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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12명의 성난 사람들>은 18세 소년이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을 두고 12명의 배심원들이 최종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유죄든 무죄든 만장일치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반대 측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줄거리에서 예상할 수 있듯, 이 영화는 변화의 요소가 적은 영화이다. 화면은 오로지 배심원들이 회의를 하는 배심원실에만 머물러 있으며, 이들이 배심원실에 들어간 이후로 12명의 배심원을 제외한 인물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1시간 30분가량의 영화가 전혀 지루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의 토론이 정적인 환경을 모두 덮어버릴 만큼 격렬하기 때문이다.

 

소년이 유죄라고 주장하는 배심원들은 명확히 존재하는 목격자와 증언, 알리바이의 부정확성 등을 들어 유죄가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소년을 무죄라 생각하는 배심원들은 증언과 증거에 존재하는 모순을 짚어내며 유죄 측이 내세우는 모든 결정적 증거에 의문점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이런 질문 하나가 남고 만다. 내가 배심원이었다면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


배심원이라는 자리는 책임이 막중한 자리이다. 유죄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면 소년은 사형당한다. 무죄라고 외칠 경우 소년은 풀려나고 만다. 나의 선택으로 무고한 시민이 사형당할 수도, 범죄자가 무죄로 풀려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어느 쪽도 가볍게 볼 수 있는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이들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토론하며 서로의 주장을 반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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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처음부터 무죄를 주장하던 배심원이 끊임없이 말했듯, 우리는 진실을 알 수 없다. 그들이 격렬하게 토론을 벌이며 유죄와 무죄를 오고 가는 과정은 결국 증언과 증거에 의심되는 지점이 많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지, 소년의 결백을 확실히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다만 의구심이 명확한데도 소년을 유죄로 평가하여 사형 당하게 둘 수 없다고 보았을 뿐이다. 어쩌면 그들이 의심하던 모든 증거가 진실이었고, 소년이 범인이 맞았을 수도 있다. 반대로, 그들의 의견이 진실이었고 소년은 무죄일 수도 있다. 우리는 진실을 알지 못한다.


이 모든 토론이 결국엔 ‘가정’에 불과하고 그 누구도 진실을 확신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순간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우리는 유죄와 무죄 중 무엇을 믿어야 할까?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서, 어쩌면 소년이 진실로 아버지를 죽였는가 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소년에게 죄가 있든 없든 신경 쓰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판단할 수 없을 때, 진실 그 자체보다는 다른 것에 집중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믿기로 선택하는 가의 문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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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무죄 측은 다리가 불편한 노인이 18m를 15초 만에 갈 수는 없을 것이고, 손을 뻗으면 기차에 손이 닿을 만큼 철로와 가까이 있는 건물에서 위층의 말싸움을 정확히 듣는 것 또한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밝힌다. 이들의 의견은 타당해 보인다. 동시에, 잠들기 직전 범죄를 목격했다는 목격자가 안경을 벗고 있었을 거란 가정 하에 증언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쉽사리 납득하기 어렵기도 하다. 만약 유죄 측 배심원들이 ‘당신들의 주장에도 의심되는 지점이 있고, 여전히 소년에게 혐의점이 존재하며, 그렇기에 그가 유죄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하였다면, 그들의 논쟁은 한참 더 이어졌을 것이고 아마 만장일치라는 결과를 얻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편견과 개인적인 감정을 재판에 개입시켜 그것을 토대로 자신이 믿고자 하는 것을 믿었다. 빈민가에서 자란 아이는 폭력적이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할 것이기 때문에 소년은 거짓말을 한 범죄자일 뿐이다. 요즘 아이들은 어른을 공경하지 않고 대들며 자신의 아들 또한 자신과 싸우고 연락을 끊었으므로 소년은 유죄일 것이다. 그들은 합당한 근거 없이 그저 자신의 믿음을 바탕으로 유죄를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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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대 1에서 시작했던 논쟁은 6 대 6으로 기울고, 유죄 측과 무죄 측의 토론이 쉽사리 끝날 것 같지 않자 한 배심원은 이 과정이 지긋지긋해졌다는 이유로 유죄에서 무죄로 의견을 바꾼다. 그를 보고 다른 배심원은 이렇게 말한다.


 

“그건 대답이 안 돼요. 처음엔 다른 사람들처럼 유죄라고 하더니 야구 경기 표를 낭비하기 싫어서, 논쟁이 지긋지긋해져서 생각을 바꿔요? 당신한테 사람 목숨을 갖고 놀 권리가 있소? 말해야겠소. 정말 확신이 있다면 무죄에 표를 던져요. 유죄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투표를 해요. 신념을 따를 배짱도 없소?”

 


이 대사가 유독 마음에 박혔던 것은 ‘신념을 따를 배짱’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어떤 토론은 답이 명확할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쉽사리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 우리는 흑과 백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수도 있다. 선택을 포기하고 싶을 수도 있고 양쪽 다 맞는 말이라 회색을 선택하고 싶을 수도 있다. 판단이 어려워서 혹은 끊임없이 사고하는 과정이 귀찮아서 다수가 선택하는 길을 따르려 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자신의 신념이라며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신념'이 보편적인 옳음 속에 있을 때야 비로소 따를 만한 가치를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소년이 유죄라고, 혹은 무죄라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믿음의 바탕에 있는 것이 개인적인 편견과 아집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단순히 자신의 귀찮음 때문에 선택을 바꾸는 것 또한 포함해서 말이다. 물론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때는 나조차 모르는 편견과 생각이 나의 믿음을 만들고 나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때로는 나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 원래의 주장을 고수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 단순히 그 선택이 아주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방황할 수도 있다. 스스로 12명의 배심원들을 모두 경험하고서도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기억하고 있자. 어떤 선택이 최선일지 그 순간에는 판단할 수 없다. 틀릴 수도 있고 이후 그 선택을 후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방향으로 갈 것인지, 그저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허울뿐인 말을 내뱉을지 정도는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정답이 없는 문제에서 선택해야 할 한 가지는 자신의 신념일 것이고, 그것이 후회를 줄일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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