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무애 無碍 8

욕망과 체념 / 수치
글 입력 2023.02.1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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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살아가매 언제나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라, 우리는 영혼의 목소리에 저항하거나 심지어는 대적해야 하는 경우를 자주 맞닥뜨리게끔 되기에. 말인즉 나의 주관, 나의 영혼이 가리키는 바를 언제까지고 관철할 수는 없었기에. 태초로부터 자신의 주관, 즉 영혼의 목소리를 부정할 수 있는 인간이란 아마도 없었을 것이나, 상황과 사건들이 우리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그것을 부정하거나 유보하게끔 만들었을 것이다. 이건 아마도 사회에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은 바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한 자기 부정이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끝, 영혼에 반항하는 의식이 비로소 하나의 자아로 태동하면, 그것은 정신의 한 가지 독립적인 기관처럼 기능하게 되는 것 같다.

 

- 지난 에세이, 무애 7


 

살아가매 언제나 내 마음, 내 뜻대로 고요히 살아갈 수 있었더라면... 그러나 결코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니, 지금 이 글을 들여다보는 온 그대들 하나하나의 영혼 깊숙한 곳에 뿌리내려 있는 이 당연한 체념은 무엇인가. 아무런 인식도 질문도, 고로 의구심이나 부조리의 감각도 일지 않는 이 당연한 명제, 그러나 어느 처연한 밤이면 우연처럼 되살아나 이내 나를 괴로움에 허적이게 하는 이 답답한 구속이란...


'내 마음, 내 뜻대로만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지, 아무렴 그럴 수는 없는 것이지.' 이러한 생각조차 상념 속에 잘 아니 뜨며, 그러므로 그에 대한 의구심, '왜 내 뜻대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지?'와 같은 반감과 대상 없는 복수심 따위의 것 또한 좀체 낳지 아니하는 이것. 인식 없으나, 그럼에도 너무도 단단하게 마음속에 기능하는 이 깊깊은 체념은 어디에서부터 생겨난 것인가. 


이제 학교에 적응하여, 하교 후에는 어떤 즐거운 소동을 일으켜볼거나 만을 열렬히 골몰하는 시절, 대략 초교 2-3년생에게 이런 체념을 투사해볼 수는 없을 것이다. 어버이는 안 된다는 것이 무엇 그리 많은지, 이건 이래서 안 된다 하시고 저건 저래서 안 된다 하시고, 그 앞에 나는 못마땅하기 그지없고, 그러나 어차피 고민한들 답을 알 수 없는 것이기에 금세 집중을 잃고 주변의 또래들과 시끌벅적한 수다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그 모습들의 뒤에 이 '당연한 어른의 것'을 가져다 대어볼 수는 없을 것이다.  


내 마음대로만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지, 언제쯤에선가 마음 안에 뿌리내리곤 시간의 풍랑 아래 슬며시 지우이는 명제. 그러나 애초 우리가 그를 스스로 온 마음으로 느껴볼 만큼이나 겸허한 가슴을 안고서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언제부터였을까. 세상이 즐거운 예감으로 차 있던 시절, 동무와 한 여름 뙤약볕 아래, 드넓은 논 사이로 질러 나 있는 둑방길 위를 자전거로 내달리며, 등목이 토마토처럼 익어가는 줄도 모르고 저 먼 데 서 있는 지평선을 향해 쏘아나갈 수 있던 그 시절이란, 언제 막을 내리곤 영영 그쳐버리는 것이었을까.


세상에는 가끔 이러한 체념을 너무 빨리 알아버린 아이들이 있었다. 내 마음대로만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지, 이 겸허한 체념을 일찍이 받아들여버린 아이가. 그 아이는 설 명절에 가득 모인 어르신들과 선생들과 부모 정도로부터 '철 들었다'라는 칭찬을 받곤 하고, 어쩌면 그것을 자랑스런 훈장쯤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무엇일까. 무엇이 그 아이의 마음 속에 세상에 대한 체념과 염세의 씨앗을 밀어 넣었고, 또 그럴 수가 있었는가. 


아직 좌절을 충분히 겪지 못한 사람은 쉬이 체념하지 못한다. 체념이란 온몸으로 겪어낸 좌절들이 몸에 스미어 체화되곤 그에 뒤따르는 괴롭고 답답한 생각일랑 인식 상 지워내거나 잊힌 결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해보라. 우리 마음속에 있던 소망들이 그리 쉬이 꺾어내거나 타협 볼만한 것들이었는지. 나의 조악한 의식과 조막만 한 의지를 가지고서 어디 마음대로 해볼 수 있는 것이었던지. 세상에 가져보고픈 것은 얼마든지 있었고, 겪어보고픈 것은 그보다도 많았다. 눈을 뜨면 거기 반짝이며 있었다. 실은 사물들이란 거기 가만히 먼지에 저항하며 앉아 있을 뿐이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 나의 소망은 그것들을 열렬히 욕망하며 그 위에 반짝임을 입히었다. 유혹하고 있다고 생각됐다. 이것을 어찌 어린 마음에 스스로 명료한 의식과 단호한 의지로 끊어내 보일 수 있었겠는가. 


