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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목 짧은 인간, 민무늬 인간: 괴물이 아니었던 우리들에게 - 연극 ‘또 여기인가’ [공연]

완벽히 이해할 수 없어도 기꺼이 서로를 버텨내는 소중한 인연에 대하여

by 장유정 에디터
2026.06.14 14:42

 

 

도쿄 외곽의 한 주유소, 무대 가운데에는 소파 하나가 놓여 있다. 그 뒤로는 커다란 창이 보이고, 일본어 전단지가 한가득 붙어 있다.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건 인물들, 그리고 선풍기뿐. 관객은 정면으로 보이는 무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철저히 관찰자의 자리에 앉아 주유소 안팎을 오가는 인물들을 눈으로 쫓게 된다.

   

 

또 여기인가_포스터.jpg

 

 

*

본 리뷰는

작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뀌는 이야기, 바뀌는 시선


 

처음에는 꽤나 예상 가능한 범위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주유소 점장 ‘지카스기’와 껄렁껄렁한 알바생 ‘다카라이’가 어딘가 엇나가는 대화를 나누다가, 중년 남자 ‘네모리’가 나타나 대뜸 자신을 지카스기의 이복형이라고 소개하며 아버지가 의료사고를 당하신 게 분명하니 함께 병원을 고소하자고 제안한다. 강력한 용의자로 데려온 건 간호사 ‘시메노’.

 

아버지의 병환, 그리고 죽음. 그 비밀이 드러나면 문제가 해결되는 추리극이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 이후 몇 가지 반전이 빠르게 뒤따라온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건 밤낮으로 아버지를 간호했다던 지카스기였다. 네모리는 소설가였지만, 자신의 소설을 따라 한 소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출판계에서 추방된 사람이었다. 의료 소송도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시메노는 지카스기의 살인을 알면서도, 간병이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지 이해한다며 그것을 방관했다. 그녀의 미심쩍은 행동은 그저 지카스기의 살인을 덮기 위해 힘쓰던 장면이었다. 하지만 시메노가 기껏 해명해준 바와는 다르게, 지카스기는 간병으로 지친 마음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그저 '해서는 안될 일을 저지르고픈 충동’을 통제하지 못해 벌인 일로 드러난다.

 

새로운 사실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내 머릿속은 파편들을 모아 끼워 맞추기 위해 바쁘게 돌아갔다. 뭐야, 이 사람이 나쁜 사람이었구나. 어? 근데 저 사람이 더 잘못한 거 같은데? 세상에! 이 사람이 사이코패스인가봐.

 

그런 스스로의 모습을 인식하는 순간, 이 작품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평면이 거듭 쌓이면 비로소 입체를 볼 수 있게 된다. 매 평면에서 손쉽게 결론을 내리던 나를, 그제야 깨달았다.

 

 

 

물감 물을 마시면 안 돼


 

혼란의 중심에는 지카스기가 있다. 어리숙한 말투에 과하게 예의를 차리는 조심스러운 태도, 한눈에 봐도 어벙벙한 사람이었던 그는 사람이 먹으면 안된다는 곤충젤리를 몰래 입에 털어넣고, 건미역을 씹더니 물을 마신다. 저러면 미역이 위에서 붇지 않을까? 어어. 결국 토를 하고야 만다.

 

그런데 점점 장면이 섬뜩해진다. 그가 아버지의 호흡기 호스를 묶어버렸다는 게 사실로 드러나고, 운전하던 도중 아이를 발견하고 그대로 액셀을 밟아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고 고백한다. 급기야 아버지를 죽이고야 만 자신을 이해한다며 평범하게 살 수 있도록 돕겠다는 시메노를 향해 망치를 꺼내들고, 끝내 괴물 같은 자신을 통제할 수 없음에 힘겨워하다가 주유소에 기름을 흩뿌린 뒤 라이터를 꺼내든다.

 

이 모든 건 아주 어릴 적 유리잔에 물을 담고 색색깔의 물감을 탔을 때, 그 물감 물을 마셔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을 때 기어코 참지 못하고 마셔버린 뒤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주 작은 충동 하나를 참지 못했을 뿐인데, 그게 시작이 된다. 이것도 못 참는 나, 저것도 못 참는 나. 눈덩이는 그렇게 굴러간다. 억누를수록 충동은 강해지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다는 공포가 스스로를 더 괴물로 만든 것이다.

