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탈진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 연극 '생각은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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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지난 20일, 극단 아리랑의 연극 '생각은 자유'를 관람했다. 본 리뷰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연극의 줄거리를 간략하게나마 소개하며 서문을 열고자 한다.
TV를 보던 세 남녀가 환호한다. 검사 출신 정치인 '구서광'이 지역구 의원에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선거 초기에는 소속 정당에 대한 부정적 여론 때문에 그의 당선 전망이 사실상 비관적이었다. 그러나, 혼수상태에 빠진 아내 '오사라'를 극진히 간호하는 구서광의 사진 한 장이 전세를 역전시킨다. 기자 '이우진'의 도움으로 인터뷰에서 '애처가'적 면모를 마음껏 표출한 그는, '가정적'이고 '불쌍한' 이미지를 등에 업고서 결국 당선이라는 쾌거를 이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당선 직후 오사라가 깨어나면서 구서광의 이미지와 등장인물들의 관계에 서서히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당선의 기쁨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이내 레몬홀딩스 펀드를 운영하던 기업인이자 구서광의 동생인 '구서환'이 주가조작 및 음주운전 의혹에 휩싸인다. 그러자 그로부터 선거 자금을 마련했던 구서광, 경제적으로 협력 관계에 있던 오사라의 언니 '오미라', 주가조작에 관여했던 이우진까지, 이들 모두 차곡차곡 쌓아 올린 부와 명예를 한순간에 잃을 위기에 처한다.
상황이 극에 달하자, 이들은 급기야 몸싸움까지 벌이며 앞다투어 발을 빼려는데, 그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다. 병실에 누워 있던 해리성 기억상실증의 '오사라'는 진짜 오사라가 아니었다. 사고 현장에서 오사라는 이미 죽었고 전신 화상을 입은 간호사가 병원으로 실려 왔다. 이때, 자신들의 범죄를 뒤집어씌울 희생양이 필요했던 오미라와 구서환이 간호사를 오사라로 꾸며 필요한 서류에 '오사라'의 싸인을 받아 둔 것이다.
이 황당한 사건의 결말은 공허하다. 흔한 권선징악의 레토릭과 달리, 이들의 비인륜적 악행은 심판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끝끝내 회복하지 못했던 간호사가 오사라의 이름으로 모든 혐의를 뒤집어쓴 채 병실에서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결국, 구서광, 구서환, 오미라, 이우진, 이 네 명이 원한 '깔끔한' 결말이다.
생각은 자유다, 탈진실의 시대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 이후, 옥스퍼드사전은 2016년 '올해 세계의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선정했다. 옥스퍼드사전 위원회에 따르면 탈진실이란, "객관적 사실이 공중의 의견을 형성하는데 개인적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보다 영향력을 덜 끼치는 환경"이다. 그런데 2016년으로부터 6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학자들은 여전히 현대를 탈진실의 시대라고 이야기한다.
탈진실은 무(無)진실과 동의어가 아니다. 즉, 탈진실의 시대가 도래했다 하여 진실 자체가 사라졌다고는 볼 수 없다. 그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뿐이다. 이제 진실인가 거짓인가 하는 문제는 대중의 관심사가 아니다.
구서광이 당선될 수 있던 건 오직 한 장의 사진 덕분이었다. 이 사진은, 부정적인 여론 속에서도 '구서광'의 자리에 '가정에 충실하면서도 힘든 상황을 이겨내는 따뜻한 남편'의 이미지를 대체해 넣었다. 이 이미지는 진실인가?
구서광은 주치의와 불륜 관계를 가졌고 애초부터 오사라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선거 시작 이후 심지어 당선 직후까지도 오사라의 병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기억을 잃은 오사라의 치료를 하루빨리 앞당겨 달라고 요청했다. 뜨겁게 사랑하지 않았다지만, 그렇다고 차가운 무심함으로 일관하지도 않았다. 이처럼 이미지는 진위와는 완전히 무관하며, 구서광의 정치적 권력은 진실이 아닌 이미지로부터 왔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미지를 양산하는 데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던 인물이 바로 메이저 언론사의 기자 이우진이었다는 점이다. 사진을 찍을 당시, 구서광은 정말로 오사라를 간호하고 있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권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구서광이 정말로 '가정에 충실하면서 힘든 상황을 이겨내는 따뜻한 남편'이었는가? '진실'은 알 수 없다(어쩌면, 알고 싶지도 않다). 언론은 '사실'만을 보도하며, '진실'은 저편에 침몰해 미궁 속에 빠질 뿐이다.
구서광이 주치의와의 관계를 끝냈을 때, 구서환은 그에게 진심이었는지 묻는다. 구서광은 대답한다. 진심이 어디 있느냐고. 어쩌면 그는 정말 몰랐을지도 모른다. 그조차도 진심이라는 게 무엇인지 더 이상 판단할 수 없이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탈진실의 시대, 진실도 진심도 이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와 함께 사회는 '정의'도 잃어버렸다. 정의는 즉 옳음이며 이 역시 진실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극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인물은 유튜버다. 그는 구서광과 구서환이 숨기는 내막을 파헤쳐 정의를 구현하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분노의 출처는 사실 정의라기보다는 '동학개미'들이 입은 경제적 손해다. 게다가 그는 방송에서 큼지막한 배너로 계좌번호를 띄우고 실시간 채팅으로 관대한 후원이 쏟아질 때마다 그 누구보다 기뻐한다. 유튜버의 관심사 역시 부의 축적으로 구서환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또한, 실제로 그가 정의를 '구현'하는 방식 역시 그다지 정의롭지 않았다. 그가 택한 방식이 오사라의 병실에 무단 침입 하거나 구서광과 주치의를 스토킹하는 불법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최선의 무리는 신념을 잃었고 최악의 인간들은 언제나 열정적이다. 그러나 이 연극은 찝찝함 속에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 누가 떳떳하게 이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당신은 이들과 얼마나 다른가?
