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겨울을 나는 자세

정말 싫은 계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던 이유
글 입력 2023.12.31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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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 서문.png

 

 

누군가 겨울이 싫은 이유에 대해 물었을 때,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만큼 겨울을 싫어한다. 어렸을 땐 이 정도로 추위에 떨지 않았던 거 같은데, 성인이 된 지금은 이너웨어를 여러 겹 껴입어야만 외출이 가능할 정도다. 추위를 많이 타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에 다닐 무렵. 스타킹 착용을 너무나도 귀찮아 하던 내가 추위 때문에 자의적으로 스타킹을 조금씩 챙겨 입기 시작했다. 이유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갑작스레 수족냉증이 생기면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물론 귀찮아서 안 신고 다닌 날이 더 많았지만, 그때부터 교복 안에 뭐든 잘 껴입꺼나 두꺼운 겉옷을 챙겨 입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더위에 강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더위도 잘 타고 땀도 꽤나 흘린다. 단지 여름에도 린넨 소재의 긴팔 셔츠 입기를 좋아할 뿐. 이런 것들을 미루어 보아, 그나마 추위보다는 더위에 대한 역치가 조금 더 높지 않나 짐작할 따름이다. 이것도 아니면 여름에 태어나서 상대적으로 여름이 더 좋은걸까 하는 헛소리도 더해본다.

 

말을 꺼낸 김에 겨울이 싫은 이유를 늘어 놓아 보기로 한다. 우선 너무 춥다. 그래서 옷을 겹겹이 껴입어야만 한다. 그러면 몸의 감각이 둔해지는 것을 물론이거니와, 아무리 껴입어도 움츠러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해가 짧아지는 건 또 어떤가. 하루 일과를 마친 후, 문을 열고 나와 마주하는 장면은 어두컴컴한 세상. 혹자에겐 “잘 살았다!”라는 느낌을 줄 수 있는 풍경이지만, 나에겐 좀 다르다. 괜히 어이없는 기분이 든다. 일어나서 한 건 출근과 퇴근, 그것 뿐인데 이렇게 하루가 다 갔다니 하는 허망함이 밀려든다. 또 자주 기분이 날씨에 좌지우지되는 편이기에, 우울한 감정을 드는가 싶기도 하다. 쨍쨍한 날보다는 상대적으로 스산한 날일 때가 더 많으니까.

 

텅 빈 나뭇가지, 썰렁한 거리, 퍼런 공기에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움직임과 꽁꽁 싸맨 사람들. 여름에 비하면 생기 없는 편이고, 그것이 주는 적막함과 묘한 단절감이 느껴지는 풍경. 그런 것들을 보고 있자면 괜시리 마음이 시렸다. 그리고 이건 아주 오래된 나의 감상이다.

 

 

폭설.png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눈도 내겐 달갑지 않은 존재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쓰레기라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감수성이 좋은 편 치고는 조금 예외인 문장인가? 삶에서 눈이 성가시는 존재가 된 것은 2년 전 첫 직장을 들어가면서부터다. 당시 사회복지사로 근무하던 중이었기에, 비나 눈은 걱정이라는 짐을 더 지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취약계층에게 날씨는 일상에서 훨씬 큰 변수가 되기 때문이다. 담당자로서 그들의 안녕을 위해 일을 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일기예보에서 눈이 많이 온다는 소식이 들릴 때면, 설렘보다 불안함부터 느끼기 일쑤였다. 식사나 생필품을 가져다 드리는 일정이 자주 있다보니, 일에 훼방을 놓는 존재로 느낄 수밖에. 퇴사를 한 지 한참 지난 지금에도 이 생각과 감정은 쉽게 변하질 않는다. 어쩌면, 원래 겨울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던 터라 그럴 수도 있겠다.

 

*

 

아무튼 이러한 연유로, 연말 또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겨울철에 찬 바람을 맞아 코 끝이 시려운 것만큼, 마음이 공허감으로 가득 차서 아리기에.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겨울철이면 멜랑콜리한 감정이 깊어진다. 찾아보니, 계절성 우울증이라는 증상이 실제로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연말만 되면 마음이 울렁거리고 힘에 부쳤나 보다. 해가 짧아지고 찬 바람이 부는데 왜 마음도 같이 삭막해지는 걸까. 늘 뜨고 지는 해처럼 사실 별다를 것 없는 겨울일 뿐인데, 어째서 사람들은 12월이라는 달을 한 해의 끝으로 정해두고 '연말'을 기념하게 되었을까 갑자기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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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다행인 건, 이번 연말은 조금 덜 춥다는 점이다. 아, 날씨가 아니라 마음 말이다. 이럴 때면 괜히 연말인 게 반갑고 또 감사하다. 연말을 싫어하는 내가 연말이 좋은 이유는 딱 한 가지. 연말을 핑계 삼아 가슴에 담아 두었던 말과 따뜻한 마음을 건네도 이상하지 않으며, 그 모든 행동들이 어색하거나 이상하지 않은 마법같은 시기라는 것이다.

