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무애 無碍 7

의식하는 나와 나의 영혼에 대하여
글 입력 2023.01.15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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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 물론 자신에 대함이다. 한편, 앞서 '사람이 자기를 생각함에 있어 객관을 논하는 것 만큼 우스운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지. 앎이란 객관적 사실에 대함, 그래서 이것, '자신에 대한 앎'은 사실 엄밀하게 따지고 들자면 불가한 것이다. 나에 대한 이해는 스스로의 것도 타인의 것도 온전한 것이라 볼 수 없기에. 상당히 긴 글이 그 탄생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에 결론부터 매김하고 시작하자면, 자신에 대한 앎은 불가해한 것이었으며, 사실 그것에 대한 집착 내지는 사로잡힘이 내적 자유를 방해하는 첫 번째 요소였다고 적어본다. (…)

 

자기 비판이 적은 이일 수록 타인에게 더욱 너그럽고 정다울 소지가 있다고 여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내가 스스로 생각할 적에 타인에게 너그럽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그토록 나를 부정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 지난 에세이, 무애 5

 

 

그렇담 이러한 태도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무엇이 자기 이해와 자기 비판을 상호 투쟁의 대상으로 화하는가? 그 모든 것이 애초 주관의 하나라면, 나를 옹호하고자 하는 본능과 나를 부정하고자 하는 본능이 어디서 분화되어 어떻게 대립하게 되는지에 대해, 나는 알고자 한다. 최초엔 내 안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은 정다이 어깨동무하고 있었다. 소년의 시절, 모든 개념이란 주관의 관장 아래 정다이 한몸이 될 수 있었다. 


즉 나의 모든 생각이 스스로 옳게 느껴지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과 그에 대한 긍정으로 의식이 가득 차 있고 그러한 상태를 퍽 오래도록 머무르며, 안온히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따금 너와 나의 세계가 충돌하는 불상사가 있지 않고서야 나는 행복했다. 그렇지만 내가 너희를 필요로 하는 존재인 이상 언젠간 반드시, 그것은 필연처럼 깨어질 내면의 평화이다. 


자기 이해와 자기 비판이 투쟁하는 것, 고뇌란 얼마간 고통스러운 일, 어른의 일이다. 내 안의 어딘가로부터 떠오르는 이해가 바른 편 어딘가로부터 떠오르는 부정과 상충하는 일. 그 양쪽 편 모두가 나의 것이다. 재밌기도 하지. 그것은 이제 떠오르는 자신의 생각을 곧잘 믿지 못하는 것이고 의심하려는 마음이다. 자신의 생각을 일단 의심부터 하는 조심스러움이고 틀렸을까 걱정하는 일이다. 우리가 왜 그런 수고로운 일을 할까? 


우리가 대체 왜? 우리는 매우 주관적인 사람이 그러하듯, 또 아이가 그러했듯, 자신의 생각을 긍정하고 예찬하며, 세상을 자신이 바라보는 즉흥적인 관점 곧대로 살아갈 수는 없는가? 최초엔 나의 이해가 내 안 어딘가로부터 솟아오르곤 그것을 한 줌 의심도 없이, 철저히 긍정하지 않았나. 왜 그런 상태로 남아있을 수 없었던 것이지? 그 얼마나 훌륭했나. 어릴 적 세상은 내가 바라보는 바로 그 관점, 나의 이해, 오직 나만의 이해로, 바로 그러한 질서로 가지런히 정렬된 채 내 눈앞에 도열해 있었다. 내가 옳다 느끼면 옳은 것으로 믿어지고, 그르다 느끼면 철저히 그른 것이 된 채 믿어지는 세상. 그 원환적이고 즐겁기 그지없으면서도 우매한 세상. 온 세상과 그 앞에 서서 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주체인 나의 내면에는 '참의 예감'으로 가득했다. 그것은 믿어지는 세상.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 마치 '정말로 그러한 것' 앞에서 우리가 필연과 더불어 참과 진리의 느낌을 영광처럼 하사받듯이, 믿어짐이란 주어지는 것이다. 


