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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봉평에 메밀꽃 보러 가자. 별도 보고.


온 도시를 마비시킨 더위가 채 끝나지 않았건만 메밀꽃이 일었다. 쏘듯이 내리쬐는 햇볕 아래 졸졸거리는 냇가를 건너 당나귀 놀이기구와 볏짚으로 만든 미끄럼틀을 지나면 흰 천막들이 펼쳐져 있었다. 위쪽으로는 이효석문학관과 막국수 식당들이 늘어서 있었고, 아래쪽으로는 시장이었다. 그리고 사방에는 메밀꽃이 한가득. 바람이 불면 울렁울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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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려 놓은 전시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 <메밀꽃 필 무렵> 中

 

 

소설과 타자 연습에서 유독 자주 보던 봉평장이었다. 평범한 시장과 다를 것 없을 줄로 예상하긴 했지만, 실로 그 이름이 가졌던 낭만적인 분위기는 없었다. 기대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매대 위 메밀면의 비중이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걸 제외하면 특이한 물건도 없었다. 갈아도 되지 않는다는 칼이나 절대 고장 나지 않는 가위, 옻칠한 수저는 어느 장에서든 쉽사리 찾을 수 있다. 역시 어느 동네든 사람 사는 건 똑같구나, 했다.


토요일 밤에 무작정 떠난 여행이었다. 샌드위치 2개를 만들고 샷 추가 아메리카노를 산 뒤 서울을 유유히 벗어났다. 사실은 천천히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차가 막혔지만. 서울은 언제나 차가 많아 들어오고 나가는 데에 한세월이지만 그저 신난 짝꿍과 나를 막을 수 있는 건 없었다. 우리는 여느 때와 같이 ‘그때 그 시절’ 노래를 틀곤 볼륨을 높이며 고속도로에 올랐다. 흥이 더 오르기 시작했다. 토요일 밤의 목적지는 강릉이었다.

  

메밀꽃을 보기 전에 별을 먼저 봤다. 안반데기까지 올라가는 길은 안개가 짙었다. 공기도 서울에 비해 차가웠다. 반소매와 반바지 차림이었던 우리는 맥주를 사러 편의점에 들렀다가 쌀쌀한 공기에 놀라 웃었다. 올림픽 때 숙소로 썼다는 아파트를 지나 구불구불 산을 올랐다. 좁은 산길임에도 과속하는 차도 있었다. 구시렁구시렁하며 오른쪽으로 꺾고, 왼쪽으로 꺾고, 오른쪽으로 또 꺾고, 갓길에 놓인 도로 공사 자재를 보고 차가 뒤집힌 줄 알고 놀라고, 잠깐을 또 달리다 또 꺾고. 가로등도 없는데 안개도 짙었고 맞은편에선 차가 자꾸만 내려왔다. 길을 잘못 든 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갈수록 안개가 옅어졌다. 그리고 도착한 꼭대기에는 풍력발전기 여러 대가 느리지 않은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고 그 아래는 수십 대의 차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별이 반짝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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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 빛깔이 반짝거렸다. 조명 하나 없는데도 산골이 밝았다. 카메라를 아예 세워놓고 하늘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 의자를 펼치고 무릎 담요를 덮은 채 하늘만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고, 양치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인증 사진을 남기겠다며 자세를 잡는 사람들도 있었다. 짝꿍은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냐며 신기해했다. 알알이 박힌 별을 보고 있자니 천문학자들의 자살률이 높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몇 년이나 멀리 있는 별들일지 상상하다 삐삐거리는 차량 경고음에 뒤를 돌았다. 5톤 트럭이 수많은 차 사이에서 후진하고 있었다. 배추 트럭이었다.


