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무애 無礙 5

소녀와 소년들의 세계
글 입력 2022.12.25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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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그 사랑스러움들은 애초 희구의 대상이 될 수 없을뿐더러, 지선의 목표가 될 수 없기에 질투의 대상으로 화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사랑스러운 채로 평온히 내 눈 안에 담긴다. 그들에게 내가 하고픈 말은 그저, 영원히 명랑하기를 하는 담보 없는 진심 뿐이다. 그들을 축복한다. 온갖 자기강박과 제약조건에 속박되어 있는 내가 그들을 바라본 덕에, 이렇듯 무애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는가.


다만 거기 어디 나와 같은 사람이 있어, 명랑한 이의 아름다움을 흠모하고 있다면 우리가 걸어보아야 할 길은 다를 것이라는 말, 이것이 이번 글에서 진정으로 드러내고자 한 이야기이다. 즉, 지금부터 이야기해볼 것, 과정으로서의 무애에 대해 생각해보는 편이 더욱 이로우리라는 말이다.


  - 지난 에세이, 무애 4 中

 


'악흥을 좇아 실컷 우스워지리라.' 이 지난하고도 막무가내인 연작 에세이를 묶는 단 하나의 캐치프레이즈이다. 애초 연작을 의도치도 않았으므로 에세이 각각은 서로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지 않음을, 스스로 느끼고 있다. 그래도 이왕 이까지 인도되어 글은 계속되고 있음에, 가는 데까지는 가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런 중에 드디어 어느 비범한 파계승의 자취를 흠모해볼만한 기틀이 마련되었다.

 

내가 참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타고난 성정 性情이 있고, 천성 天性, 이고 난 '별', 즉 어떤 운명으로 인도하는 손길이자 이정표가 있노라고(물론 이 별이라는 것은 생이 일정 지나고나서야 드러나는 것이므로 일종의 결과론이기도 하나...), 고로 그 사람의 색깔과 무게감에는 다분 선험적인 성질이 배어있노라고. 부디 이 생각을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노라니 후천적 노력이 가질 수 있는 실질적 의미란 다만 애처로운 몸짓뿐'이라는 어느 급진적인 허무의 생각, 그 일환으로 간주치는 마시길. 그로써 해보일 수 있는 이야기, 내 가지고 있는 이 대전제에서 피어나는 주장들은 그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 될 터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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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자기를 생각함에 있어 객관을 논하는 것 만큼 우스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부러 증명치 아니 하고 외려 편히 뱉어보건데 나는 언제나 나를 생각할 적에, 참으로 지겨운 무게감을 느끼곤 한다. 흩어낼 수 없는 것으로서는 마침내 지겨운 것이 되어버린… 이것은 나의 별, 이것은 일상 내내 일어나는 사건들에 비치어, 내게 되돌아오는 감각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증명되는 사안이기도 하다. 거니는 내내 마주치는 해맑은 얼굴들, 그 위에 비추어 떠오르는 나의 표정으로, 간만에 만난 옛친구와의 술자리에 어김없이 찾아드는 어색한 침묵으로, 친한 친구와 함께 깊은 밤 게워낸 담배 연기 위, 얹힌 상념들로, 회사의 동료·후배들의 눈빛에 스친 생각과 지어진 표정들로, 그리고 빈 주말, 거울에 떠오른 민낯을 통해서.

 