 

올 연말이 이토록 따뜻할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현재 근무 중인 카페 덕이다. 작년 가을, 운이 좋게도 애정하는 카페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커피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입 아픈 소리니까,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작년 가을, 좋아하는 공간에서 우연히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가게의 단골 손님 중 한 명이었다. 지난 여름이 첫 방문이었으니, 2개월 동안 꾸준히 방문한 것이다. 그 기간동안 퇴근 후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굳이 먼 길을 택하기도 하고 주말 약속을 잡을 때에도 만남의 장소로 우선 고려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커피에 진심인 내가, 처음으로 커피보다도 공간에 서려있는 얘기들과 사람들이 좋아서 오기 시작했던 곳이라는 것. 그런 곳에서 멋진 사람들과 사랑하는 일을 할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그렇지만 시작할 당시, 겁이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다. 혹여나 일을 그르칠까 하는 부담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담감은 다른 말로 마음의 짐이고, 그런 생각은 자연스럽지 못한 태도로 발현된다. 그리고 그것은 공간을 지키고 있는 사람으로서 적절치 못한 태도다. 좋은 기운을 전해줄 수 없으니 말이다. 고민 끝에 내린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주특기인 “솔직함”을 무기로 앞세워 주접과 담백 사이를 오가며 응대에 진심을 다해보자는 것. 나는 너무나 투명한 사람이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조금씩 상황이 나아졌다. 일이 점점 즐겁게 느껴졌을 뿐만 아니라, 자존감이 회복되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좋아하는 업무이기도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정말로 신이 났고 쓸모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 때문에 아파했던 시절이 많았고, 사람이 힘들어서 퇴사를 했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 이 모순. 결국 나는 가게에서 일을 하며 사람과 사람을 잇는 것을 숙명으로 여기기로 마음 먹었다.

 

숙명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에 잠시 놀란다. 내가 이런 단어를 쓰게 되다니. 참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마음의 짐을 덜기로 하지 않았나? 우습게도, 올해 들어 어떤 지점에서 중요성을 느꼈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책임감이다. 책임감은 신뢰를 낳고, 자기 효능감을 증진시킨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참으로 좋은 것이 아닐 수 없다. 갑자기 어떤 연예인이 이야기 했던 문장이 생각난다. “힘든 게 좋은 거다!” 그래, 힘든 게 좋은 거지. 요행을 바라지 않고 묵묵히 주어진 길을 따라 걷는 것. 그것이 어쩌면 책임감의 시작이지 않을까?

 

‘힘든 것’은 당시엔 고통과 고뇌에 빠지게 하지만, 인고의 시간이 끝나면 뭐든 남는다. 뭐 이건 인고의 시간이 아니더라도, 어떠한 사건이나 시간을 지나왔을 때 당연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게 임무나 의무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관계를 맺고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뒤돌아 봤을 때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자국이 나있기 마련이다.

 

 

동료에게 받은 선물.png

 

 

생각해 보면,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나의 어떤 점이 믿음직스러워서 제안을 했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나는 6년의 카페 경력을 가진 고급 인력이지만 말이다. 내가 다녀간 2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나도 모르는 어떤 점을 보았던 걸까. 비슷한 결이라는 이유만으로, 한솥밥을 먹으며 즐거운 꿍꿍이를 벌이고 일상을 유영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그들에게 늘 감사함을 느낀다.

 

 

국화꽃을 든 ‘고수’.png

 

 

일을 하면서 만난 손님들과 동료들은 또 얼마나 좋은지. 올 하반기는 일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개인적인 만남의 빈도수가 적었다. 그렇다 보니, 일에서 만난 관계들이 유난히 소중했다. 근무 중에 도란도란 스몰 토크를 나누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거나 마음을 보듬어 주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고수‘가 받은 책 선물.png

 

 

특히나 오랜 시간 얼굴을 본 손님들의 경우 잠시 힘에 부치던 시절 꽃이나 책 등을 선물 해주셨는데, 카페를 지키고 있는 직원에게 전하는 것이 아닌 한 개인에게 보내는 응원이라는 기분이 들어 얼마나 감사하고 감동 받았는지 모른다. 살면서 이런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크게 와닿았나 보다.