 

자신이 너무 끔찍해서 스스로가 무서웠던 적이 있는가? 어떤 사소한 이유에서든 더 잘하고 싶은데,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견디기 힘들어지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찾아온다. 이상을 지키지 못할까봐 두려운 감정에서 ‘소중한 것들을 모조리 망가뜨리고 싶은 충동’이 시작된다. 그 후에는 그런 자신이 역겨운 감정도 뒤따라오기 마련이다. 지카스기의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면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던 건, 그 감각이 아주 낯설지만은 않아서였다.

 

 

 

물감 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하지만 작품이 주목하는 건 그 충동의 끔찍함이 아니다. 지카스기의 두려움이 무시무시한 행동으로 드러날 때마다 내가 관객이 아니라 극중 인물이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계속 생각했다.

 

시메노를 향해 망치를 꺼내 들었을 때, 아이를 치고 싶었지만 차 사고가 나서 그 행동이 저지되었다며 코피가 흥건한 티셔츠를 입고 털어놓았을 때, 피젯 스피너를 시끄럽게 돌리던 다카라이의 팔을 뽑아버렸을 때, 내가 그 앞에 있었다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 그를 저지하고 안정시킬 수 있었을까? 아니면 무섭다고 도망쳤을까? 아마 도망쳤을 것 같았다. 고통에 빠진 지카스기가 안타까웠지만 무서움이 더 컸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 건 진심이었다.

 

모순된 감정을 안고 실눈으로 무대를 보고 있을 때쯤, 네모리가 끝내 지카스기에게 달려가 라이터를 빼앗았다. 네모리가 말했다. 네가 그렇게 무서워하면서도 참지 못하는 그 충동, 그걸 그대로 소설로 쓰라고. 그렇게 다 종이 위에 쏟아내고 나면 괜찮아진다고. 멈추지 못하는 스스로가 무서우면, 형을 믿으라고. 그 말에 나는 지카스기라도 된 것처럼 위로를 받았다.

 

연극 <또 여기인가>는 결국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기다. 시메노는 지카스기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를 돕고 싶어했고, 네모리는 이복동생을 사이코패스라며 비난하기도 했지만,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세상에 붙들어놓기 위해 몸을 던졌다. 다카라이는 점장의 이상한 모습에도 의문을 표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둔다. 다카라이는 무엇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누가 어떻게 행동하든 그대로 둘 수 있는 사람이다.

 

중요한 건, 지카스기만 참아주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지카스기도 제멋대로인 다카라이를 참아주고, 네모리에 대해 실망할 만한 점이 많았는데도 그를 형이라고 반겨주고, 다가오는 시메노를 뿌리치지 않는다.

 

모두가 서로를 견뎌주고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누군가와 함께일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 속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하는 정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노력 정도다.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나'로서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이 작품은 나지막히 말하고 있다.

 

물론 이것도 누구에게나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니 마음이 맞는 인연 하나하나가 전부 소중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소중한 사람에게는 마들렌을


 

마지막에 지카스기는 네모리에게 받은 펜으로 소설을 쓴다. 그 펜은 한때 네모리에게 팬레터를 보내던, 소설을 따라 ‘구원받은’ 소녀의 것이었다.

 

그렇게 연극은 지카스기의 소설 속에서 막을 내린다. 그 소설 속엔 미처 행하지 못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충동이 그대로 쏟아질 것 같았지만, 꽤나 평화로운 일상을 볼 수 있었다. 하지 말라는 건 재밌으니 꼭 한 번 해보는 엉뚱한 지카스기. 다카라이에게 거슬리는 건 솔직하게 털어놓고 하지 말라 부탁하는 지카스기. 카페 알바생과 주유소 주인 사이로 만난 시메노. 무엇보다 기다리던 이복형에게 그토록 주고 싶었던 마들렌을 대접하는 자신의 모습.

 

스스로를 괴물이라 믿고 억누를수록 강해지던 강박은, 그 믿음을 내려놓는 순간 가장 소박한 소망으로 돌아왔다. 달달한 마들렌처럼.

 

극이 막을 내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다카라이가 네모리에게 던진 말을 계속 곱씹었다.

 

 

네모리 씨, 동물원 가서 기린 보고 '목이 길구나' 하세요?

얼룩말 보고 '와, 얼룩무늬가 있네' 하세요?

 

기린도 우리를 보면서 ‘목이 왜 이리 짧아,’

얼룩말도 ‘쟤는 민짜네?’ 할 거예요.

 

민짜가 당연하다는 생각을 버려요.

 

 

당연한 건 없다. 그러니 이상한 것도 없다. 이 연극은 사실 괴물이 아니었는데 스스로를 괴물로 만들었던, 그러나 결국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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