보통 어버이들은 하루빨리 이것을 알려주려고 했다. 동네 오일장에 갔을 때, 이마트에 갔을 때, 심지어는 차 뒷좌석에 타서 빠르게 흐르는 차창 밖, 허름한 문구점에 진열된 먼지 앉은 포트리스 게임 캐릭터의 장난감에조차도, 눈길에 닿아버린 모든 것을 이 손에 쥐어보고 싶은 마음이란 불가한 것이고 버거운 것이기에. 어버이는 불가, 연이어 불가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고, 아이가 그것을 이해하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스스로 이해해 받아들이기에는 장차 지혜를 여물어내는 긴 시간과 수많은 경험과 시행착오가 필요한 법이기에. 때도 써보았겠지, 토라져도 보았겠지, 할 수 있는 조악하나마 온갖 수를 써본들, 어버이는 아주 가끔씩만 사탕을 허락해 손수 내 입으로 넣어주었다.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던 아이들은 긴 시간 투쟁했으나, 이미 어른인 어버이들은 불가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고, 결국 어느 시점에는 이제 다 되었다, 귀찮다는 듯이 혹은 침통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겠지. 내 마음대로, 내 갖고픈 대로 갖고, 내 하고픈 대로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학습된 체념, 이것이 어떻게 단 한 줄의 명제를 통해 우리의 의식에, 나아가 그보다 깊은 곳인 영혼에까지 닿아 마침내 차갑게 새겨질 수 있었겠는가. 우리의 소망, 욕망은 수원을 알 수 없는 저 지맥 속의 용암처럼 빨갛고 대류로 순환하며 끝이란 없을 듯이 꿈틀거리고 있었음에. 이 마음과 영혼을 송두리째 휘어잡아 빨갛게 상기시키곤 온몸으로 애닳게 만들어버리기에. 겨우 달랑 한 줄의 명제, 실체와 사례 없이 뼈다귀만 남아 있는 그 메마른 문장을 가지고 바꾸어보기에는 어림이 없던 것이다. 아직 어린아이에게로 어버이들이 쏘아내던, 그 한갓 왜소한 낱말로는 당치도 않은 것이다. 


그보다 훨씬 차가운 것, 무겁고 어딘가 벅차고 여지도 없이 단단한 것, 즉 오직 현실의 문제만이, 가질 수 없다는 그 냉엄한 사실로만이 겨우 그 애닳는 뜨거움을 진정시킬 수 있지 않았으랴. 체념의 학습이란, 결국 가질 수 없다는 그 분명하고도 단단한, 차가운 사실들을 온 몸으로 겪어내며 일어나는 것이었고, 그러던 언젠가 영혼의 한 줄기를 꺾어내는 일이 아니었으랴. 아직 스스로 대화하고 대립하는 시기에 접어들지 않은 어린 영혼에게, 체념이란 일방적으로 즉 강압적으로 자행될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나 단단한 주관으로 구성되어 있는 어린 내면에, 침범해버린 너무도 또렷한 현실이 그 영혼 깊이 뿌리 박인 소망 내지는 욕망이란 이름의 한 가지 줄기를 잘라버리는 일이 아니었겠는가. 그 스스로 이해하고 납득하고 받아들이고, 제 손으로 자신의 줄기를 전지 剪枝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체념의 학습. 한정된 자원과 가 없는 욕망이라는 딜레마 관계에 대해, 우리가 해 보일 수 있는 최선이자 필연이 아니었으랴. 혹자, 가슴 안에 적당한 욕망이 점지된 채로 세상과 만났고, 복되게도 그에 상응하는 적당히 유복한 집안 사정을 물림 받은 자, 그런 자는 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이에게 내 이야기는 너무 지독하다. 그에게조차 삶은 다소간의 체념을 학습하게 만들었겠으나, 그렇게 강압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요, 그리 많은 것을 포기하도록 권받진 못했을 것이며, 소망하고 또 절망하는 자신을 두고 목놓아 울어보지 않았을 터임에, 달리 말해 영혼에 긴 생채기가 나지는 않았을 터이니. 


*


옛날을 떠올리면 떠오르는 빛바랜 이미지들이 여럿 있지만, 지금 떠올려보는 장면은 여덟-아홉 살 어간의 어느 오후이다. 만화영화 '웨딩 피치'가 TV 위를 흐르고 있었고 그것을 치어다 보지도 않은 채로 어머니와 작은 반상을 앞에 두고 바닥에 마주 앉아 있다. 조금 이른 저녁상에는 흰 쌀밥에 김치, 간장이 전부였다. 간밤 아버지가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식탁이며 의자며 식기까지 모조리 파괴되어 있는 상황, 나는 그때 이미 투정하는 방법을 시나브로 잃어버리었던 것 같다. 바로 앞 어머니 눈에 흐르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것 같았기에, 이렇게 먹는 것도 맛있다고 말하며 씩씩하게 먹으려고 애썼다. 