예상되는 반박들이 벌써부터 많지마는, 오늘은 그냥 그에 대해 일절 생각치 않은 채 찬찬히 내 생각을 풀어보려 한다. 내게는 친구가 하나 있다. 친구라는 단어를 가장 깊고도 진지한 의미로써 사용하자면, 내겐 딱 하나가 있는 셈이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 없이 학교 정문 앞 새로 생긴 카페에 왔다. 저마다의 할 일을 하다가 어느 한 명이 자리를 뜨면, 다른 하나가 뒤따른다. 카페 바깥으로 나오면 담배를 문다. 그 카페의 앞에는 커다란 거울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자랑할 것도 없는 우리 둘을 비춘 그 앞에서, 한참을 응시하다간 운을 뗐다. 우리는 참으로, 무거워 보이지 않으냐고. 친구는 머금은 연기를 느긋하게 피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내게 친구라는 특정 '존재'의 개념은 침묵을 통해 완성된다. 고독을 싫어하는 우리가 즐거워보이는 누군가에게 이끌려 서로 몇 마디 주고받다간 다음에도 만나자 약속을 잡아보는, 그런 방식으로 친구라고 불릴 만한 '관계'는 형성될 수도 있었다지만, 끝내 두 사람 사이에 감미로운 침묵이 깃들어 도는 수순에 와서야 그는 내게 친구라는 개념으로서 완성된다. 이런 우리 둘은 마음 속에, 깊이 가라앉으려고만 하는 차돌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시종 진지하다는 말이 아니다, 물론 대개 진지하지만, 그 비유는 이따금 침묵의 적당한 순간을 맞아, 오래도록 그 안에 머물고자 하고 또 머물어볼 수가 있는 우리 모습을 우회적으로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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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에세이 내내 이야기해온 생각이지만, 무게의 비유는 마음의 자유도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강박과 체화된 자기억제일 것이다. 우리는 잠깐 기억을 되짚으며 함께 지내온 나날을 떠올린다. 시시콜콜한 사례들까지 여기 전부 풀어낼 수는 없겠지만, 무언가 육중한 감각이 거기 잔뜩 묻어있었다. 마구 언어를 지어서 손쉽게 뱉어보이기엔 바로 '그 무언가'가 자꾸 붙잡아대서, 우리는 자주 침묵에 가로 놓인다. 그 치의 마음 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어 내 것만 꺼내보이자면, 지어만든 말을 혓바닥이 굴려보이기 전에 검열하는 습관이 강하게 있다. 적절치 못하다 여기면 삼킨다. 만들어 삼킨 말이 내게는 많고, 그것은 나중에 글이 되어 나와야 했다.

 

검열하는 동안, 즉 삼켜버리는 동안과 다른 말을 지어보일 때까지의 시간은 모조리 침묵이 된다. 그래서 나는 심장이 느린 사람을 선호한다. 그런 사람의 눈빛이 내게 전하는, 어떤 느긋함이 나를 다급하지 않도록 다독여주기 때문이다. 개보다 고양이를, 그보다도 소를 좋아하는 까닭이 그 엇비슷할 것이다. 그렇담 우리는 왜 이런 습관을 가지게 된 것일까. 앞서 친구에게 해보인 말, 우리는 왜 이렇게 무거워 보일까하는 질문은 이것에 대한 질문이다. 단순 침묵이 잦아서도, 자주 진지해서도 아니, 그것을 모조리 아우르는 것이자, 그 근원적 원리에 대한 질문이다.

 

*

 

개인적 견해로, 마음의 자유도를 규정하는 것을 두 가지로 들겠다. 하나는 앎이고 남은 하나는 강인함이다. 강인함에 대한 설명이 꽤 길어질 것 같은데, 이것에 대한 설명은 잠시 뒤로 미루어두겠다. 이것이 바로 이번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핵심 제재가 되어줄 것이다.

 

하나는 앎. 물론 자신에 대함이다. 한편, 앞서 '사람이 자기를 생각함에 있어 객관을 논하는 것 만큼 우스운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지. 앎이란 객관적 사실에 대함, 그래서 이것, '자신에 대한 앎'은 사실 엄밀하게 따지고 들자면 불가한 것이다. 나에 대한 이해는 스스로의 것도 타인의 것도 온전한 것이라 볼 수 없기에. 상당히 긴 글이 그 탄생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에 결론부터 매김하고 시작하자면, 자신에 대한 앎은 불가해한 것이었으며, 사실 그것에 대한 집착 내지는 사로잡힘이 내적 자유를 방해하는 첫번째 요소였다고 적어본다.

 