누구로부터 선사 받은 지 모른 채로도, 그런 단단한 착각 내지는 믿음 속을 영원히 머물 수 있다면 그것도 얼마간 축복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내 혼자만의 축복으로나마 길이 남을 수 없는 것이란, 충분한 시간의 유량 앞 언젠가에는 필연히 깨어지는 까닭, 이제 와 생각할 제 우리가 고독하게 태어나지 못한 이유뿐이다. 홀로 있을 때 가장 마땅함을 느끼는 동물처럼, 그 동물은 거기서 완벽감에 말미암는 충만이 아닌 자연함을 느끼는데, 그 안에서 가장 건강한 심박을 느끼게끔 설계된 동물이 우리였다고 하자면, 하나로 이어진 채 무한히 순환하는 그 닫힌 세계는 어쩜 깨어질 줄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보라, 기억 속 우리의 유년은 장차 아플 줄도 다 모르고 타인이라는 미지를 향해 스스럼없는 손아귀를 뻗는다. 다가가서 묻거나, 못내 궁금해하며 그가 이리로 다가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하염 감추려고 하는 방식으로. 그것은 여태까지도 매한가지, 우리는 타인이 필요했고 그를 바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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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이를 향해 뻗어내는 그 자그마한 흰 손들을 기억한다. 생애 첫 친구는 동우라는 친구였다. 기억이 완전치는 않지만, 우리는 동그란 노란색 모자에 흰 셔츠와 멜빵, 그리고 노란색 바지를 입고 있었던가 그랬다. 그저 옆에 앉아 있었던 이유만으로 그는 작은 손을 뻗어 덥석, 내 소매를 걸머잡고서는 모쪼록 아이다운 이야기를 했던 일이 해체되기 직전의 상태로 기억 속에 되산다. 나는 그가 있어 그렇게 다행일 수 없었다. 지금에 희미하지만 그것은 마치 구원의 느낌이었는데, 예나 제나 나는 먼저 말 걸어주는 사람을 좋아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맞잡은 손만큼의 권역이 노오란 빛의 작은 원형을 만들면, 그 안엔 두려움과 외로움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그토록 따스한 안도감. 겁과 걱정이 많고 소심하며 낯을 가리는 나는 이렇듯 먼저 손 뻗어 나를 고독으로부터 구원하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그리곤 그가 곧 떠나버리진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한편, 동우는 우리로부터 우측 맞은 편에 앉아 있던 애진이라는 아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더랬다. 자기는 오늘 저 애랑 뽀뽀하고 말 거라고 얘기했다. 나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말하며, 그건 유감스러움이 아니라 순수한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이었는데, 동우를 붙잡아두려 하였으나 그는 씩씩하게 자리를 떴고 바른 편 또래 여아들, 희영이와 진아의 사이에 앉아 있는 애진이 자리로 가 어깨를 쿡 찔러넣고는 선 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넸다. 그런 동우를 나는 멀리서 물끄럼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우는 놀라운 속도로 그 애의 볼에다가 뽀뽀를 했다. 애진이는 놀라 울음을 터트렸다. 


유치원 첫 등원 때의 일이다. 어린아이들의 일이라고 굳이 어여삐 포장할 생각일랑 없다. 애진이에게 일어나버린 당황스러움은 보상받을 길이 묘연하나, 여하간 동우의 그 성급함은 장차 그에게 타인과 인간관계에 대한 뼈아픈 교훈으로 돌아오게 된다. 동우는 그때 이후로 줄곧 다른 이들의 놀림과 조롱, 심지어는 괴롭힘을 받기 일쑤였다. 촌 동네는 이따금 일어나는 전·입학이 아니고서야 유치원 입학 때의 또래 아이들을 초등학교 졸업까지의 장장 8년간 만나게 되어 있다. 애진이에게 기습적으로 뽀뽀를 감행한 일에 대해, 그때 또래 사내아이들이 진실로 정의감 비슷한 것을 느꼈을 리는 만무하나 여하간 그런 뉘앙스로 오래도록 동우를 핍박했다. 아무에게도 배운 바 없이 우리는 서로 충돌했다. 


우리는 충돌했다. 그것을 아이들은 처음에 알 수 없었다. 장차 자신에게 그토록 커다란 아픔을 안겨줄 줄도 다 모르고 처음에는 하이얀 손을 뻗어 서로를, 타인이라는 미지를 탐구하곤 했다. 아직 타인의 아픔을 학습하지 못한 아이들은 손을 뻗었고, 마치 운명처럼 고통을 겪는다. 관계의 기술, 내지는 각자만의 노하우를 가져보기 전의, 그 순수했던 시절을 기억하는가. 나는 기억한다. 그때로부터 아득히 멀어진 지금의 관점 아래로 그것은 선명하게 떠오른다. 지금 내가 가진바 타인에 대한 태도와 규율은 수없이 많은 인간들에게서 받은 고통으로부터 결정화한 것, 아마 여러분 각자도 마찬가지의 것을 지니고 있으리라 믿는다. 