여섯 식구가 빚으로 연명하던 시절, 빨간색 가압류 딱지 앞에서 나는 투정하는 방법을 일찍이 잃어버린 것 같다. 그런 나도 어느 날 갖고픈 장난감 앞에서, 그가 부르는 강렬한 욕망에 점유되어 어머니 마음을 대못으로 긁어버린 적도 있었더랬다. 기억나는 장난감이 몇 개 있다. 앞전에 언급한 포트리스 게임 캐릭터의 장난감도 있지만, 초등학교 5학년 운동회 때 보부상이 판매하던 싸구려 장난감 총이 유독 기억에 오래 남는다. 아마 내일, 내일 너머 모레, 그 너머 다음 주 딱 거기까지, 어머니는 쌀 걱정을 하시느라 장난감을 사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세상 가장 슬프고 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그 온 표정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왜냐하면 그것은 인식과 기억이 있는 후로 그때까지의 짧은 평생을 내내 함께한 것이었기에, 그럼에도 그날은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났더랬다. 누구한테, 무엇에 화가 난 것이었을까. 운동회가 한창인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나는 전에 없이 길길이 화를 냈고 어머니는 기어이 장난감 총을 사주셨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한, 부려 본 처음이자 마지막 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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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자세한 이야기들은 순서상 후술하겠지만, 이건 내 영혼에 아주 꼬리 긴 생채기를 낸 수많은 일화의 몇 가지이다. 무엇에 화가 났을까. 그렇게 장난감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것이 내게 준 환희란 한나절도 가지 못했다. 그리곤 어머니에 대한 감정으로 오랜 밤을 앓아야 했다. 그게 다 무엇이었지? 가슴을 흘러넘치는 죄책감과 자괴감과 연민, 그래 우습게도 그건 연민이었다. 어머니는 화낼 줄을 모르셨다. 이 집안으로 잘못 불시착한 이후로, 한 번도 제때 제대로 화내지를 못했다. 그녀가 감내하던 그 기막힌 일들, 마침내 광기에 휩싸였다 한들 나는 그녀를 마음 깊이 이해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를 치켜세우고, 그녀의 손을 꼭 쥐고 그녀가 옳았노라고 내 마음은 토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를 못했다. 남편에게 맞고 세간살이들은 날아다니고 시누이들이 하대하고 시어머니가 이간질을 하고 현실적인 문제가 아무리 그녀의 밤을 갉아 먹었다 한들, 그녀는 한 마디 화도 내지 못했다. 언제나 밤이면 바닥을 잔뜩 부딪곤 흩어져버린 사금파리를 묵묵한 걸레로 훔치며, 한 사람이 감내할 수 있는 정도를 아득히 넘어버린 수모를 넘고 지나 그녀는 내게로 기어서 온다. 그리곤 애처롭다는 듯이, 가엽다는 듯이, 너무나도 미안하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다. 그런 눈빛으로 나를 핥는 것이다. 나는 도리 없이 기가 막히는 것이다. 


