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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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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실패의 계절이 있지만 그 시간을 견디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실패와 절망의 시간을 지나 다시 자신을 믿게 되는 한 예술가의 여정을 그린다.

 

작품의 시작은 라흐마니노프의 첫 교향곡이 혹독한 비평을 받으며 실패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는 "지옥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아무도 이 곡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혹평에 좌절하며 은둔 생활에 들어간다. 천재로 불리던 젊은 음악가는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더 이상 작곡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때 그의 앞에 나타난 정신의학자 니콜라이 달 박사는 최면 치료와 상담을 통해 라흐마니노프의 마음속 상처를 보듬어준다.

 

 

 

불완전함이 만든 관계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달 박사가 라흐마니노프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청했을 때 그는 차갑게 거절한다. “악수를 하면 관계가 생긴다”는 대사에는 세상과 스스로에게 마음을 닫은 그의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라흐마니노프>의 두 인물은 각기 다른 이유로 자신을 미워한다. 라흐마니노프는 잃어버린 명성과 실패의 그림자에 갇혀 있고 달 박사는 프로이트의 이름 앞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 채 흔들린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관계는 이런 열등감 속에서 자라난다. 서로의 상처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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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박사는 라흐마니노프에게 질문을 던진다. “왜 새로운 곡을 쓰려고 하는가?”

 

달 박사의 질문은 단순한 치료자의 관심이 아니라 라흐마니노프의 내면에 감춰진 의지와 상처를 읽어 내려 가려는 시도이다. 대화는 곧 두 인물이 감정적으로 공감하는 계기가 된다. 극이 진행되면서 달 박사는 라흐마니노프의 실패와 불안을 듣고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열등감, 프로이트에게 미처 다다르지 못한 자기 자신과 마주하면서도 라흐마니노프에게 '당신은 이미 사랑받고 있다'라는 믿음을 건넨다. 이 믿음은 단순한 치료가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의 빈 공간을 채우는 관계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결국 두 사람은 결핍을 통해 서로를 비추며 그간 외면해온 감정들을 마주하게 된다.

 

반복되는 상담 속에서 라흐마니노프는 달의 진심을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달 역시 그를 환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 대하기 시작한다. 커튼콜에서의 악수는 라흐마니노프의 긴 여정을 완성하는 순간이다. 달에게 손을 내미는 라흐마니노프의 표정은 이제 두려움이 아닌 평온함이었다.

 

 

 

음악으로 전하는 마음


 

뮤지컬 <라흐마니노프>가 많은 사람들에게 호평받는 이유는 음악의 역할에 있다. 무대 위에는 배우뿐만 아니라 그랜드 피아노가 함께 자리한다. 이들은 단순한 배경 연주자가 아닌 라흐마니노프의 내면을 표현하는 또 다른 주체이자 배우이다.

 

공연을 보는 내내 클래식의 매력이 극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흐마니노프의 어린 시절 피아노 레슨 장면에서는 그의 음악뿐 아니라 여러 작곡가들의 곡이 함께 연주되어 극의 깊이를 더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음악으로 꼽히는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비롯한 그의 명곡들이 극의 넘버로 재탄생해 극적 서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연출은 "음악으로 말을 할 수 있는 순간에는 대사나 행동보다는 음악이 얘기하도록 만들고 싶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배우들의 노랫말은 클래식에 실려 관객에게 다가가고 피아니스트의 압도적인 연주는 때로는 독주로 이어져 마치 콘서트에 온 듯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이는 클래식과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음악 그 자체의 힘을 오롯이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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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클라이맥스는 라흐마니노프가 좌절을 극복하고 다시 작곡을 시작하는 순간이다. 달 박사의 “당신은 새로운 곡을 쓸 것이며, 관객들은 당신을 사랑해 줄 것입니다”라는 따뜻한 격려와 함께 그는 마침내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완성한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음악이 사랑받는 이유는 단순히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안에 ‘다시 일어서려는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뮤지컬 속 라흐마니노프가 스스로를 구원했듯 그의 선율은 여전히 누군가의 어두운 시간을 건너게 하는 손길이 되어 흐른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아 집에 돌아와 라흐마니노프의 연주 영상을 찾아 들었다. 유튜브 영상의 댓글 창에는 “이 음악 덕분에 버텼다”, “절망의 시기에 이 곡이 나를 살렸다” 같은 고백들이 가득하다. 익명의 공간이지만 각자의 상처와 회복의 이야기가 이어지며 하나의 공동체처럼 느껴졌다. 그 글들을 읽으며 뭉클했던 이유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단순히 과거의 명곡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언어로 계속 숨 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대 위 달 박사의 한마디, ‘당신은 이미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메시지는 선율이 되어 흐른다. 그리고 그 음악은 시대를 지나 오늘의 우리에게 닿아 여전히 마음을 일으키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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