아이들 하나하나는 자신만의 작은 우주를 감싸고 있는 미약한 동그라미이고, 인력의 작용처럼 알 수 없이 이끌리곤 충돌해 편입하거나 튕겨 나가기를 반복했다. 자신의 세계, 동그라미이자 우주, 곧 그의 주관이란 아이들의 수만큼이나 많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은 끊임없이 타인에게로 이끌리는 본능과 각자만의 고유한 주관적 세계라는 모순을 동시에 안고서 살아갈 수 있었을까. 너와 나의 세계가 각자 고유하고, 그 사이에 한갓 언어로는 넘볼 수 없는 아득한 단절이 가로막히어 있는데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그것을 두려움에서 찾는다. 


운명이 두 사람의 세계를 비슷한 모양으로 빚어놓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그 두 사람의 가치관이 우연히 비슷하지 않다면, 두 명의 고유한 사람은 자연상태에서 서로 융화될 수 없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연하듯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게 주관적 세계란 곧 그 자신이다. 내가 '나'라 일컫는 것은 세계를 몸소 체험하며 느낀 자신들이요, 그 사이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서서히 형상화되는 개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들, 그리고 그 앞의 내 감정상태는 세계를 경험하며 하나하나 수집하는 것, 그것이 쌓여 개념화한 것을 가지고 우리는 스스로를 특징지어 일컫는다. 그리고 이런 자기개념의 형성 이전에, 먼저 그것을 느끼어 아는 선험적인 주체, 그것이 주관이다.  


*


그건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아직 우리의 영혼이 어디에 비롯돼, 어딜 가로놓여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영혼은 자신의 육신을 통해 경험하는 많은 것들에 곧바로 답을 내놓는다. 그것은 본능의 명령에 파생하는 것일 테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를테면 본능의 명령이란 영혼의 그것 보다 단순한 형태를 띤다. 대략 '좋아!', '싫어!', '돼!', 안 돼!', '무서워!'와 같은, 원시언어의 형태를 띤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는 바이다. 그러나 아이들조차도 단순히 그런 원시 언어적인 명령만으로 무언가를 느끼어 곧바로 무언가를 아노라 여기지는 않는다. 본능의 원시언어와 의식의 논리언어 그 사이의 무언가, 본능처럼 강렬하되 의식처럼 어딘가 분명한 언어, 나는 그 두 가지 극단 사이 모호한 곳, 이 전의식 차원의 언어 주체를 영혼이라고 이하 일컫고자 한다. 


