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수실로의 유년시절, 북하우스
0.0005.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숫자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이 미세한 값 하나가 모든 것을 바꾸기도 한다.
“일견 사소해 보이는 편법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한 시뮬레이션에서 연구자들은 계산을 간편하게 만들기 위해 입력값의 아주 작은 부분을 잘라냈다. 다시 실행한 시뮬레이션은 처음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시뮬레이션 결과가 크게 바뀐 원인은 그들이 잘라내 버렸던 부분, 즉 입력에서 누락된 아주 미소한 값인 0.0005에 있었다.” 처음에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작은 차이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오차는 증폭되었고, 마침내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카오스가 보여주는 세계의 한 모습이다. 초기 조건의 아주 작은 차이가 시간이 흐르면서 전혀 다른 궤적을 만들어내는 것. 반면 ‘창발(emergence)’은 조금 다른 현상을 가리킨다. 개별 요소 하나에서는 발견할 수 없던 성질이 수많은 요소의 상호작용 속에서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의 신경세포만 들여다봐서는 ‘생각’이나 ‘나’라는 존재를 발견할 수 없지만, 수백억 개의 신경세포가 연결되고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면 기억과 감정, 판단과 행동이 생겨난다.
데이비드 수실로의 『카오스의 가장자리』는 바로 이 두 개념 사이에서 한 인간의 생애를 바라본다.
2026년 국내에 출간된 이 책의 원제는 『Emergence』다. 책 역시 ‘무질서’, ‘카오스’, ‘질서’, ‘카오스의 가장자리’, ‘창발’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한 아이의 불안정한 유년이 어떻게 컴퓨터와 수학, 신경과학을 거쳐 한 연구자의 삶으로 이어졌는지를 과학의 언어와 함께 배치해놓았다.
수실로는 현재 메타 리얼리티 랩스에서 신경과학과 머신러닝을 연구하고 스탠퍼드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계산신경과학자다.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계산신경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구글 브레인에서도 연구했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신경세포들의 집단적 활동이 어떻게 계산과 행동을 만들어내는가에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오랫동안 ‘아주 작은 것들이 모여 어떻게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되는가’를 연구해온 사람이다.
그 질문은 연구실 바깥에서까지 이어진다. 그는 끊임없이 왜 자신이 지금의 자신이 되었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살아 있는 케이블과도 같은 860억 개의 신경세포가 서로를 향해 발화하면서 수많은 지각과 이해를 만들어낸다.”
“뇌 속 신경세포들 사이의 정교한 연결이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당신’을 만들어낸다.”
한 신경세포는 많게는 1만 개가 넘는 다른 신경세포의 신호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보면 ‘지금 이 순간의 나’는 단단하게 고정된 하나의 존재라기보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잡한 전기적 활동이 매 순간 만들어내는 결과에 가깝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이에도 뇌에서는 셀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난다.
지금 내 시각세포가 향하는 빛이 조금 달랐다면. 그 순간 누군가 말을 걸었다면. 갑자기 구름이 빛을 가렸다면. 길을 한 번 잘못 들었다면. 우연히 어떤 사람과 마주치거나 반대로 만나지 못했다면. 인간의 삶에는 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한 채 지나치는 미세한 변수들이 끊임없이 개입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차이를 만드는 원리를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다음에 무엇이 일어날지를 예측하는 일은 더 어려워진다. 변수의 수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끝없이 늘어날 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지금의 우리가 되었을까.
수실로의 삶은 이 질문을 극단적인 형태로 보여준다. 그는 1970년대 뉴멕시코 앨버커키에서 약물 중독에 빠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심각한 우울증과 중독 문제를 겪었고 부모의 돌봄은 불안정했다. 결국 수실로와 누나 에스터는 어린 나이에 보육시설로 보내진다. 그는 다섯 해를 앨버커키 크리스천 칠드런스 홈에서, 이후 또 다른 기숙학교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의 상당 부분을 가족이 아닌 수많은 아이들과 계속 교체되는 보호자들 사이에서 보낸 셈이다.
이 정보만 놓고 한 아이의 미래를 예측하라고 한다면 대부분 비관적인 답을 내놓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이 책의 표지를 마주하는 순간부터 그 예측이 빗나갔다는 사실을 먼저 알게 된다. 그 아이가 훗날 세계적인 신경과학자가 된다는 것을 알고 그의 유년을 펼쳐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불행은 자칫 영웅담이 되기 쉽다. 가난과 방임을 견디고, 보육시설에서 성장했지만, 타고난 지성과 노력으로 결국 성공했다는 이야기. 불행을 성공을 위한 연료로 만들고 고난을 극복의 증거로 바꾸는 서사는 익숙하다. 그러나 『카오스의 가장자리』가 다른 익숙한 이야기와 다르게 느껴지게 만드는 지점은, 과학의 언어를 덧붙임과 동시에 수실로 그가 이 간편한 인과관계를 경계한다는 데서 시작된다.
‘부서졌다’ 말하는 그의 유년에도 최악의 환경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부모의 방임 때문에 보육시설에 보내졌지만 바로 그곳에서 컴퓨터를 만났다. 혼란스러운 현실과 달리 컴퓨터에는 규칙이 있었다. 명령을 입력하면 명령대로 움직였고, 코드를 바꾸면 화면의 세계도 달라졌다. 그는 게임과 프로그래밍에 빠져들었다. 그곳에서 친구 오마르를 만나 대학이라는 미래를 처음 구체적으로 상상하기도 했다. 다시 한번 어른에게 실망하고,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시작하고, 공황발작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치료를 받고,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 한 번의 상승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삶이다. 실패와 회복, 질서와 혼란 사이를 오가는 진동에 더 가깝다. 실제로 그는 대학 시절 심각한 공황발작으로 학업을 중단했고, 오랜 정신분석 치료가 자신이 지금의 사람이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시간에 에스터가 있었다.