객관화를 목표로 한, 실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객관화 해보이기로 했을 때의' 자기 인식과 그 해석은 오로지 자신을 얼마만큼 알고자 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알고자 하는가의 문제이다. 자인식이란 오로지 그런 문제의식으로서만 기능하고, 그로써만 성립될 수 있는 운동상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한편 왜 알고자해야 하는가, 그것이 이 난해함 앞에 던져볼 수 있는 유의미한 질문이고, 본 글에서 다뤄볼만한 이야기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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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노라 천명해보기에 앞서, '나'는 얼만큼 도해가능한 무언가이고, 그것은 어떻게 증명될 수 있을 것인가를 헤아려본다. '나'라는 것에 대한 탐구에 있어, 앎의 대상인 '나'는 모호함이라는 대지 위 불분명함이라는 영원한 안개 사이 어딘가에, 정체되지 않고 가변하는 무언가로서 흐물거리고 있고, 그것에 대한 증명은 밑을 알 수 없는 구름 위에 논리의 석탑 그 토대를 쌓아올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태롭다. 그렇담 애초 불가해한 것인 자기 인식과 그것의 객관화는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것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닐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안다고 여겨지는 그 무엇에 대해, 나는 어떻게 이야기해보여야 할까. 누구나 자신에 대해 다소간 아노라 생각하게 만드는, 그 모호함은 대체 무엇인가. 아노라 생각하는 바로 그것, 그 모호함에 쌓인 흐물거리는 것은 무엇이었으며, 나는 대체 무엇의 무엇을 보고 아노라 여기는가. 이렇게까지 깊이 도해해 들어오지 않는 한, 달리 말해 사유를 위해 의식의 깊은 바다를 잠수해들어오지 않는 한, 또 달리 말해 수면으로부터 반만큼만 잠긴 채 잠영하는, 또는 자맥질하는 정도의 일상적 깊이에서는 이 모든 것이 명징하다고 여겨지지 않던가. '나는 다소간 나를 안다'고 바로 내가 생각하지 않았던가.

 

어쩜 살아감이란 그 자체로 주관적 세계를 누비며 체험하는 것이기에, 일상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사고행위는 본디 주관성을 띄며 발생하거나 애초 주관의 하위갈래일 까닭에, 자인식은 따라서 명백한 주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비교적 자명한 일이다.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세계를 해석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육신을 경계로 안팎은 완전히 단절된 세계이다. 안쪽의 세계인 내면과 바깥의 세계인 외부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외적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자연물은 완전한 바깥에 존재해 몸소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해석, 즉 추찰함으로써 나름으로 받아들인다. 오늘 나의 사랑하는 세계와 자연물과 사랑하는 너희들에게 감사함을 부여해 느끼는 등의 행위가 그 메마른 사실을 가리킨다.

 

그 모든 인지는 사실 최초에 해석으로 오고, 그것 해석은 응당 주관적 이해를 바탕으로 서는 개개인마다의 고유함이다. 고로 각자 앎이라 여기는 것은 다소간 내적으로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는 해석의 다발이다. 너무나 사랑하는 존재의 앞에서 느끼는 무력함을 기억하는가. 네가 느끼고 바라는대로 너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마음인데,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무력함을 떠올릴 수 있겠는가.

 

고로 스스로에 대한 앎의 감각은 '나는 나의 주관적 모습을 안다, 혹은 나는 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나를 아노라 여기거나 그렇게 믿는다'와 같이 풀어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객관적(이고자 노력한 결과로서의) 자인식이란 애초 무엇이고, 어떻게 해내일 수 있는 것인가. 애초 나의 경계 안쪽에 있는 모든 것이 다소간 주관성을 띄거나 애초 주관의 하위갈래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연발생하는 주관적 자인식과 타인에게로부터 강제로 떠안게 된 자신에 대한 외적 해석 사이에 발생되는 거리감을 통해 도출되는 것일 테다. 다시금 강조해두고 넘어가자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도출되는 것이어야 할 테다. 그려본 자화상은 어떤 물감으로 칠해지는 것인가 묻는다면, 무수한 너희들이 나름대로 이해한 나의 단편, 나에게로 쏟아진 나의 외적 해석이 뭉뚱그려 형성된 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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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객관을 담지할 수 없는 것으로써, 그러나 이하 편의상 객관적 자기인식이라 불러볼, 그 시도는 우선 개념적 거울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변증이다. 자연히 상정되어 있는 '주관으로서 이해한 나', 그리고 존재하는 나와 외부세계 간의 상호작용이 퇴적되어 형상화하는 '외적 해석으로서의 나'가 마주봄으로써 비로소 전개되기 시작하는 사고실험이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나라고 일컬어진 나', 이 두 가지 컨셉트가 상호 비교되며 그려지는 또다른 것으로서의 스케치이다. 그 두 개는 필연히 괴리를 안고 있고, 그 과정은 응당 변증의 형태를 띈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나'도 '나라고 일컬어진 나'도 참일 수가 없다는 것, 이것 또한 그리 어려운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쉽게 말해 스스로 생각하는 나도, 너희들이 생각하는 나도 '참 나'일 수는 없었다는 것을, 이미 충분히 고민한 이에게는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되어줄 것이다. 그래서 변증은 이 자문답의 행위에 있어 필수적인 위상을 가진다. 그것은 내 방식으로 말해보자면, 둘 중 더욱 아닌 것의 지위를 낮추고, 명백히 아닌 것은 지워버리는 일종의 소거법이거나, 두 모순을 아우르는 보다 본질적인 것에 대한 추론을 도모하는 행위이다.