그걸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무력한 입장에서는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이다. 그녀는 줄곧 욕망하는 내게 있어 거울이었고, 가장 아픈 반면교사였으며, 가장 훌륭한 회초리였다. 세상 가장 보드라운 섬유로 된 회초리이다. 그 앞에 선 내가 어떻게 마음껏 욕망하는가.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뻔뻔스럽게 요구하는가. 그녀가 당연한 자신의 것, 삶과 권리를 제창하며 악에 받치어 욕망하는 뒷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내 지금으로 이어진 운명의 기로는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스스로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았다. 그저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마음으로, 한없이 죄스러운 마음을 안고서 나를 가여워했고, 하나를 더 먹이고자 하였고, 하나를 더 쥐여주고자 했을 뿐이다. 그녀에게선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이 구절에서 몇 번을 끊어가는지 모르겠다. 아직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그 서론을 채 시작하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이렇듯 나는 가장 큰 사랑으로 된 쇠사슬을 안고 자랐다. 아무도 강제로 드리우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는 아름다운 멍에를. 그 어떤 호령과 회초리와 강압으로도 새길 수 없는 정도의 깊이를 가진 낙인이, 나의 질기고도 심지 두터운 영혼 깊은 곳을 저절로 들어섰다. 그녀는 스스로를 살라서 나를 키웠고, 언제든 얼마든지 날아가거라 말하시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너무도 위하고 그리워하였기에, 이제 자라나는 내가 그것을 능히 안고서, 등에 지고서 장차 홀로 훌쩍 날아가 보기에는 내 마음이란 너무도 유약한 것이었기에, 나는 오래도록 무언가에 속박되었다. 그녀가 내 온 마음과 영혼에 너무 깊이 새기었다. 허나 어쩌면, 그건 그녀가 나를 구원하느라 새겨진, 참으로 다행스런 흉터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욕망하는 것에는 참으로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조금 천박하게 돈 드는 것과 돈 드지 않는 것으로 나누어보고자 한다. 나는 돈 드는 종류의 욕망을 참으로 두려워했다. 그건 내 어머니의 자그마한 등을 떠올리기 때문에. 이제 그 환영은 시간의 축복을 세례받아 잔뜩 희미해졌다지만, 그 추억들이 기나긴 탓인지 아직도 망설이는 습관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돈 안 드는 욕망을 선호한다. 멋없이, 그리고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그렇다. 그중에는 다시 무엇이 있을까. 그때 어린 시절, 아마 지금까지도 줄곧 사람을 사귀는 것이 거진 반이었던 것 같다. 글을 쓰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그때, 초등학생인 내가 또래들과 가까울 수는 없었겠지. 사실 지금에도 모종 그건 마찬가지이지만, 지금 돌이켜볼 제 그때의 내겐 참 가까이서 한없이 멀리 있는 이들이었다. 거기엔 내게 사랑스러운 멍에가 드리운 까닭도, 내가 소심한 탓도 있었겠지만, 허나 그뿐만은 아니이다. 우습게도, 당시 그들 또래의 가정과 삶에는 내 겪은 바에 비해 훨씬 지독한 악취가 베여 있었으니. 내 또래들은 나를 질투했다. 그네들이 던진 몇 가지 말들로 미루어 보아, 살이 토실토실 오른 부잣집 도련님쯤으로, 아마 그들 마음에 나는 그렇게 각인된 것 같다. 실지로 우리 집은 그들보다 잘살았거든. 우리집은 그래도 벽돌과 빚으로 빚은 새집이라 비도 들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 우리집 빚이 제일 적었으니까. 또한 내게는 적어도 어머니, 그리고 미우나 고우나 아버지가 있었으니까. 정말이지 하늘이란 악랄할 정도로 비극을 사랑하는 것 같다, 그때 그 작은 마을의 나는 본 바 세상의 전부인 줄로 알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에 텔레비전에 비치는 화목한 가정, 천진난만하고 천둥벌거숭이 같은 아이들의 모습이란, 그때 나와 나의 어린 동무들에게 그 얼마나 염세적인 감정을 일으켰겠는가. 


어머니 얼굴을 모르는 아이, 마찬가지 아버지 얼굴을 모르는 아이, 어머니가 곧 야반도주를 떠나는 운명을, 그리고 그 직전까지의 위태로운 생활을 겪어내고 있던 아이,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아이마저 한 동네 한 학교의 지붕을 이고 모여 자랐다. 학년 고하를 차치하고 내 고향 동네에는 편부모 가정이 많았다. 안정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벌이가 없는 가정은 더욱 많았다. 오랜만에 성현이가 기억난다. 수입은 없고 빚은 늘어만 갔지만, 그래도 야금야금 팔아내고 마지막으로 남은 200평 땅 위, 마당과 텃밭이 있는 우리 집, 유치원을 마치면 그 앞 도로 건너편에서 할아버지를 불렀다. 횡단보도가 없어서 할아버지는 버선발로 날 맞으러 나오셨다. 어느 양지바른 날도 마찬가지 할아버지를 부르려고 집 맞은편에 섰으나, 웬 낯선 아이가 모래더미에서 혼자 두꺼비집을 파고 있다간 눈이 마주쳤다. 니는 누구야? 내? 김성현. 첫 만남이었다. 


그는 유치원을 다니지 못했다. 유치원을 다니는 데에 필요한 것이 무언지를 알 수 없던 나이었기에, 너는 왜 유치원에 나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애는 나를 바라보지 않은 채로, 모래무덤에 넣어둔 자기 손을 바라보면서, 자기는 엄마 아빠가 없어서 못 다니는거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 애의 눈은 담담했다. 워낙에 오랜 이야기이기에, 기억이 재구성되는 것인지 어떤지 다 모르겠으나 그 아이의 눈빛만큼은 잘 기억해낼 수 있다. 가변으로 쭉 째진 눈 위로는, 지금에 떠올려보자면 응당 냉엄한 현실로부터 강제로 떠받은 위축들이 얹혀 있었으나, 동시에 지워낼 수 없는 장난기와 오기가 그의 눈 깊은 곳에 꾸준히 있었다. 


