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타인의 언어

글 입력 2023.11.23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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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msa amida, Pia :)

 

완전히 틀린 철자였지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피아 씨. 메일함에 형식적으로 넘치는 Thanks, appreciate 등의 표현이 아닌, 감사합니다, 우리말이었다. 당신은 러시아 사람이잖아요.


외국어에 관심이 많다고 자부하는 나였지만, 러시아의 ‘감사합니다’를 영어로 쓰려니 철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큰 보답을 바라고 남긴 인사말은 아니었을 테지만 괜히 혼자 아쉽고 머리가 띵했다. 급하게 구글 번역기를 돌리려다 이내 멈추곤 파트너의 메시지에 좋아요를 눌렀다. 상대의 모국어로 대답해 주는 파트너라니. 입사할 때까지만 해도 소통에 자신 있다며 당당하게 말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나는 상대의 예의와 과분한 친절에 센스 있게 받아치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고 있었다.

 

협력업체면 당연히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업무적 관계는 명확해야 하므로 너무 편하게 웃으며 지내지 말라고 배웠다. 하지만 과하게 거리 두지는 말고, 눈도장도 자주 찍고. 하긴, 사이 좋은 거랑 적당히 거리를 두는 거랑은 또 다르니까. 크게 어렵진 않으리라 생각했고, 이는 오산이었다. ‘격무에 노고 많으십니다’와 같은 딱딱한 언어를 쓰면서 어떻게 사람 좋아 보이게 행동하라는 것인가.


내가 속한 업계의 문법은 결코 부드럽지 않다. ‘다나까’를 쓰면서 친절하게 굴기. 상대에게 ‘Hello’와 ‘Hi’는 쓰지 않고, 자잘한 질문에는 굳이 답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러다 무언가 잘못되면 모든 게 내 책임이 되는 그런 위치에서의 일. 그런 세상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할지 갈피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와중에 마주친 인사였다. 함사 아미다. 아, 이 세계의 문법을 곧이곧대로 따를 필요는 없겠구나. 이 사람도 분명 우리더러 비협조적인 사람들이라고 칭하는 세계에 속해있을 텐데. 그래도 기어코 이렇게 친절하고 밝게 웃으며 대화하기를 선택했구나.


내가 주로 연락을 주고받는 파트너들은 전부 해외에 있다. 얼굴 한번 직접 본 적 없고, 익숙한 국가가 아니면 이름만 보아선 성별도 알 수 없어서 사진을 보아야 한다. Mr. 와 Ms./Mrs. 는 구분 해야 하므로. 우리는 호칭 구분부터 예의라고 배웠으니까. 하지만 이 사람들은 내 성별을 신경 쓰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경 쓰지 않는 게 아니라 틀에 박힌 탓에 차마 궁금해할 여력도 없는 게다. 이 업계에 여자는 극히 적기 때문에.

 

프로필에 사진을 걸어놓으면 자연히 해결될 일이긴 하지만 굳이 설정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언젠가 대면하게 되면 한 방 먹은 기분이겠지, 싶어서. 이런 내 속내도 조금은 웃기다. ‘쓸데없는 곳에 이상한 에너지 소모하기’는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든 간에 꼭 해내고 마는 짓 같다.


상대가 미스터인지 미스인지 미세스인지 신경도 쓰지 않고, 어느 게 이름인지 성인지조차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바다 건너에 참 많다. 자국의 예의를 그대로 우리한테 차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AI처럼 매일 쓰는 형식적인 문장만 무미건조하게 보내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나는 자주 ‘미스터 리’가 되곤 한다(박지윤의 ‘미스터 리’를 흥얼거린 적이 꽤 있다..). 가끔은 수신인에 전임자의 이름이 그대로 적혀있기도 한다. 메일은 제가 보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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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나는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냥 누가 이 메일 뒤에 있든 간에 일만 해결되면 괜찮은 거구나. 나는 협력업체 담당자가 바뀌면 연락처도 다 수정하는데. 너네는 나한테 관심이 없구나.