차박지로 유명한 주차장에는 사람이 많았지만 주차장 주변에도 사람이 많았다. 사방으로 전부 배추밭이었던 탓이다. 주차장 바로 옆에 서 있는 풍력발전기 아래에도 배추가 한가득 심겨 있었다. 고랭지 배추는 내 상체만큼 크다는 걸 그때 알았다. 하늘에는 별이 반짝였고 주차장 위쪽에서는 배추밭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헤드라이트가 반짝거렸다. 처음엔 플래시를 켜고 사진 찍으려 애쓰는 사람들인 줄 알았다. 우리 이후에 도착한 사람들도 지나가며 꼭 한마디씩 했다. 어머, 저기서도 사진을 찍나 봐. 저기까지 올라갈 수 있나. 아, 배추 캐고 있는 거네. 새벽에 파나 보다, 이거 전부. 5톤 트럭 기사님들은 한 손으로도 그 비좁은 산길을 운전하고 미어터진 주차장을 유려하게 빠져나갔다. 길고 큰 차를 그렇게 쉽게 운전하다니, ‘간지 작살’이라며 우리는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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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 이쁘지만 멀리서 움직이는 헤드라이트에 눈길이 자꾸 갔다. 일하시는 분들께는 다소 죄송하지만, 살짝씩 보이는 실루엣이 마치 작은 캐릭터들이 움직이는 것 같아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놀러 온 사람들을 보며 일하는 기분이란 얼마나 짜증이 날까 싶다가도 반짝반짝한 언덕이 일터라니 썩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했다. 별도 보고 배추밭도 보고 짝꿍도 보고 떠들다 보니 추워져서 세워둔 차로 돌아갔다. 분명 서울은 아직도 열대야인데.


에어 매트리스를 힘겹게 펴고 잘 준비를 했다. 차박용품을 새로 산 초보는 꼭 집에서 연습을 해봐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우리는, 더 떠들 체력도 없어서 조금 도란거리다가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사둔 맥주는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랭지가 맞는지 아침에는 공기가 더 차가웠고 바깥은 여전히 배추 트럭들이 오갔다. 먼저 일어난 짝꿍은 이미 여기저기 돌아다녔다며 나더러 얼른 일어나라고 재촉해댔다. 힘겹게 일어나 창  밖을 보니 어제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 펼쳐졌다. 입이 절로 벌리는 풍경에 후다닥 옷을 갈아입고 차 밖으로 나섰다. 해도 바람도 좋은 오전이었다. 사람들은 일찍부터 내려갔는지 짝꿍과 나, 아침에 올라온 듯한 사진 동호회 사람들만 남아있었다. 어르신들의 카메라는 대포 같았다. 하긴,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는 고랭지뷰였다. 배추밭 주위를 산책하다 배가 고파오자 슬슬 차로 돌아갔다. 우리는 언덕을 내려와 가건물에 차려진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사 들고 강릉을 떠났다. 날이 다시 더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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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의 봉평행 목표엔 메밀꽃 구경도 있지만 메밀국수 맛보기도 있었다.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메밀묵무침 한 접시를 뚝딱 해치웠다. 순식간에 열이 오른 공기가 ‘등줄기를 훅훅 볶’았지만 정말 맛이 좋았다. 무침 요리로도 이렇게나 배부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날이었다.


배가 찼으니 이제 걷자며 움직였는데 정말이지 눈앞이 핑그르르하는 게 현기증 때문인지 아지랑이 때문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더웠다. 흐르는 땀은 어쩔 도리도 없이 죽죽 났다. 대낮엔 더우니 실내에 있자며 우리는 문학관으로 발을 옮겼다. 오래 된 건물임에도 냉방이 잘 되는 편이었다. 역시 사람은 머리를 써야 한다. 빵빵한 에어컨 아래에서 이효석이 쓴 문장들과 그의 생애를 읽었다. 이효석 작품에 아동용과 성인용이 있다는 것도 그날 처음 알았다. 흥미롭게 읽고 있는 나를 두고 짝꿍은 시원한 메밀차를 마시겠다며 옆을 떠났다. 내가 창피하냐며 쫓아가 메밀차를 뺏어 마셨다. 고소하고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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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중천에서 조금 기울었을 즈음 국숫집으로 향했다. 100% 메밀면으로 만들었다는 국수는 시중 메밀면에 비해 뚝뚝 잘 끊겼다. 배추전까지 알차게 먹은 우리는 또 빵빵해진 배를 들고 메밀밭으로 향했다. 뱀과 벌이 많으니 조심하라는 표지가 여기저기 세워져 있었다. ‘뱀과 벌이 없는 달은 노뱀벌’ 따위의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며 쫄래쫄래 꽃 사이로 난 길을 걸었다. 반바지를 입었는데 벌이 많아 조금 무서웠다. 지나다니는 당나귀 안장에 달린 작은 종이 울리며 나는 소리가 사찰에서 듣던 풍경 風磬 소리와 닮아있어 마음이 편했다.


