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대와 조금 달랐던 영화였다.
도입부에서 감독이 분명히 하듯, 영화는 ‘조현병을 설명’하거나 ‘누나가 왜 조현병에 걸렸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거리를 둔 채, 감독만의 시선으로 가족의 모습을 담는다. 구태여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영화가 끝난 뒤 상영관은 적막했다.
내가 숨을 죽였던 건, 모든 말과 질문이 영화를 보는 동안 휘발됐기 때문이다.

감독이자 관찰자인 후지노 토모아키 감독에겐 누나가 있었다. 총명하고 유망했던 ‘후지노 마사코’는 조현병을 앓게 된다. 당시엔 이름조차 낯설었던 증상은 여러 번의 오해와 방치 속에서 깊어진다. 가족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맞서보지만 종국엔 모두가 지친다. 그러곤 현관에 자물쇠를 걸어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격리한다.
마사코가 잠잠한 날이 있는가 하면, 자신에게만 들리는 소리에 비명을 지르는 날도 있다. 감독은 그 모습을 아주 조용히 기록한다. 입을 꾹 닫은 누나에게 질문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와 대화하는 누나의 음성을 닫힌 방문 앞에서 담아낸다.
영화가 중반에 다다를 즈음, 마사코는 잘 맞는 약을 찾고 급격히 상태가 호전된다. 불과 3개월 만에 가족의 상황이 확실히 변한다. 25년의 세월이 흐르기 전에 조치했다면 어땠을까? 부모가 더 일찍 상황을 인지했다면, 그들이 외부의 의학적 조언에 적극적이었다면 더 일찍 삶을 되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관객은 질문한다. 혀를 차고 그 시간을 아까워한다. 필자 또한 부모의 선택을 보며 여러 번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어떤 이는 그들을 이해하기도 한다. “당시 일본의 정신병원은 환자에게 인권이란 없는 환경이었으니 딸을 지키고자 했던 부모의 선택을 이해했다”라는 일본 관객의 관람평도 있었다. 지금의 우리가 그때의 가족을 바라보며 내놓는 답은 너무 쉽다. 그들의 판단을 판단하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우린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전혀 모르는 건 아닐까.
‘야속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힘든 세월을 보낸 마사코는 60대에 들어서 폐암 4기를 진단받는다. 감독은 누나 마사코를 데리고 여러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누나가 하고 싶어 했던 것을 할 수 있도록 곁에서 지탱한다. 한때 일종의 ‘증상’으로 여겨졌던 점성술 카드나 팔찌, 복권 같은 것들도 마음껏 사게 한다. 몸이 아픈 마사코와 나이가 든 아버지는 이제 둘 다 휠체어에 앉아 같은 높이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가족은 아주 천천히 서로를, 그리고 이 긴 이야기를 떠날 채비를 한다.

마사코의 장례식 날, 감독은 점성술 카드와 복권을 관 안에 넣고, 아버지는 딸과 함께 저술한 논문을 집어넣는다.
지독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 또한 부녀가 함께한 세월의 물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친척이 “그곳에 가서도 계속 공부했으면 한다”라고 말하자, 감독은, 아니 마사코의 남동생 토모아키는 “누나가 하고 싶다면야”라고 말한다.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한 잠에 빠진 누나를 향한 진심이다.
감독은 어떤 감상도 강요하지 않고 담담히 가족의 민낯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 기록은 아주 일부의 상영관에서, 아주 일부의 시간에만 상영된다. 가족을 떠나보내는 개인의 작별 인사인 동시에, 또 다른 가족과 사회의 변화를 일으킬 만한 힘을 가진 영화였다. 고요한 추도문이자, 신호탄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길고도 짧은 삶들에 대한 이 작품은 질문으로 시작되어 질문으로 끝난다. 영화가 답을 주지 않는다는 건 참 잔혹한 일이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과거형이었던 질문은, 영화가 끝나는 그 시점부터 더 이상 후지노 가족만을 향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길고 지난한 '실패의 일대기'를 목격한 우리는 이제 어떤 선택을 해나가야 할까. 감독은 러닝타임 101분짜리 세계를 건설해놓고 답안란을 비워둔다. 그 질문은 무책임할 만큼 거대하고 폭력적이다.
그럼에도 피하지 않고 끝내 우리 모두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용기이자 가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