성현이와는 그때 이후로 줄곧 그 시간대, 그러니까 유치원을 마치고 난 후 집 건너편에서 만났다. 그가 나를 기다렸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모르겠다만 그를 거기서 꾸준히 만날 수 있었던 것만 기억난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서 그 장면 장면들이란 한동안 쭈욱 봄이었다는 것 정도만이, 늦봄이 가지는 아주 긴 파장의 봄볕이 곧 있을 더위를 미리 알려주려 속삭이려는 듯 우리 두 사람의 뒷목을 새살대던 것만이 떠오른다. 소실된 것일까. 그런 탓일지도 모르지, 우리가 나눈 아이다운 이야기들은 모조리 지워져 있고, 기억 속 우리는 아마 퍽 정다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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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간 마침내 성현이의 집에 가게 되었다. 그것이 초등학교 몇 학년 때였던지는 분명치 않다. 아직 그와 친했던 시절이니만큼,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으리라. 손길이 무디고 어딘가 눈에 띄게 더딘, 까아만 할머니 한 분이 앉은 자리를 마찬가지로 더듬거리며 일어나시더니마는, 손주 놈이 처음으로 데려온 친구를 맞기에 영 변변찮다시며 허둥대는 그 풍경이란 어린 가슴을 푹지근히, 깊이 질러들었다. 아프진 않았다. 그건 통각으로 치환되는 종류의 감정이 아니다. 보다는 빡빡하고 뻐적지근한 타르 덩어리가 가슴팍을 찐득이 저며대는 감각이거나, 어느 혼이 뻗어낸 손아귀가 명치 아래쪽 움푹한 곳을 쑥 허니 들어와서는 심장을 꽈악 움켜쥐는, 그런 감각을 닮았다. 


손윗 세대의, 그러니까 부모님의 흔적은 없었고 마찬가지 할머님의 피부색과 똑 닮은 방이 늙수구레허니 첫 손을 맞았다.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나는 미리 배우지 못했다. 아마 많은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말 없는 동정마저도 허투 흘려버려선 아니 되며, 쉬이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어서도 아니 되며, 자연스레 흘러넘치려는 연민의 몸짓은 바투 쥐어 다그쳐야 옳은 것. 그렇다고 하여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늠름하거나 당당하여서도 아니 되는 것. 이제 그 두 사람,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앓는 이와 도저한 부담을 떠안아 버린 이, 그 사이로 곧잘 맥없이 떨어지는 정다운 침묵을 차라리 최선의 것으로 여기며, 이미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게 형성되고 있는 어색함이나 멀어짐 따위의 것들이란 필연이었으며, 고로 기억 속에 단단히 소유하고 있는 내 잊힌 아픔을 꺼내어 담담한 눈빛을 지어 보일 동시에 장차 일어날 모든 관계의 변화들은 미리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편이 옳았으리라. 


이 어려운 것을 어린 내가 어떻게 알았으리오. 할머님의 끈질긴 탐색이 이어졌고, 어디 먹을 게 좀 없나 하시며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가슴 안에 불러일으키는 참지 못할 것을 겨우 내다간, 마침내 기쁨에 서두르시는 할머니께로 꿋꿋한 손을 뻗어 건네주신 구황작물을 뜯었다. 아직 그땐, 주는 이의 마음과 받는 이의 마음이 반드시 닮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에도, 오히려 넉넉한 웃음을 지어 화답해주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에도 어렸다. 당연한 송구스러움에 몸은 움찔거렸다. 내 마음이 이럴진대 그 아이의 마음은 오죽하였을까, 나는 가늠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곤 얼마잖아 집을 서두르듯이 빠져나와 그와 작별했다. 위로 같은 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들어, 차라리 어색하게 인사하곤 집으로 돌아왔다. 아마 그건 그의 영혼에 또 다른 생채기를 남겼을 것이다. 


나는 참 행복하거나, 장차 그렇게 여겨야 하겠구나, 그리 행복하지 않았음에도 그런 진심 어린 마음이 피어났다. 사람들이 모조리 불행하면, 개중 덜 불행한 것은 행복으로 치환된다. 그렇지 않은가. 너는 나보다 낫지 하는 어느 인간의 눈동자 안으로는, 섣불리 그려지는 나의 행복을 엿보곤 한다. 또래 아이들의 눈에 비친 우리 집과 정원은 봄빛에 노랗게만 피어나고 있었기에, 나는 기가 찬다지만 무어라 항거나 할 수 있었을까. 그래 내가 너보다 낫지, 그러나 여전 나는 행복한가. 내게도 매일 두려운 밤이 오고 아버지가 거칠게 몰고 들어오는 봉고차의 성난 엔진 소리에 잔털이 곤두서는 형벌 같은 시간이 길이 펼쳐져 있는데? 그럼에도 나는 내가 불행하노라 너희에게 이야기해보일 수도 없는 것이었으니, 애초 선택할 수 있는 오직의 것이란 침묵뿐이었음을 깨닫게 하는, 그런 긴 시간이 내 고장에 잔뜩 있었다. 


