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크기변환]라져 포스터.jpg

 

 

객석의 불이 꺼지기 전 공연은 관객에게 먼저 말을 건넨다. 가장 큰 소리가 나는 장면과 암전된 객석의 모습을 미리 안내하는 짧은 방송이 흘러나온다. 흔히 들을 수 있는 안내처럼 보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유난히 인상 깊게 남는다.

 

실제로 다른 공연에서는 잘 보지 못했던 방식이라 더 세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단순한 공지인데도 공연을 보기 전에 한 번 더 마음을 정리할 수 있게 해주는 느낌이었고, 작품이 시작되기 전부터 관객을 신경 쓰고 있다는 인상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주파수 위에서 시작된 관계


 

극의 중심에는 관제사 스카일러가 있다. 그는 21년 전 항공 사고의 조종사였던 아버지의 이름을 바로잡기 위해 오랜 시간 사건의 진실을 좇아온 인물이다.

 

아버지 사건에 대한 집착은 결국 그의 삶 대부분을 차지했고 가족과의 관계마저 멀어지게 했다. 스카일러에게 과거는 끝나지 않은 사건이며 그 사건은 여전히 현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인물에게 ‘관계’란 오히려 부담스러운 영역처럼 느껴진다. 누군가를 자신의 경계 안으로 들이는 일은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더 이상 타인과 연결될 자격이 없는 사람처럼 여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사건에 묶인 채 살아온 스카일러에게 새로운 관계는 일종의 위험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극 중에서 그가 디디를 향해 ‘동료’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순간은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가 담긴 순간처럼 느껴진다.

 

작품에서 디디는 스카일러와 전혀 다른 결을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 작은 항구 마을에서 살아가는 그는 관제 시스템조차 없는 지역에서 배들을 안내하며 자신의 바다를 지키고 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람은 우연히 같은 주파수에서 연결되지만 매일 이어지는 교신을 통해 조금씩 서로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작품은 거대한 사건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이러한 ‘목소리의 교환’을 통해 형성되는 관계의 변화를 중심으로 서사를 쌓아간다.

 

 

 

조명이 만든 세계, 목소리가 완성한 이야기


 

무대는 크지 않은 공간이지만 조명을 통해 관제실의 긴장감과 바다의 넓은 풍경이 교차하며 그려진다.

 

특히 위급한 상황에서는 조명의 변화가 빠르게 전환되며 긴박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단순히 밝기를 조절하는 수준을 넘어 장면의 리듬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 또한 붉은 톤과 움직이는 조명을 활용해 긴장감이 고조되는 순간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은 관객이 소리뿐 아니라 빛으로도 상황을 체감하게 만든다.

 

결국 이 작품에서 조명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구체적으로 느끼게 하는 하나의 언어처럼 기능한다.

 

뮤지컬 ROGER는 거창한 사건보다 사람 사이의 목소리와 선택에 집중하는 작품이다. 서로 다른 공간에 서 있는 인물들이 주파수 너머로 연결되는 설정은 결국 인간관계의 본질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타인의 목소리를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가, 그리고 누군가의 말을 ‘들었다’는 사실은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작품은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을 제시하기보다 상처 앞에서 멈춰 선 사람들에게 여전히 누군가의 목소리가 닿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공연을 보고 난 뒤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사건의 전개나 장면의 긴장감보다도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인물이 주파수 너머에서 천천히 마음의 거리를 좁혀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Roger’라는 짧은 단어가 단순한 관제 용어를 넘어 누군가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을 상징하는 말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press.jpg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