*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비슷한 혼란을 지나온 남매의 삶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에스터는 오히려 어린 나이부터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수실로보다 훨씬 빨리 인식했던 사람이었다. 수실로는 훗날 자신이 게임에 몰두하며 상황의 심각성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던 것이 오히려 하나의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같은 환경에 놓였다고 해서 같은 상처를 입는 것도, 같은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 모든 차이가 그의 성공에 관한 생각을 뒤흔들어 놓았다. 노력했기 때문에 성공했다면 같은 환경에 있던 사람의 실패는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강한 사람이 살아남은 것이라면 살아남지 못한 사람은 약했던 것인가. 수실로의 삶을 개인의 의지 하나로 설명하는 순간 우리는 그를 성공시킨 수많은 우연과 타인을 삭제하게 된다. 어린 시절 우연히 만난 컴퓨터, 친구와 나눈 대화, 장학제도, 자신을 받아준 친척, 연구자와의 만남, 정신분석 치료, 시대적으로 팽창하던 컴퓨터과학과 인공지능 연구까지. 그중 어느 하나가 달랐다면 그의 삶 역시 조금은 다른 경로를 택했을지 모른다.
우리는 흔히 성공한 사람이 자신의 성취를 작게 말할 때 ‘겸손하다’고 한다. 그러나 겸손이라는 말에는 여전히 한 사람의 성공이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소유라는 전제가 남아 있다. 자신이 이룬 거대한 업적을 스스로 낮춰 말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수실로가 바라보는 인간은 그보다 훨씬 작은 단위에서 시작한다. 세포와 신호, 환경과 관계, 우연과 시간. 지금 이 순간에도 분리되고 연결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수많은 요소가 한 사람의 궤적을 끊임없이 바꾼다. 그러므로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전적으로 나의 노력 덕분”이라는 문장도, 반대로 “내가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나의 실패 때문”이라는 문장도 이 책에 덧붙이기에는 어딘가 삐걱대는 느낌이었다.
의지는 분명 존재한다.
노력도 실제로 삶을 움직인다.
그러나 그것들은 전체 방정식이 아니라 수많은 변수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삶에 대한 질문에 꺼내 놓았던 대답은 이 복잡한 세계를 끊임없이 분석하고 들여다 본 결과를 최대치로 언어화한 문장이었다.
"끈기와 여러 행운 덕분이었죠."
*
이 책은 과학적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건 인간을 거대한 우주의 티끌처럼 바라보는 일만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시선을 끝없이 확대하는 일이기도 하다. 몸속의 세포와 세포 사이로, 신경의 발화와 미세한 전기신호로, 우리가 감지하지 못한 작은 자극과 우연으로 내려가는 것. 그곳까지 시야를 넓히고 나면 한 인간의 삶을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한다는 일이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시스템이 가지는 하나의 공통점은, 시간이었다. 아주 즐거웠던 게임도 끝나고, 가장 친했던 친구와의 시간도 끝난다. 영원히 자신의 일부일 것 같았던 가족과 헤어지고, 자신을 완전히 설명해 줄 것 같았던 일도 언젠가는 끝난다. 유년의 악몽은 성공했다고 사라지지 않고, 하나의 목표에 도착한다고 해서 인생이 질서정연한 상태에 고정되는 것도 아니다. 카오스는 극복해야 할 과거가 아니라 삶 속에서 계속해서 나타나는 상태다.
아마 그래서인지 우리는 한 번쯤 삶보다 죽음을 더 많이 의식하는 시기를 겪게 된다.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실이 갑자기 견딜 수 없이 크게 느껴지는 그런 날이 찾아온다. 지금 하고 있는 노력도, 애써 만들어온 관계도, 가까스로 붙잡은 행복도 언젠가 사라진다면 그 모든 시간이 허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 의지로 붙잡을 수 없이 흩어지는 것들을 바라보며 무력해지는 날도 있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이상할 만큼 생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날이 찾아온다. 햇빛이 내리고, 풀과 나무가 흔들리고, 새들이 날고, 물결이 쉬지 않고 밀려오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 짧은 생이 갑자기 기적처럼 느껴진다. 작은 생명들이 각자의 방향으로 분주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세계가 가득 차 보인다.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지금 이 시간을 살아볼 기회가 주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끝이 있다는 사실은 삶이 반드시 하나의 정답에 도달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어떤 날에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또 어떤 날에는 같은 세계가 견딜 수 없이 아름답게 보인다. 하지만 어느 감각도 영원하지 않다. 인간을 포함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계속 박동하기 때문이다. 질서에 머물렀다가 다시 혼란으로 밀려나고, 고립되었다가 연결되며, 분리되고 합쳐지고, 형태를 바꾸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박동하는 생명체로 살아가는 한, 삶은 매끄러운 직선이 될 수 없다. 성공과 실패를 차례로 겪은 뒤 안정된 결론에 도착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아주 작은 사건 하나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우리를 밀어내고, 서로 무관해 보였던 수많은 요소가 어느 순간 하나의 삶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선택하지만 선택하지 않은 것들의 영향도 받고, 다짐하지만 다짐만으로는 막을 수 없는 일들을 겪으며, 그렇게 계속 다른 모습의 자신으로 변한다.
그것이 창발이라면, ‘나’ 역시 완성된 존재라기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하나의 현상에 가까울 것이다. 운명. 수없이 작은 값들이 서로 부딪히고 증폭되며 매 순간 새롭게 계산해 내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결과. 크게 정해져 있는 것만 같기도 하고 자잘하게 계속해서 변하는 것 같기도 한, 예측할 수 없는 카오스의 가장자리 같은 것.
그 카오스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그렇게 계속해서 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