 

본의 아니게 이야기가 길어진다. 자인식에 대한 이상의 설명은 다음에 계속하기로 하고, 왜 앎은 내 생각하기에, 내적 자유를 방해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그리고 왜 자기 인식이 무의미한 것이 아닌지, 나아가 그것이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도리어 치열한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사람이 본디 가진 성정과 느닷 개발된 성격, 즉 자신의 속성, 그것에 대해 매기게 되는 미추美醜와 장단長短이라는 이해는 지극히 지극히도 추상적이며 주관적인 것이라서, 태도와 인식관에 따라서, 즉 어떻게 생각하려고 하는지와 어떻게 생각하고 싶은지에 따라서 완전히 가변한다. 그것은 없다고 여기고 있고 그렇게 진실로 믿어지는 동안에는 실제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마찬가지로 타당하다고 여기는 때에도, 그르다고 여기는 때에도 그렇다.

 

살아감이란 끝없이 확장·가변하는 주관, 그 유약하고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지 위로 무수한 외적 반응과 자극이 쏟아지는 일을 겪는 것이고, 그 외부의 것은 일정 해석을 통해서 내면으로 들어오는 것이며, 주관적 이해와 외적 자극에 대한 해석이 내면에서 충돌하면, 화해하거나 반목하는 양상을 띈다. 고뇌는 그러한 모습 중 후자의 것, 내적인 반목의 표출된 모습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러나 이 땅의 어린이라 일컬어지는 존재들을 먼저 떠올려보라. 그들을 위한 가상의 무대를 내면에 드리워 작가적 안목을 발휘해 극을 전개해본들, 내 멋대로 등장인물인 아이의 얼굴에 고뇌의 그림자를 지어볼 수는 없었다. 더러 너무 빨리 우울감과 비통함 따위의 슬픔을 알아버린 아이가 세상엔 있더랬지만, 그것은 나의 이야기이기도 한데, 여전히 한 점 주름 없는 아이의 얼굴 위에 스스로 고뇌를 지어먹는 표정을 지어보일 수는 없었다. 슬픔을 느끼는 것과 스스로 고뇌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행위이기에. 이것은 고뇌가 다소간 나이 먹은 자들의 소유라는 것을 드러내고, 더 상술하자면 그것이 아이에서 어른으로 변모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결정적 계기들을 통해서 체득됨을 나타낸다.

 

마음의 자유, 그것은 이렇게 써볼적에 대단히 거창한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이해하는 실상은 퍽 단순하다. 그것은 일종의 자유이다. 무엇으로부터? 내면에서 자연히 일어나는 주관, 사고와 감정을 비판하고 통제하는 그 무엇으로부터. 그것, 통제마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일테나, 한편 기계적인 것이기도 하다. 통제에는 까닭이 단단히 자리해 있고, 자기 통제, 즉 강박은 모종 원인에 뒤이어 발생하는 기계적 반응이리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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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시절을 기억한다. 내면이 주관이라는 닫힌 세계만으로 성립되어 있는 시절, 내 안의 온 개념은 내가 생각하고 믿는대로만 존재할 수가 있는 시절이 있었다. 그때 외적 세계에 대한 해석은 곧 주관 그 자체이다. 즉, 세계는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대로만 존재했으며, 내가 그렇게 단단히 믿고 있는 상태이다. 고로 외적 세계는 주관적 이해를 바탕으로 가지런히 정렬해 있었으며, 모든 것은 나의 생각대로만 개념화되어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평화였으나, 지나온 이의 안목에서 볼 때엔 언제곤 깨어질 한정적인 평화의 시기이다. 그것을 이하 편의상 '소년의 시절'이라고 부르겠다.

 

그 평화는 언제고 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년의 시절 가지고 있던 고유한 이해는 타인의 그것(여기엔 교육이 포함된다)과 충돌해 대결하게 마련이기 때문이 하나이고, 심지어는 사회적 동물인 우리가 각자의 이해, 즉 가치관과 해석을 교류하며 무리에서 더욱 범상하게 받아들여지는 보편적 해석관을 향해 응집하고자 하는 최초의 움직임을 배태하기 때문이 둘이다.