흰 당나귀가 메밀밭에서 혼자 놀고 있어 한참을 구경했다. 짝꿍은 당나귀를 만져보겠다며 당차게 앞으로 나아갔지만 꽃밭 한가운데에서 길이 끊겨 이내 다시 돌아왔다. 잔잔한 종소리 뒤로 메밀 축제 장기 자랑 무대에서 누군가가 소찬휘의 ‘tears’를 부르는 게 들려왔다. 시원하게 고음을 내지르자 사람들의 함성이 이어졌다. 메밀꽃이 만개하면 열리는 축제라니. 어릴 적 매일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명절 당일이 지나면 더없이 서운해졌던 마음이 떠올랐다. 메밀꽃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이 동네는 어떤 심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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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고 있었다. 당나귀가 이따금씩 울었다. 축제 때문에 묶여있는 게 스트레스 받았는지 우는 소리가 조금 길었다. 우리는 꽃밭 주변 카페에서 커피 두 잔을 사곤 차에 올라탔다. 지금쯤이면 차 좀 덜 막히겠지. 글쎄, 애매한 것도 같고. 우선 가보자. 메밀이 들어갔다는 커피에서는 별다른 맛이 나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삼삼한 도시였다. 연두색 줄기와 잎 사이로 보이는 작은 하얀 꽃들. 강하지 않은 간에 담백한 면. 채도 낮은 풍경. 유유자적 흐르는 구름 아래 고요한 숲.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맛들이었다. 지역 축제에서 빠지지 않고 판매하는 상품인 손수건마저도 패턴이 삼삼했다. 흰 바탕에 작은 꽃들 혹은 연한 색들로 배색된 무늬. 성질이 온순해지는 것만 같았다. 비록 낮에는 볕이 뜨거워 발도 같이 빨라졌지만, 급하게 굴 것이 하나 없는 곳이었다. 닦달할 것도 없이 평온하고 나긋한 상태로만 내내 있었던 듯하다.


항상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힘껏 즐기는 편인데, 날이 갈수록 의지와 무관하게 즐기지 못하는 것들이 늘어난다. 아직 맛보지 못한 특산물이 많은데 주말은 끝이 났다거나, 방학에 훌쩍 여행 온 것도 아니라 마냥 버스를 미루고 즐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또 언제 이곳을 다시 올 지는 모르겠어서 아쉬운, 혹은 무심코 들린 도시의 명물이 한겨울의 설산이라는데 당장은 5월밖에 되지 않았다던가, 그런 것들.


햇볕 아래 메밀꽃보다 달빛 아래 메밀꽃이 더 이쁘다고 한다. 해가 조금 졌다고 대낮보다 배로 이쁜 것을 본 이상 저 말에는 백번 동의할 수밖에 없지만 달빛이 휘영청 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른 저녁에는 출발해야 다음 날 무사히 출근할 수 있을 터이니. 짝꿍이랑 다음엔 밤까지 있자며 봉평을 떠났다. 다음에 못 올 이유는 없으니 그러자고 했다. 이런 식으로 쌓인 약속이 한둘이 아니라 한참 지나서야 지킬 수도 있겠지만. 다음을 기약한 우리의 장소가 늘었고, 또 얼마간을 살아갈 체력을 충전한 이틀이었다. 좋아하는 꽃도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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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 <메밀꽃 필 무렵>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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