불행이란 낱말이 단순 아니 행복하다는 뜻이었다면, 참 진으로 행복함이란 아주 저편 피안 너머로 빼앗겨버린 이들에게, 불불행한 이에게 불행이란 곧 뺏들어서라도 가져보고 싶은 차악으로써 자칫 행복이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네 가진 빚 많은 정원이라도, 공포와 파괴의 상징인 아버지라도 가져보고 싶어지는 것으로, 쉬이 전락해버리는 것이 아니었을까. 적어도 행복이 무언지 모르는 아이들에게, 행복이란 단순 더 많이 가지는 것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불행한 이들아. 나는 그런 그대들이 강인한 심지, 혹은 오기로나마 굳센 마음을 가슴팍에 꽉 쥐고서 옳게 나아가려는 모습을 여태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명랑하려 애쓴다거나, 한없이 위축되는 마음 한편에 괜찮노라 자신을 애타게 다독이고 일으키려는, 그런 극적이고 동화적인 것이란 일찍이 단 한 건도 보지 못했다. 고로 수치와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스스로 핍박받고 위축되고 고로 한없이 도망치려는 마음만을 떠안는 그대들의 가슴 앞에 굳세어라 명할 수 없었다. 삶으로부터 모든 소망을 강제로 앗겨버린 그대들의 비어버린 의식의 대지 위에 배부른 자의 특권인 올바름을 논해볼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러겠는가. 어떻게 내가 방황이나 복수를 앓고 있는 그 정신을 차리고 올곧게 보라 말할 수가 있었겠는가. 차디찬 영하의 현실로부터 영혼에 꼬리 긴 생채기를 안아 버린 그대들에게, 감히 무언가를 원해보았으나 아무것도 가져보지 못해 영혼의 한 가지가 찢겨버린 그대들에게, 감히 권면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알겠다. 


누가 있어, 세상 그 얼마나 훌륭한 위인이 있어 그대들에게 올바르라 명할 수가 있겠는가. 올바름이란 참으로 별것 아닐지도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그 단 한마디의 말을 위한 자격을 갖춘 이란, 멀리서 빛나고 홀로 올곧은, 그런 훌륭한 이가 못 된다. 오직 제 몸을 불살라 그대들에게 아픔과 죄책감을 떠안기는 이, 그런 가장 높은 사랑의 흔적으로 마음을 구속시켜 버리는 끈질긴 이, 그 높은 사랑이 그대로 하여금 까닭을 알 수도, 당차게 합리화하거나 채 눈감아 피해버릴 수도 없는 그 죄스런 분노를 유발해버리고 또 그런 그대의 안에 불안토록 넘실거리는 이 분노가 당신을 떠나보낼까, 당신의 사랑을 꺼트려 버릴까 하는 커다란 두려움을 멍에처럼 드리우면서도, 끝끝내 그대 곁에 남아있음으로 하여 더욱 거대한 사랑이 현존한다는 사실을 몸소 깨닫게 할 이, 그대 스스로 올바른 이가 되도록 언제까지고 곁에서 타는 이뿐이다. 그때 그대의 영혼이 버거우되 끝내 도망치지 않겠노라 말한다면, 혹한 만큼 강렬한 또다른 감각으로, 불에 델 것 같은 뜨거운 감정으로 겨우 구원을 그려나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고로 미직저근한 낱말들만으로는 아예 미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틀렸다, 그것은 과하다, 지나치다, 엇나갔다, 요동치는 가슴과 불붙은 심장을 진정시키고 다시금 차분히 바라보라, 비로소 스스로 옳게 바라볼 수 있는 그 어느 때까지 계속해서 괴로우라, 번뇌하라, 누가 그대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할 자격을 갖추었는가. 애초 누가 있어 온갖 괴로운 감정에 사로잡힌 그대들의 심장에 이런 것들이 깃들도록 떠밀어 넣어볼 수나 있었을 것이며, 자꾸만 도망치려는 그대의 영혼을 바투 붙잡아 그 앞을 직시토록 강제할 수 있었겠는가. 내 가슴에 깊이 박여버린 사랑스러운 낙인은 그러므로 그녀가 나를 구원한 흔적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언제나 나를 이렇듯 옳으라 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로 명한 이가 누구이냐, 그것은 내 영혼밖에는 아무도 없다. 그것은 영혼에 생긴 또다른, 다만 뜨거운 생채기이다.


그날, 성현이의 집을 나선 이후의 인과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 헤진 기억의 필름을 이어붙여 보면, 다음 장면부터 성현이의 모습은 신나게 나를 괴롭히고 있는 얼굴뿐이 남지 않았다. 다른 초교 또래 아이들의 집안 형편과 사정도, 다 지나 알고 보니 크게 다르지 않았음에 언제선가 까닭도 모르게 나는 따돌림을 당했다. 나서서 나를 우롱하는 성현이의 웃는 얼굴과 세상에 대한 길 잃은 복수심을 눈 속 깊이 간직하고 있던 그 아이들이 기억나버렸다. 


