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누구나 말을 한다. 구어(口語 : 음성으로 나타내는 말), 수어(手語 : 수화 언어)뿐 아니라 표정과 눈짓, 신체 언어 또한 말의 한 종류다. 다양한 형태로 모두가 말하며 살지만, 누구나 당연히 글을 쓰며 산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말도 배워야 할 수 있지만 글은 더더욱 교육받아야 익힐 수 있다. 대단한 학자가 되지 않아도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려면 글은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다.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은행에서 거래하고, 사랑하는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토록 당연한 일상도 누리지 못한 채 평생을 부끄러움 속에서 살아온 이들이 있다. 70대·80대, 즉 인생 황혼기에 처음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팔복 문해학교 ‘가시나들’이다.
2025년 초연에 이어 2026년 재연까지 호평받으며 공연되고 있는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과 에세이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을 원작으로 한 실화 기반 창작 뮤지컬이다. 제10회 한국뮤지컬어워즈 작품상·극본상·연출상 3관왕을 차지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서울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6월 28일까지 공연된다. 작품은 8월 7일부터 8일까지 안동문화예술의전당에서, 8월 14일부터 16일까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도 관객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 메인 포스터_제공 라이브(주).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6/20260619134657_bliikkws.jpg)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 혹은 ‘가장 시 쓰기 좋은 나이’이기도 한 가시나들은 자신의 삶을 시로 써낸 시인이기도 하다. 영란·춘심·인순·분한 네 가시나들은 팔십 줄에 글을 깨친 것을 부끄럽다고 여긴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딸이란 이유로 어머니를 분하고 슬프게 만들었으며, 근사한 시를 읊어주는 첫사랑 오라버니 앞에서도 글을 읽지 못했다. 글을 몰라 은행에서도, 가게에서도, 동화책을 읽어달란 손자 앞에서도 평생을 두려워하며 부끄럽게 산 것이다.
이에 문해학교 교사 가을은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살아온 인생을 글에 담아 누구든 시를 쓸 수 있다며 가시나들을 격려한다. 한참 젊은 선생님이지만, 그는 글뿐만 아니라 인생의 방향성 또한 제시하며 가시나들에게 새 길을 열어줬다.
인생 막바지에 제도권 밖에서 글을 배웠지만, 가시나들은 삶을 아름다운 예술로 재탄생시켰다. 영란이 아들에게 남긴 편지, 가수를 꿈꾸는 춘심이 노래자랑 지원서에 쓴 글이 곧 시가 되고 예술이 됐다. 서툴고 투박할지라도 그 글엔 ‘진짜’가 담겼다.
가시나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시사 다큐멘터리 PD 석구는 그들과 반대로 제도권 안에서 성실하게 살며 ‘감독님’ 소리를 듣는 PD가 됐다. 작품은 석구의 변화를 통해서도 울림과 깨달음을 준다.

자신과 결이 맞지 않다며 문해학교 다큐 촬영을 반기지 않았던 석구는 처음엔 한 걸음 떨어져 가시나들의 모습을 관망한다. 현장 개입 없이 자연스러운 그림만을 담아내는 게 다큐멘터리의 원칙이라던 그는, 가시나들의 진솔한 모습에 감화되며 그들의 인생에 끼어들기 시작한다. 가시나들의 일상만 촬영하는 게 아닌, 진심으로 다가가는 석구는 그들에게 삶을 배우며 한 식구 같은 사이로 거듭난다. 일로 시작한 촬영이 가시나들의 진짜 희노애락을 담아낸 반짝이는 추억이 된 것이다.
여자아이를 뜻하는 방언 ‘가시나’를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 ‘가장 시 쓰기 좋은 나이’로 재해석한 것에서도 작품 정체성이 드러난다. 전 세대가 공감하는 따뜻한 휴머니즘이 담긴 극은 누구에게나 위로가 되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배움이 늦은 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묵묵하고 성실하게 버티며 살아온 삶 자체가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실존 인물들이 겪은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은 그들이 쓴 20여 편의 시를 뮤지컬 넘버로 만들었다. 이들의 삶은 고단하고, 외롭고, 슬펐지만 뮤지컬은 가시나들이 걸어온 길을 신파로 처리하지 않았다. 등장인물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도, 창작진이 가시나들의 삶을 다루는 자세에서도 존중과 배려, 따뜻한 웃음이 담겨 있기에 극은 사랑받을 수 있었다. 가시나들이 보여준 진짜 마음에 제작진과 배우들 또한 진심으로 다가간 것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쁜 날이 오리니.’
인순은 어린 시절 첫사랑 오라버니에게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듣고 사랑에 빠진다. 다정하고 따뜻했던 첫사랑은 무심한 영감이 돼 글을 모르는 인순을 은행에 보낸다. 어릴 땐 좋아하는 오라버니 앞에서 부끄러워서, 나이가 들어선 글을 모르고 못 배웠단 부끄러움에 인순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처럼 인순도, 영란·춘심·분한도 삶이 자신을 속이는 감각에 사로잡혀 평생을 부끄럽게 살아왔다. 그럼에도 그들은 마냥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만은 않았다. 슬픈 날들을 참고 견뎌내니 마침내 기쁜 날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가시나들은 소박한 일상에서 사소한 기쁨들을 발견했다. 글을 배우는 것, 서툰 글씨로 난생처음 써본 시, 할머니가 돼 처음 입어본 교복, 친구들과 함께 소풍을 떠나는 것, 글을 모르고 살던 지난날이 결코 부끄러운 게 아니란 것까지. 그러한 사소함이 하나둘씩 모여 가시나들의 인생은 찬란해졌다. 이처럼 평범하고 따뜻한 위로는 각자만의 ‘부끄러움’을 숨기고 살 관객의 마음 또한 어루만져주며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당신의 부끄러움 또한 시가 되고,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사진 출처 - 라이브(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