 

*


<겨울을 나는 자세>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였지만, 여전히 이 계절은 쉽지 않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수족냉증에 힘들어 하고, 강추위에 덜덜 떨며 하는 출퇴근 그리고 연약한 호흡기를 지켜내겠다고 목에 좋은 것들을 마시고 두르며 안간힘을 쓴다. 동심을 잃어버린 어른이 되어버린 탓에, 눈이 와도 별로 즐겁지 않은 현실에 살고 있다.

 

그래도 어쩌겠나. 시간은 잘도 흐른다. 모두에게 공평히 주어진 시간, 나라고 똑딱이는 시계를 멈출 수는 없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으로 마음의 혹한기를 잘 견뎌낼 수 있도록,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따뜻하게 보내며 하루하루 성실히 삶을 꾸려가는 것뿐이다.

 

겨울, 그리고 연말이라는 이유로 올 한 해를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그랬더니 올 해 내 삶은 온통 일로 가득한 한 해였다. 그것이 설령 돈이 되지 않을 지라도, 일 복 하나는 터졌던 시간이었다. 일을 빼놓고는 한 해 동안의 이야기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갖다 바친 시간의 양이 절대적으로 많은 한 해였다. 걱정 반 설렘 반으로 퇴사를 하고 새로운 시작을 했던 작년 연말, 미리 올해의 키워드를 “정리”로 정했던 때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띄지만 어쨌든 재밌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도 원했던 “덕업일치”의 삶인가 하면,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현재 카페 업무 외의 일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삶이 마냥 싫지는 않다. 왜냐면 그 일에서도 좋은 동료들을 만나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고, 일에서 보람을 느낄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이정도면 나쁘지 않은 삶이라는 생각에 굳이 덕업일치 하지 않더라도 뿌듯하고, 이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마감기한이 없는 숙제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고. 마감기한이라는 네 글자만큼 시원섭섭하면서도 스트레스를 주는 모순적인 단어도 없다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된다. 그렇지만 웃음과는 별개로 마감을 생각하면 왜인지 손발이 저려오고, 그다지 좋지 않은 두근거림이 찾아드는 것은 여전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날만을 위해 달려가는 것 같다. 끝이 없으면 괜히 찝찝한 느낌이다. 찝찝한 것보다 그래도 어떻게든 끝맺음을 하는 편이 좋다.

 

책을 예로 들어보자. 어떤 소설의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해당 쪽을 넘기기 위해, 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읽어야 한다. 읽지 않아도 그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는 있지만, 필연적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돌아간다는 것은 책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인생에는 esc가 없다. 

 

잠시 ‘마감이 없었다면-’하고 생각해 본다. 어떤 의미에서 마감은 고통스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자면 긍정적인 스트레스 요인이기도 하다. 마감을 향해 달려갈 때 나오는 도파민, 그리고 해냈을 때의 성취감, 그것으로부터 높아지는 자기 효능감.

 

어쩌면 우리가 연말을 정해둔 이유도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삶에서 확실한 기준을 갖고 한 해를 짜임새있게 살아가기 위해, 보이지 않는 것을 수치화하고 약속을 정해두는 삶. 끝이 없는 이야기의 결말을 보다 멋진 방식으로 완성하기 위해 사는 것. 

 

어쩌면 나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온기와 동시에 반짝이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눈 결정처럼 반짝이는 마음만큼 갖기 힘들고 힘을 주는 것은 없으니까. 삶이라는 긴 여행에서 각자의 세상을 탐험 중인 우리. 탐험의 시작에서 다짐했던 마음을 다시 떠올린다. 덧없이 반짝이기만 했던 그 마음 말이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언제나 반짝일 수는 없는 법. 그러자 ‘차라리 늘 연말같은 마음으로 지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머릴 스친다. 연말을 앞둔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사는 것은 어쩌면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고 사는 것과 닮아있다. 유한한 삶의 끝자락에서 되려 희망을 찾는 사람처럼, 연말을 목전에 두고 살기로 다짐한다. 연말이 끝나면, 곧 새순이 돋아나는 그 때가 올 테니까.

 

겨울을 떠올리면 연말이 연상되는 건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면 그 둘은 너무 닮다 못해 동일시 되기 때문이다. 기간으로 따져 보았을 때 같다는 공통점과 함께 생명력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같다. 그리고 그 생명력에는 사람이 자리하는 비중이 크고, 그들이 전해주는 따뜻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낀 한 해. 역시 사람이 사람을 치유한다! 이 추운 계절을 건널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있어서임을.

 

이렇게 또 다시 한 해의 끝에 서있다. 마지막이라는 건 살갗으로, 코끝으로, 그리고 또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말로 느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유난히 쏜살같이 지나가버린 2023년. 마지막까지 정성스럽게 나를, 그리고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를 대하며 아름답게 삶을 가꾸어 나가는 사람이 되기를. 당신 역시 그러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강윤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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