그들이 정의롭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의도적으로 불의와 악을 추종하지도 않았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을 고군분투하게 만드는 동인은, 더 이상 거대한 진실과 정의가 아닌 부와 권력이다. 그 거대한 소용돌이 앞에서 선과 악은 그저 오래된 수사에 불과하다. 선한가, 혹은 악한가? 글쎄, 생각은 자유다.
'사라'가 '생각은 자유'가 되기까지
또 한 가지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 연극이 2021년 초연되었을 때와 현재의 제목이 다르다는 점이다. 처음에 '사라'였던 제목이 올해 공연에서는 '생각은 자유'로 수정된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달라진 건 제목뿐만이 아니었다.
병실에서 깨어난 그녀, 모두가 그녀를 사라라고 부른다. 자산운용사 미라 에셋의 상무이사이자 투자업계 인플루언서 '오사라'. 하지만 그녀의 기억은 희미하다. 그녀는 병실에 갇힌 채, 공천을 앞둔 정치인 남편 구서광, 펀드를 운영하는 시동생 구서환, 미라 에셋의 회장인 언니 미라를 만나며 서서히 기억을 찾아가고,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찾아가기 시작하는데...
위 인용문은 초연 당시의 시놉시스다. 여러 세부적 수정 사항을 차치하고, 가장 큰 변화는 '오사라'의 존재다. <생각은 자유>를 감상하면서, 조금 의아했던 점이 있었다. 그토록 '오사라'를 자주 언급하면서도 왜 오사라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가? 애초 오사라를 맡은 배우도 없으며, 극중 오사라의 존재는 늘 블라인드 너머에 누워 있는 환자로 암시될 뿐이었다.
<생각은 자유>에서 오사라는 일종의 '맥거핀'이다. 맥거핀이란, 히치콕 감독이 영화 <싸이코>에서 선보인 개념으로, 줄거리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마치 중요한 것처럼 위장해서 관객의 주의를 끄는 영화적 트릭이다. 처음 연극은 오사라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듯 보였지만, 점차 구서광과 주변 인물들이 얼마나 비인간적 행위를 말미암았는지가 줄거리의 중심을 차지한다. 그리하여 오사라의 존재는, 실상 그들의 '밑바닥' 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장치였을 뿐이다.
그러나 <사라>에서 오사라는 하나의 배역이었으며, 그를 맡았던 배우도 있다. 여기서 오사라는 <생각의 자유>에서와 달리,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자기 존재 이유를 찾아가는 능동적인 인물상으로 그려진다. 사실 이 정도 규모의 수정이라면 시즌2를 쓰거나 아예 새로운 작품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미 여러 관객이 다녀가면서 알려진 <사라>를, 이토록 대대적으로 수정해야만 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연극이 현실을 담는 창이라면, 그 현실이 너무나 크게 변했기 때문이 아니었을지 추측해 본다. 오사라는 세 번 죽었다. 극 중 화재 사고로 죽었고, '오사라'로 둔갑된 간호사도 죽었고, 배역으로서의 오사라도 죽었다. 그것은 진실의 죽음이자, 진심의 죽음이고, 정의의 죽음이며, 옳음의 죽음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권력 네트워크 아래 개인이 최소한의 능동성조차 발휘하지 못할 만큼 '최악의 무리'로 변모했을지 모른다. 탈진실의 시대, 거대한 구조 앞에서 개인은 그토록 무기력한 존재인가? <사라>가 <생각은 자유>가 되기까지, 그 수정의 함의를 어쩐지 알 것도 같아 더 씁쓸해졌다.
나가며
연극을 제대로 감상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실 연극이라고 하면 영화나 뮤지컬과 다르지 않다고 은연중에 생각해 왔지만, 이번 기회에 연극만의 매력을 톡톡히 느낄 수 있었다.
연극이 상연된 공간은 작고 협소한 소극장이었는데, 오히려 그 덕분에 극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배우와 관객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눈 마주치면 어떡하지?'라는 이상한 걱정까지 했을 정도로, 그만큼 배우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사실, 그날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 중 하나는, 커튼콜 때였다.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고개를 들어 올린 배우분의 표정에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한 미소가 띠어 있었는데, 그 감정이 내게도 전해졌는지 왠지 모르게 뭉클해졌다. 관객이 박수치고 환호하는 그 순간을 위해 80분, 그보다 더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했겠구나 싶었다.
연극으로 유명한 대학로, 여전히 극장은 많지만,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해졌다고 들었다. 사실 이 연극을 보러 갔을 때도 좌석의 절반이 비어 있어 아쉬웠다. 코로나 때문에 공연예술 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는데, 이 문화가 사라지지 않고 더 흥행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김채영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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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스튜핏
- 2022.12.30 11:3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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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이 작품을 인상깊게 읽었는데, 에디터님이 이전 작품과 비교한 부분이 너무 좋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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