그때가 기억난다.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그때 기억이 나. 수심을 알 수 없는 깊은 마음속으로 빠져 완전히 삼키어버렸다지만 언제나 적당히 조용한 시간 속에 앉아, 마음만 먹으면 삽시간에 길어올릴 수 있는 그 시절이. 지척의 인간들로부터 한없이 멀기만 하였고, 아무리 손 뻗으련 들 닿을 수가 없었던 긴 시간들, 애타게 바랬으나 누구 하나 가져보지도 못했으며, 차라리 울화를 목놓아 통탄하지도 못하고 침묵 속에 헤매던 시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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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부끄러움을 참지 못한다. 아주 오랫동안, 침묵 속에서 관찰한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는 것 같다. 누군가는 곧잘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나는 그것에 익숙하며 극복하였으며 심지어는 훌륭히 승리하였노라 말하실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대는 아실까. 그대의 영혼은 이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위하여, 즉 미리 대비하거나 신속히 대처하기 위하여 너무 많은 것들을 개발해버렸다는 사실마저? 살매, 단 한 번의 수치를 겪지 않은 이가 있을까. 그대는 기억하시라. 아마도 이 모든 것들이 개발되기 이전, 아마도 초교생 때에는 그대도 한 번쯤, 그래 한번쯤은 광장의 한복판에 발가벗겨지곤 무수한 눈길로부터 쏟아지는 가늠할 수 없는 공황을 겪어보았으리라. 


기억하시는가. 그때, 육신만큼이나 작은 마음의 앞에 내리꽂듯이 펼쳐져 버린, 지나치게 커다란 무대의 공간감과 그 앞 손 쓸 수 없는 공황의 감각을. 삽시간에 눈 앞 모든 것은 자그마해지고, 시야는 뿌옇게 흐리며, 식은땀이 흘러 스쳐 지나는 귓볼 가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모여 증폭되고, 교차하고, 서로 간섭하며 알아들을 수 없게끔 웅웅거리었다. 이것은 결코 극복하거나 상대하여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 열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내 작은 반에서도, 나의 영혼은 자주 발가벗겨졌다. "에-- 상덕이 옷 입고 온 것 보래요--"하는 메김소리와 "너네 엄마가 사준 옷이냐?" 하는 받는소리, 누군가 가벼이 던져버린 이 별 것 없는 낱말 묶음이 일으키는, 와- 하고 번져가는 웃음이 해일처럼 덮쳐오면, 나는 휩쓸려 광장에 섰다. 


부끄러움이란 어디서부터 불어오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대관절 무엇이었는지를, 나는 오래도록 생각해왔다. 왜냐하면 내가 그 부끄러움의 한가운데에 오래 표류해 있었기 때문일 테다. 오래 배기어선 한 시도 떠나지 않은 수치란 마음 속에서 절로 바다의 이미지가 되어, 나는 아무리 애타게 바란들 떠날 수 없었고 어느 날엔 차오르는 의지와 결연함으로 맞서 거슬러 노를 저어도 보았겠으나, 결국 한나절도 채 가지 못하는 구도의 감각이란 돌아온 자리에 오히려 그만큼의 좌절감과 낭패감만을 남기게 되다. 차라리 눈 감아 도망치고도 싶었지만, 한순간조차 잊어봄으로써 도망칠 수 없었다. 수치는 물론 그대들로부터 비롯되어, 그대들로부터 나의 마음으로 불어든 최초에 바람이었으나, 그 후로부터는 내 가슴 안에 있어 마치 저 홀로 의지를 가진 것마냥, 나와는 무관하듯이 서고 지는 까닭이다. 


수치란 바람과 같이 곁에 오랬다. 그리고 도망칠 수도 없었으니, 까닭인즉 그 감정이란 내 마음으로부터 뻗어나 이어져 있는 까만 실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어딜 비롯하여 어디에 가로놓여 있는지 나 모르겠으나, 영혼에 짙게 각인된 것은 지울 수도 잊을 수도 없는 것이 되는 따름이다. 사람의 영혼을 높고 울퉁불퉁한 모양의 암석이라 비유하자면, 그 깊은 곳에까지 불러 들어온 바람 중에 비수를 안고 있는 것들이 생채기를 내고 지나간다. 지나감은 잊힘이라, 그 모든 순간은 결국 잊히거나 하다못해 무뎌지는 것이련만, 그 순간들이 남긴 흔적만큼은 시간을 거슬러 또렷하게 남아 버리는 것이렸다. 영혼이란 마음과 그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를 아직 모르지만서도,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할 아무런 흔적도 없는 빈방과 빈 시간에마저 좇아서는 홀로 사람을 앓게 하는 것인즉, 영혼에 새겨버린 것들이란 계속해서 마음이 까만 실을 토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수치심은 공황감을 일어 내면을 혼탁하게 만들고, 그 어떤 사안에도 집중치 못하게끔 의식의 대지를 뒤집어엎는 강렬함이라지만, 그것도 결국에는 익숙해지는 수순을 밟는다.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차차 익숙해져 얼마간 굽어볼 수 있는 스스로를 대하여, 완전한 침묵 속에 묻힌 나는 이제 묻는다. 나의 부끄러움이란 어디에서 불어 들어 이리도 꾸준하고 끈질기고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느냐고.