아무런 의식의 논리작용 없이 촌음 만에 뇌리에 대두하는 답, 본능처럼 강렬하되 의식처럼 어딘가 분명한, 영혼의 답, 그것은 최초엔 거역할 수 없는 사실이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실로 여겨진다. 몸소 겪은 바에 대해 본능이 화답하고 영혼이 이미 느끼어 아는 것, 그것은 여겨지는 것, 즉 믿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영혼이 가로되 저것은 올바른 것이다, 또는 그른 것이다고 하면, 아직 훈련받지 않은 인간은 그것을 철저히 믿는다. 자신의 안에서 이 '참의 예감'을 대체할 수 있는, 보다 명징한 감각과 강력한 명령을 아직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우선 각자 주관적으로 폐쇄된 존재로 태어난다. 인간은 자신이 몸소 느끼어 감각하는 바만을 명징하게 안다. 지식이 경험을 초월할 수 없듯이, 수년을 학습한들 1년을 경험한 것에 미치지 못하듯이, 심지어는 나의 고뿔이 그대의 고름보다 뼈아프게 저려오듯이, 인간은 주관적으로 폐쇄된 존재이다. 그렇지 않은가. 나는 나의 육신 바깥에 가로놓인 그대를 몸소 느끼지 못한다. 다만 추찰할 뿐, 그대 사랑하는 이가 아프다고 내게 말하면, 나는 그대의 아픔을 떠올려야만 한다. 그리고 내 과거의 아픔을 기억 속에 반추하여, 그대 아픈 모습에 접맞추어 반쪽짜리 이해를 획득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내 그대를 생각함이란, 그대의 실루엣 위에 그 비슷한 나를 투사하는 일, 그대를 나로써 이해하는 일이다. 다만 이따금 다정한 사람들은 곧잘 가슴 아파하는 것이었으되, 이 모든 일련이 의식보다 깊은 곳에 가리어 감추어진 것이었을 뿐. 만나본 적 없는 제3 세계의 기아를 치킨을 씹으면서 바라보기만 할 수 있는 것도, 소란스러운 앰뷸런스의 비명소리에 찡그릴 수 있는 것도, 내 그대를 몰라 직접 사랑하지 못할 까닭이기도 하거니와, 기억 속에 그대의 고통과 비슷한 정도의 것을 가져보지 못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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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것은 도덕적 문제 제기가 아니다. 애초에 이 글은 도덕론을 기초로 하거나 전제하지 않기에, 이 모든 소름 끼치도록 무심한 일련이 '자연한' 것이라고, 매말리 일컫는 것일 뿐이다. 물론, 그것이 자연하다고 하여 자연상태 그대로 두어도 좋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추호 아니지만, 자연한 이기심에 대한 각자의 양심적 문제, 정의에 대한 이론 등은 다른 글에서 다루기로 한다. 각설. 이렇게나 단절된 우리가 이제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이끌리다니, 갈등은 예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강아지를 좋아하는 누군가와 대화를 할 적에, 보통 우리의 의식은 그리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 의식 작용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요하고 필연적으로 스트레스를 낳기 때문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글 쓰는 일을 피로하게 여기는 까닭과 같다. 모든 사고와 언어들을 의식에 주입하여 직접 논리회로를 돌리는 것은 많은 에너지와 집중을 요하는 일이다. 그리고 컴퓨터의 CPU가 부스팅되면 쿨링을 위해 곧 시끄러운 팬 소리가 들려오듯이, 의식작용은 열과 스트레스를 낳는 일이요, 피로함에 말미암아 지치는 감각을 이는 행위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일상 속 사고를 가만 들여다보면 반자동화된 전의식, 즉 영혼의 언어가 주가 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또한 명징한 일이다. 누가 있어 매 순간 모든 사고행위를 의식에 전개해, 스스로 논리검증을 할 것이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아침에 일어나 세신하고 집 밖을 나와 반복적인 일상을 영위하고, 사람을 만나 소통하고, 이따금 비일상적인 상황에 대처하고, 여가를 즐기고 집에 돌아와 잠을 취하는, 길다면 긴 하루 동안 오직 열렬한 의식만으로 능동적인 사고판단을 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사건, 위급하지 않은 상황에 의식의 스위치를 켜 구닥다리 컴퓨터를 부팅하는 일은 드문 일이다. 만약 강아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데에 그렇게 피로한 의식 작업을 수반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 이야기기도 한데, 그 사람은 다른 한편으로는 경미한 위기감을 느끼는 것일 테다. 이를테면, 영혼이 즉시 내놓을 수 있는 답변이 빈약해 대화의 명맥이 곧 끊길 것이라는 사실과 그에 자연스레 뒤잇는 침묵과 대화단절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그 위기감에 말미암아 열렬히 의식을 놀리어 강아지를 주제로 한 대화거리를 물색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대화를 어려워한다. 그러나 마찬가지 영혼이 내놓을 수 있는 답변이 빈약하나, 그에 뒤잇는 상대방과의 어색한 침묵이나 대화의 단절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글쎄 잘 모르겠네.' 혹은 '아 생각하기 귀찮아'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 또한 의식의 작위성을 설명하는 단편 예시일 것이다. 


일상 활동 중에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들여다보면, 반자동적으로 행해지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기상과 세신, 아직 잠결에 멍하니 휩싸인 채 행하는 출근, 루틴잡,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절로 퇴근길에 발을 옮기는 것과 이젠 익숙해 편안해진 친구를 만나 별다른 생각 없이 수다를 일삼는 것까지. 중간 중간의 의사판단을 제외하고는 심지어 대화하는 것조차 반자동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말이 혹 거북하게 들리실까 보아 덧붙이자면, 반자동적이란 수동적이라는 낱말의 반의어이다. 수동적, 달리 말해 적극적인 행위로서의 의식이란 모든 생각과 낱말 하나하나를 의지로 머릿속에 떠올려 능동적으로 검열 및 배열작업을 행하는 정신활동을 가리킨다. 낯선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면, 단연 일상 대화의 일체가 이러한 피로한 작업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들은 바로 옆의 친구와 열렬히 떠들어대면서도, '생각하기 싫다'는 말을 습관처럼 뱉기도 한다. 그런 그에게조차 생각이 없을 수는 없기에, 그 말은 의식을 스스로 운용하는 것이 고되고 어딘가 벅차다는, 귀여운 투정으로 읽히곤 한다. 