 

그것은 조용히 치뤄지는 시험이다. 나와 너의 다름 앞에서 옳은 것은 무엇이냐 하는 전자의 문제는 비교적 차분히 치뤄지고 두 사람만의 양보와 화해 혹은 결렬로써 매듭지어진다. 그러나 후자의 문제가 아마 소녀와 소년에게 더욱 큰 시험이 되었을 것인데, 나와 '너희들'의 다름이라는 문제 앞에서 개인은 선택하게 된다. 편입하느냐 대립하느냐, 혹은 보류하느냐 하는 선택지 앞에서 개인은 전율한다.

 

보편적인 해석관, 그것을 주도하는 이가 있고 그것에 쉬이 편승하는 이가 있고 적당히 양보하는 이가 있고 선택을 보류하는 이가 있고 마지막으로는 대립하는 이가 있다. 소년 시절의 살아감이란 너희들의 무수한 이해가 아직 단단히 정립되지 않은 개인의 대지 위로 침노해 들어오는 것을 경험하는 일이다. 소위 주류 해석과 자신의 이해하는 방식, 가치관이 첨예하게 대립할 수록 그는 커다란 내적 대립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내 소년 시절의 이야기이다.

 

소년들이 해석과 가치관을 교류하는 일반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는 시간상 생략하고, 결국 중차대한 사건은 발생한다. 마침내 개인, 바로 그 사람에 대한 스스로의 이해와 타인의 해석이 대립하는 일이다. 그것은 좀 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하자면 자신이 모르던 자신의 과오를 대면하게 되는 일이다.

 

상호 간 가치관과 해석이 대립하는 것에 있어, 즉 소년 시절의 살아감에 있어 가장 위중한 사건은 두 인간의 상호해석, 즉 자기이해와 자기평가가 대결하는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 대결에서 패배한 것 같다. 이제와 생각하면, 까닭은 내게 양극성과 모순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소년의 내면에는 주관을 비판하는 주체가 형성된다. 그것은 패배의 강렬한 순간이 남긴 타인의 망령, 나를 사랑하여 믿었던 그 만큼 커다란 패배의 고통은 자기 비판의 몸체를 형성한다. 내가 너무도 미더웠던 만큼, 그 순간을 계기반전하여 나는 의심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패배가 남기는 긴 꼬리표이다. 앞서 말한 것, 우리의 지어낸 언어와 사상을 마구 붙잡아 검열하는 내적 주체는 비대해진 이것이다. 어찌보면 참 단순한 이야기를 길게 늘여뜨렸구나.

 

**

 

해석, 그러나 누구의 해석이 옳다고 여겨지는가. 진리가 존재치 않는 한, 해석은 영원히 가변한다. 그것은 진리의 환상을 영원히 멤도는 그림자이고, 우리가 '참인 것', '옳은 것'을 바라는 만큼 동안이나 오랠 '인간의 일'이다. 해석, 그 가변성이 바로 외따로 떨어진 우리를 이따금씩만 공감으로서 묶어주는 기능을 수반하는 것이고 또 사실 우리를 더욱 서로 떨어뜨려 외롭게 하던 것이다. 이것은 동일한 사건·사물에 대한 저마다 해석의 고유성. 세상에는 사람 수 만큼의 해석이 있다고 했지. 결국 누군가를 사귄다는 것은 서로만이 공유하는 해석의 지도를 발견하거나, 누군가의 고유한 해석이 매력적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고로 인간이라는 작은 세계는 최초에 반드시 서로 충돌하게 되어 있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 자체라기보담, 그 이후의 것들에 대함이다. 타인의 세계가 나에게로 쏟아지고 나는 전율하고 대결하며 자연스레 내 안의 또다른 나, 너희를 닮았거나 대변하는 망령, 비판하고 검열하는 내가 형성된다는 것,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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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화라 퉁치어 일컬어지는 것. 이제 살아감에 있어, 주관은 항상 비판을 받게 된다. 나로부터 형성되는 자연하고 고유한 이해가 나로부터 비판받게 된다. 그 비판은 그러나 도대체 무엇인가. 너희들을 추찰하여, 그려낸 너희들의 관점에서 바라본 나라는 것이란 참으로 허황된 것이다. 이렇듯 객관적 자인식마저도 하나의 주관이라는 점, 이것이 참 사람을 어렵게 하는 일이었음을 기억한다.