 

무럭무럭 자라면 권태감이 될 수 있는 이 무력감 아닌 염증이 피어나기 시작하던 순간 우리말로 된 감사 인사를 받은 거다. 머리가 띵. 딱 그 두 마디는 억지로 두르고 있던 가면을 벗겨버렸고, 무장해제 되어버린 기분과 동시에 왠지 모르게 속이 시원해졌다. 그래, 꼭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않아도 될 수 있다고요.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말로 인사를 건네는 파트너라니, 이만큼 진귀할 수도 없다. 고맙다는 말 앞에는 ‘Thanks for your understanding and cooperation!’이라는 말도 붙어있었다. 매일 내가 하던 말이자,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던 말.


남에게 특정한 대우나 답변을 바라고 건넨 인사말은 아니었다. 그냥, 정말 답장을 빨리 줘서 고맙고 세세하게 답해줘서 고맙다고. 다 바쁜 사람들일 텐데, 그래도 시간 내서 구구절절 설명해 준 게 고맙다고. 그래서 건넨 말들이었다. 받을 생각 없이 남겼던 인사들이라 별생각 없었는데, 막상 그 인사를 내가 받고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걸 되찾은 기분이랄까. 아, 이 사람에겐 내가 대충 업무 연락만 주고받는 아무개가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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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 사이에 피어난 꽃이라던가 지나가다 발견한 낮잠 자는 고양이 또는 말장난을 치는 간판 터무니없는 농담 등에도 쉽게 삶이 어여쁘고 재밌다고 느끼는 나인데, 요즘 들어 갤러리에 쌓이는 사진도 적고 새로 접하는 재미와 유쾌함이 줄어들어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던 터였다. ‘내’가 기계적으로 변색되어 가는 느낌. 나만의 색으로 주변을 물들일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주변의 색에 물드는 사람이 된 듯한 기분. 썩 좋은 감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를 벗어날 노력도 하지 않았다. 언젠간 또 환기되겠지, 하며.


그러던 중 ‘함사 아미다’가 일순간에 나를 깨워준 거다. 말라가던 수채화용 물감에 물을 한 방울 떨어뜨린 느낌. 덕분에 내 물감은 다시 색칠될 기회를 얻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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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속해있는지, 집단과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다만 그 요소가 내게 어떤 영향을 얼마나 미치는지 홀로 깨닫기는 쉽지 않고, 스스로 변화가 생겼음을 의식해도 손을 쓰기 쉽지 않기도 하고. 매번 같은 인사, 무난한 인사가 아니라 적당히 따뜻한 인사를 건네고 싶은 나지만 최근엔 문장을 모으지도 않았다. 새로운 문장을 읽지도 않고, 새로운 노래를 듣지도 않고, 새로운 활동에 도전하지도 않고. 그렇게 잠시간의 몇 달. 올해의 끝을 무너진 채 보낼 뻔했다.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내 스케치북을 다시 칠할 수 있어서. 다시 나를 키울 수 있어서.

 

여태껏 스친 사람들만 해도 관계 혹은 사회생활에 통달할 수 있지 않을까 알쏭달쏭했는데, 날이 갈수록 이 세상 이 사회엔 배울 게 여즉 많다고, 내 생각은 여전히 어리석고 우물 안 개구리라고 직접 가르쳐주는 것만 같다. 이런 군상도 있어, 보여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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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고 이렇게 깨달음이 반복될지 알 수 없지만, 사회초년생에겐 너무도 복잡하고 어렵고 재미있는 세상이다.

 

수십일씩 바다를 건너며 한 꺼풀씩 쉬이 벗겨지지 않는 밤도, 쉽게 닫히지 않는 낮도 있을 테지만 기어이 해맑고 친절하기를 선택한 내 파트너를 나는 아마 이 일을 하는 동안 내내 잊지 못하겠지. 또 권태와 같은 위기가 닥친다면 그때도 ‘함사 아미다’를 되뇌어봐야겠다.

 

그래도 별 감흥이 없다면 큰일이 난 터인데, 그런 날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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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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