앞서 일컬은 전의식적 주체, 영혼을 이러한 자동화된 주관 논리의 집체라고 일단 정의할 수 있다면, 우리 일상 속의 사고활동은 이렇듯 대부분 자동화된 주관 논리, 영혼의 답을 통해 효율적으로 영위되고 있다고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자동화된 논리, 영혼의 즉답이 발현되기 어려운 낯선 상황에서, 달리 말해 매 순간 적극적인 의식을 놀리어 의사판단 및 사고판단을 해야 하는 경우가 피로한 까닭도 이와 닮았다. 인간이 낯선 환경에서 쉬이 피로함을 느끼는 까닭을 여기서 찾는다. 매 순간이 검증과 검열의 대상이고, 그것이 위기감을 낳아 의식을 작용케 하는 것이었다면… 부정적인 사건상황에서 의식은 저절로 일한다. 의식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경미하게나마 두려움이 있지 않고서는 일상 속에서 좀체 작용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러니까 사색이나 토론의 취미를 갖지 않고서야, 또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특정 상황, 그러니까 학업이나 발표와 보고 따위의 과제가 있지 않고서야, 심지어는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대학교, 직장과 같이 일상의 무대와 주변 환경이 바뀔 때와 같은 낯선 상황이 아니고서야 익숙한 상황에서는 자주 발현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의식 작용은 에너지를 요하는 정신 활동이기에 그것이 정말로 필요하다고 여기어 적극적으로 행하거나, 불가피할 때에 절로 작동한다. 스스로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익숙한 환경 속에서의 일상 상황 같은 때에, 육신은 에너지를 불가피한 상황에서만 활용하고자 하는 보수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정적인 사건상황과 그에 수반되는 경미한 불안은 이런 불가피함에 해당한다. 불안과 두려움은 의식을 작동시키는 가장 강력한 기제이다. 위기의 상황에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가만히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은 아마 없을 것이다. 영혼은 불안 상황을 해소하기 위한 갖가지 답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기억 속을 색인하거나, 여러 단계의 연역 논증을 통해 해결책을 강구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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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본능 사이, 전의식 차원에 자리한 자동화된 주관 논리의 집체를 나는 편의상 영혼이라고 일컫기로 했다. 그것은 응당 영혼 靈魂의 일상 용례인, 육신을 지배하고 초월하는 정신적 주체인 령 靈을 직유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분명히 인지할 수 있고 나의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것인 의식과 달리, 내 안 깊은 어딘가 숨어 도사린 것, 나이되 어딘가 나 아닌 듯 한 낯선 이 목소리를 느끼곤 그 신비로움을 빌어 영혼이라 일컬어보고 싶을 따름이다. 


거기에서는 수많은 대답들이 아무런 고민도 없이 곧바로 튀어나왔다. 마치 누군가 손에 꽉 쥐여주듯이 샘솟곤 했다. 분명 나이되 어딘가 나 아닌 것 같은, 영혼이 빚는 온 목소리는 나의 마음에 더없이 가깝고 어쩌면 곧 마음 그 자체였을지도 모르겠으나, 한편 나의 의지대로 조종할 수가 없는 것.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어려워하였으나, 한편 누구나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여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것, 단단히 소유된 자신의 이해이자 별다른 노력 없이도 이미 거기 존재하는 것. 나는 그것을 영혼의 답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감지해낼 수 없는 누군가가 바로 귓전에 대고 속삭이는 듯이, 언제나 고민 속을 헤맬 때면 영혼은 그에 화답하여 답해 주곤 했다. 심지어는 아무런 의문이 없는 고요한 순간에조차도, 영혼으로부터는 여러 가지 문장과 명제들이 튀어나왔다. 언젠가부터 나의 영혼은 한시도 쉬지 않았다. 어쩌면 쉬이 공감치 못할 나의 길고도 난해한 이 글조차도, 내 영혼이 끝없이 떠들어대는 시끄럽고도 만연한 문장들을 하나하나 엮어서 펼쳐 보인 것에 지나지 않다. 써온 모든 글의 길이만큼이나 나의 영혼은 내 안의 쉴 새가 없는 목소리였고, 그만큼 오랜 벗이었다. 