잠깐 집중하면 그때, 초등학교 교실의 기억이 뿌옇게 피어난다. 황사가 일어나는 봄 언저리에, 누런 먼지를 머금은 햇발은 차창을 꾸역꾸역 넘어오고 있었다. 아직 시-스템 에어컨이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알지 못하던 때, 뜨뜻미지근하니 은근하게 내리쪼이는 햇발 아래 찬찬히 익어가며, 온 몸으로 시간을 견디던 시절. 나는 그때의 내가 느끼는 감정이 우울이란 것을 아직 학습하지 못해 이름자나마 붙여놓고 대하여 궁리해볼 수는 없었으나, 찐득하니 달라붙고는 아니 가려는, 질기고도 한없이 버거운 감정이라는 것 정도는 서서히 체득했다. 무리에서 외따로이 떨어져, 사방 사람의 지척에서 단단히 낙오된 때 느끼는 이것이 우울과 공황감이라는 사실을, 그 명칭을 성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아직 핸드폰과 MP3가 없던 시절, 곧 다가올 쉬는 시간은 무엇으로 버텨야 하는지에 대해 간절히 생각하게 만드는 마음과 사실 나를 치어다 보지도 않는 그들을 과히 생각하며, 그들의 눈에 비친 나의 초라한 점심시간을 그려보면 견디지 못할 듯 어지러워 터져버릴 것 같은 이 마음을. 그렇다면 참으로 긴 공황이 아니었는가 싶다. 


저번 화의 동우를 기억하시는가. 유치원 때 애진이의 볼에 기습적인 뽀뽀를 내리꽂았다는 그, 생애 처음 벗이자, 한동안 마지막 친구였던 동우. 4학년쯤이었지 아마. 동우가 전학을 가버리고 난 소란스러운 교실 한 귀퉁이에 앉아, 나는 드디어 말간 창문 바깥을 바라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창 뛰놀 때의 어린이에게, 아직 기능 저하가 오지 않은 괄팍한 심장의 소유자들에겐 창가 쪽 자리를 권해 바깥을 지긋이 바라보게 할 수가 좀체 없는 법이다. 그것은 달콤한 마시멜로로도, 담임 선생님의 흉흉한 기세로도 시켜낼 수 없는 것, 정말로 그것 말고는 할 수 없을 때 하는 수 없는 방식으로만이 일어날 수 있는 것. 그래서 근 8년간 함께 한 지긋지긋한 촌 동네의 아이들과 작별할 때에는 오히려 상쾌하기 그지없었으나, 그때 이후로도 생각보다 오랜 시간 창문 밖을 응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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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한번 끊어가야겠다. 무애 4번에서부터 너무 섣불리 뱉어버리곤 채 수습하지 못한 것들이 많아, 과연 글이 얼마나 늘어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래도 수확 있으니, 나는 이제 나의 과거를 이야기해볼 준비를 마친 것 같다. 이 글의 존재 의의이자, 모든 것의 시작일 나의 과거가 수줍게, 또 끈질기게 버티어보다간 이렇듯 어렵게 마련된 글의 뒷편에 슬며시 풀려나고자 한다. 읽기에 퍽 지루하고 지독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환희의 노래를 들려 드릴 차례가 오지 않았다. 쓰는 지금, 이 모든 지독한 것들은 다소간 극복되거나 스스로 화해했다. 이에 나의 지금을 곧바로 노래하고 싶지마는, 모든 것에는 수순이 있는 법이라, 또한 나의 손이 나의 의식을 따라가지 못해 아직 먼 뒷 편을 기다리고 있음이다. 그러나 장담컨대는, 이 끝에 환희를 들려드릴 터이다. 그것이 무슨 대수로운 것이겠냐마는, 묵묵히 지켜봐 주시길. 


근래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쓰는 모든 순간에 그대들을 생각한다. 그대들을 염두에 매달아둔 채로 글은 간다. 그러니 그대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대들은 내 글의 검수자이고 비판자이다. 이에 조급함도 든다마는, 왜냐하면 아직 모를 그대들은 내 눈에 너무 맑게 빛나는 사람들인지라, 그대들의 아픔과 밤을 모르는 입장으로서는 하루바삐 빛나는 무언가를 돌려 드리고 싶은 까닭이다. 그럼에도 천천히 한 발씩 갈 터이니 만약, 그대가 끝내 지리함을 이기지 못해 흥미를 잃곤 돌아가더라도 나는 모르게 하시길. 그러면 이 글이 끝에 다다를 언제까지고 나는 그대들을 생각하며, 염두에 매달아둔 채로 끈질기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도와주신다면 내 가장 잘하는 방식, 내 가진 유일한 재능을 밑천 삼아 끝을 보고야 말리라.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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