 

말인즉, 너희들의 나에 대한 해석마저 나로서는 결코 진실히 알 수 없다는 것. 내게 세상에서 가장 매끈한 거울이 있어 어느 각도에서 비추어본들 나를 곧대로 진실히 알 수 있었더라면… 그러나 우리는 현실의 거울에서도 그날그날마다 다른 나의 형상을 만나게 되지 않던가. 자기비판은 타인의 해석이 뭉뜽그려져 형성되는 것이라지만, 그것마저 하나의 주관인지라 무시되거나 과장될 소지가 다분하다. 나의 경우에는 너무도 과장되었다.

 

내면이 강건하거나, 이렇듯 눈에 보이지 않고 증명되지 않는 것들에까지 의식이 닿아버릴 정도로 아파하지 않을 수 있도록 무심하거나, 혹은 아직 그러한 의식 깊은 곳의 작용에까지 내적 지도가 밝히어지지 않은 이, 즉 무지한 자는 이런 것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무지란 이하 가치중립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로, 이런 실익 없는 것, 즉 무용한 내적 갈등에 대해 무지할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정신건강의 측면에서 효율적인 일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자기비판이 곧잘 주관에 편입되어버리거나 적어도 대립하지 않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주관과 비판이 대립해 오랜 투쟁의 대상으로 화해버리기도 했다. 이것은 '그려낸 타자적 관점의 해석', 그에 대한 각자의 논리적 태도를 나타낸다. 뭇 태도를 말로써 비유하자면, '좋은게 좋은거지, 나는 그냥 이렇게 생각할래, 그건 이렇게 생각하는 게 맞는거지' 등이 떠오르고 '이게 맞는걸까, 이게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것은 틀린거야, 무엇이 옳은지 모르겠다, 선택할 수 없다' 등이 바른편에 자리한다.

 

이때 태도란, 내면 안에서 주관과 비판이 형성하는 관계성을 가리킨다. 너희에 대한 내 태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타인에 대한 나의 태도는, 이 자기 태도에 뒤이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결과적 현상이다. 자기 비판이 적은 이일 수록 타인에게 더욱 너그럽고 정다울 소지가 있다고 여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내가 스스로 생각할 적에 타인에게 너그럽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그토록 나를 부정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

 

무애로 향하는 5번째 글, 자인식에 대하여서는 여기서 한번 끊어가야 하겠다. 아직 5번째 글의 본론 1번이 다하지도 않았건만, 빈 백지는 21번째 장에 달해버렸다. 저번부터 이야기해온 거지만, 이쯤되면 더욱 절실히, 이 지난한 글을 읽을 이 누가 있겠는가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 글은 계속 될 것이다. 그만큼 내가 나의 자유를 그리고 바라기 때문이고, 여기까지 쌓아온 문단들이 그 다음의 문단을 소환해내기 때문이요, 그 과정에서 내가 더욱 환히 밝혀지리라 믿는 까닭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나를 위한 글이다. 내 과거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하나의 과정이고, 지금 새로이 꿈꾸기 시작한 자유를 응원하는 행위이며, 결국 언젠가 가닿을 미래, 자유인일 나를 기리어 그려보는 의식이다.

 

결국 비범한 파계승은 이번 글에도 등장시키지 못했다. 지금 얼핏 생각해보기로도 그의 자리할 곳은 아직 한참 뒤에 있다. 5-2번 안에 자유의 첫번째 요건인 '앎과 자인식'을 마무리해내고, 6번 글 내에서 두번째 요건인 '강인함'을 모조리 다뤄낸다면, 7번째 글에서나 그 있을 자리를 마련해줄 수 있을 듯 싶다.

 

아직 써내야 할 것이 무궁하다는 것, 그것 참 벅찬 일이지만 다행스럽구나. 자유에 대한 나의 사상이 어디까지 가닿을 수 있을지, 나는 시험하는 마음으로 다음 글을 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상과 지혜가 합치될 수 있을 것인지, 지행합일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더욱 모진 시험이 그 너머에 기다리고 있음을 헤아리고 있다.

 

 

이것이 젊은 내게 주어야 할 마땅한 시련, 일종 그런 것이 아닐까. 감독관은 다름 아닌 미래의 나, 그 자신뿐일 것이다. 미숙한 젊은 내가 써놓은 사상을 돌아보고, 조금 더 지혜로와진 내가 그것의 가부를 평가하는 것. 나아가 그 사상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지, 고로 자신을 조금 더 긍정할 수 있게 될 지, 아니면 오히려 더욱 자괴에 빠지게 될 지는 미래의 나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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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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