그것은 괜스레 들여다보지 않았을 때, 아직 탐구하지 않아 고로 개척되지 않았을 때에 영혼은 나 자체이다. 많은 사람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모두 영혼의 목소리, 반자동화된 주관 논리를 따르고 있노라고 앞서 주장했지. 영혼의 답은 내 마음에 꼭 맞아, 아니 어쩌면 내 마음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 명제에 대한 스스로 아무런 거슬림이 없었다. 고로 영혼과 인식하고 판단하는 주체인 '나'는 처음에 분리된 것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나 살아가매 언제나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라, 우리는 영혼의 목소리에 저항하거나 심지어는 대적해야 하는 경우를 자주 맞닥뜨리게끔 되기에. 말인즉 나의 주관, 나의 영혼이 가리키는 바를 언제까지고 관철할 수는 없었기에. 태초로부터 자신의 주관, 즉 영혼의 목소리를 부정할 수 있는 인간이란 아마도 없었을 것이나, 상황과 사건들이 우리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그것을 부정하거나 유보하게끔 만들었을 것이다. 이건 아마도 사회에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은 바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한 자기 부정이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끝, 영혼에 반항하는 의식이 비로소 하나의 자아로 태동하면, 그것은 정신의 한 가지 독립적인 기관처럼 기능하게 되는 것 같다. 


**


여기까지, 전제들을 늘어뜨려 두곤 이제 아이들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야겠다. 주관이라는 세계의 독립성과 영혼의 자기 점유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느라 글이 길었다. 장차 이렇게 고유한 두 세계가 일으킬 충돌과 그것이 각자의 영혼에 남기는 생채기 및 생애 길이 남을 잔상에 대해 말해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언급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글이 많이 두서없지만, 모든 정리와 보완은 이 시리즈가 끝나고 난 다음 진행할 수 있음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이 글은 그저 내 영혼이 두서없이 던져대는 모든 낱말과 문장을 찬찬히 엮어내는 작업이기에, 즉 나의 사상은 쓰면서 그 실체를 점차 밝혀가고 있는 것이기에, 처음부터 잘 정돈된 채로 세상에 선보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문득, 최근에 그런 질문을 받았던 것이 기억에 난다. 글을 길게 써내는 것 같은데, 피곤하지 않으냐는 질문이었다. 무척이나 피곤하지만, 이것이 내 영혼의 부름이기에 자연히 그 부름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비로소 답하겠다. 그때 나의 의식은 심장, 혹은 공허로부터 계속 샘솟는 이 문장들을 붙잡아 검열하고, 재단하고, 배열하느라 얼얼하긴 했지만 말이다. 만약 더 나아가, 그 부름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물으신다면 나는 아직 답할 수가 없다. 


그 끝에 무엇을 바라고 기대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또 무어라 답변드려야 할까. 자유로워지는 것, 마음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것, 즉 무애 無碍해지는 것이라고, 아직은 두루뭉술하게 설명드릴 밖에는 자신이 없다. 보시다시피 나의 영혼은 너무 많은 문장들을 던져대고 있어서, 가만두어서는 스스로 아무런 정리가 되질 않아 말이다. 언젠가 이 글이 끝나고, 더는 나의 영혼에 정리되지 않은 문장들이 남지 않는 그때, 더 이상 중구난방히 떠다니는 생각들이 모순과 의구심을 낳아 나를 보채고 괴롭히지 않는 그때, 드디어 한 가지 생각에 가만히 처해 늦은 오후를 무심하고 지루하게 영위해 볼 날에, 나는 비로소 나의 영혼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다. 영혼에 대한 나의 생각을 그때 바로 설명해 보일 수가 없어서, 나는 그냥 좋아서 하는 거라 괜찮다고 답했으나, 가장 정확한 대답은 이것이다. 


글이 끝나고, 정리마저 다 마친 후에는 어쩌면 책이 되어 나와주지 않을까. 그건 다만, 내 오랜 투쟁의 끝맺음을 상징하는 누추한 기념비나마 돼 줄 것이다.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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