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하면서 감독은 “이 영화는 누나가 조현병에 걸린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도, 조현병이 어떠한 병인지 설명하려는 것도 아니다.”라고 밝힌다. 다른 인터뷰에서 감독은 자신의 가족을 “실패 사례”라고 표현하며, 비슷한 문제를 겪는 다른 가족들에게 이 기록이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며 영화를 만든 목적을 밝힌 적이 있다.
다큐멘터리야말로 극단적인 주관성을 가진 영상물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이기 때문에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것에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해진다.
감독은 정신질환을 앓는 자신의 누나와 부모를 수십 년 동안 촬영했다. 가족의 일상뿐 아니라 어머니의 죽음과 누나의 죽음까지 카메라에 담았다. 사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극장 개봉만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추후에 OTT 및 VOD 서비스로 공개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다.
개봉 이후 일본을 포함하여 한국에서도 소소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감독의 두 번째 내한 GV가 몇몇 극장에서 진행됐다. 인기가 좋아 GV 티켓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스크린에서 내려가기 전에 서둘러 극장을 들렸다.
카메라를 든 가족의 관찰자적 기록
영화는 예상보다 훨씬 일상적이었다. 카메라를 든 감독 본인은 누나 마사코와 가족에 대한 짧은 설명, 그리고 조현병의 발현으로 보이는 첫 사건을 제외하고, 화면 밖에서 모든 사건을 관찰자적 시선으로 기록했다.
객관적인 사실을 취재하기 위한 것처럼 카메라의 시선은 매우 이방적이며, 그가 가족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누나의 발작과 고통을 지켜보고, 누나의 시체를 카메라로 훑으면서 그는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감독 본인도 관객의 해석을 존중하려고 했다고 말했고, 본인에게 비판할 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영화가 아무런 결말도 제시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감독은 아버지에게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라고 묻고, 아버지는 “실패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한다.
감독은 자신의 가족이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는 제목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모든 질문에는 정해진 답이 있는 걸까?
이야기의 시작
마사코가 처음 발작을 보인 뒤 부모는 딸을 병원에 데려간다. 그러나 이후 딸이 완전히 정상이라는 말을 들었다면서 더 이상 마사코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는다. 마사코는 거의 25년이 되는 시간 동안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심각한 조현병 증세를 보이며 살아간다.
딸을 거의 전적으로 간병하던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면서 그제서야 마사코는 치료를 받게 된다. 몸에 맞는 약물을 찾아 3개월 만에 병원에서 퇴원한 마사코의 상태는 전보다 훨씬 좋아진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카메라를 향해 장난스런 포즈와 표정을 보이는 마사코는 마치 첫 번째 발작을 일으킨 24살로부터 시간이 멈춰 나이를 먹지 않은 듯 보인다.
감독은 위의 과정을 가족의 일상을 통해 보여준다.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 단편적인 진실이 숨어있다. 마사코의 치료를 완강히 거부하는 부모의 모습에서 답답함이, 모든 일을 제2의 시선에서 기록하기만 하는 동생의 모습에서 기이함이 느껴진다.
잘못된 판단
가족을 생각하면 복합적인 감정이 떠오른다. 가족과 함께 있으면 가장 나다우면서 가장 낯선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마사코의 부모는 딸에게 매우 헌신적이다. 그들은 마사코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돕는다. 마사코와 정상적인 대화가 어려운데도 다른 집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꾸려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가정의 화목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딸을 그렇게도 아끼면서 왜 딸이 망가져 가는 것을 그대로 놔뒀을까?
영화에는 시대적 맥락이 비어있다. 딸이 첫 발작을 일으킨 당시는 조현병에 대한 인식과 치료가 부족한 시점이었으며, 일본 사회는 특히나 폐쇄적이기 때문에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을 것이라 예상된다.
영화 초반에는 아버지가 과거 민간요법을 통해 심각한 질환에서 회복했다고 믿게 된 사건도 언급된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일에 대해서는 쉽게 꺾이지 않는 믿음을 갖기 마련이다. 게다가 의대에서 오래 공부하면서 본인의 지식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그들의 시야는 오히려 좁았을 것이다.
마사코의 부모는 딸이 병원에 가기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해나갈 수 있을 거라는 섣부른 판단을 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병이 악화될수록 판단을 바꾸어 다시 딸을 병원에 맡기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단순한 의학적 판단의 문제가 아닌 지금까지 자신들이 딸에게 했던 모든 행동이 잘못된 판단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생겼기 때문이다.
카메라 밖에서
겉보기에 이들은 평범한 가족의 일상을 보내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너는 누나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어머니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이 동생 마사히로는 집을 나와 살면서 잠깐씩 부모의 집을 들릴 때만 카메라를 들 뿐이다. 카메라에 담기지 않는 가족의 일상은 마사히로도 관객인 우리도 알 수 없다.
일본 법에 따르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가족의 입원은 부모의 의사가 최우선이라고 한다. 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설득뿐이었을지도 모른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까? 감독에게는 병원에 일찍 갔어야 한다는 후회와 부모에 대한 원망이 크게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과를 보고 나서 과거를 후회하는 일이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막상 문제가 닥쳐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객관적인 판단 기준을 잃는다.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을까? 누구 하나를 원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행동하게 만들었는지 자세히 들여다 봐야 한다. 인간 개개인이 내리는 판단은 생각보다 거시적인 맥락에서 다양한 영향을 받아 나타난다.
가족의 이야기는 아주 사적이기 때문에 개인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임에도 그렇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거 같다. 그러나 오로지 가족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을까? 가족 내부에서 문제가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라는 질문을 확장하여 외부에서 풀어간다면 빠른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가족의 이야기인데? 우리의 이야기인데? 우리 내부의 이야기를 쉽게 외부로 끌어올 수 있을까? 가족은 때로 ‘나’로 착각될만큼 ‘나’로부터 가장 가까운 존재인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