는 재갈을 물리고선,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마치... 이렇게 하면 내가 널 용서할거라 생각했어?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 사실 그렇다. 애당초 금자가 한 복수는 원모를 위한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복수는 숙제 따위 같은 게 아니라 대신 해줄 수 없지 않은가.
원모의 환영은 결국 류의 누나, 동진의 딸, 그리고 우진의 누나. 그 모든 사람의 환영이 아니었을까. 사실상 그들의 복수는 모두 방향을 잃고, 그저 끊임없이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에 그칠 뿐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금자가 자신이 만든 새하얀 두부 케이크에 얼굴을 처박고, 마중 나온 제니에게 포옹을 받는 마지막 장면은. <올드보이>의 오대수와 그의 딸 미도가 겹쳐 보인다.
그들의 숨 막힐 듯한 증오나, 끓어오르는 복수심 그 자체만으로는 파멸적인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새하얀 눈이 내리는 날의 포옹. 본인을 용서해 줄 수 있는 나 자신, 그리고 그런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누군가. 그것만이 그들의 해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