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제 수영하는 법을 안다 - 소설 '급류' [도서/문학]

사랑이 부력이라면 중성 부력을 찾아 헤엄칠 거야
글 입력 2025.01.03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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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랑은 사고다



 

"사랑을 믿는다는 게 대체 뭔데. 변하지 않는다는 거야?"

 

"내 말은, 음...... 사랑이 무엇보다 큰 힘을 가졌다는 거야."

 

 

사랑 예찬론의 교리는 무책임하다. 사랑의 큰 힘을 믿으면서도, 정작 그 힘이 가져올 결과로부터 눈을 돌린 채 '그저 아름답다'는 감상으로 모든 해명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소설 <급류>는 그런 예찬론자들이 눈을 돌린 사랑의 이면을 조명한다.


저수지와 계곡으로 방학마다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 '진평'에서는 물과 관련된 안전사고도 끊일 날이 없다. 그런 진평의 든든한 구조대원 창석은 주인공인 도담의 아버지다. 한없이 따뜻하고 가정적이던 창석은 쉬는 날이면 도담의 '다이브 버디'로서 함께 수영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담은 수영 도중 물에 빠진 해솔을 발견하고 구하러 뛰어들고, 그날 이후부터 두 사람, 아니 네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창석과 도담, 해솔과 그의 어머니 미영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고, 끝끝내 창석과 미영은 적나라한 불륜 정황 속에서 사고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장면을 지켜봤던 도담과 해솔은, 가족을 잃었다는 슬픔과 사고에 대한 죄책감을 떠안은 채, 물에 빠진 듯 허우적대며 서로에게서 도망친다.


창석과 미영의 관계도 사랑이라면 사랑이었을까. 도담과 해솔은 사랑했기 때문에 더 큰 부채 의식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사랑이 큰 힘을 가졌다는 예찬론자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치자. 그러나, 큰 힘은 누군가를 수렁에서 들어 올려 구원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 누군가를 구렁텅이에 내동댕이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랑은 사고와도 같다. 도담과 해솔의 시간은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느리고 아프게 흘러간다.


'사랑은 다변적'이며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는 정대건 작가의 말처럼, <급류>는 사랑의 다양한 면모를 포착한다. 이 글에서는 소설 전반에서 드러나는 사랑의 여러 가지 모습에 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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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감수하려는 마음


 

먼저, 사랑은 감수하려는 마음이다.


같은 사고를 경험하고도 도담과 해솔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도담은 매 순간 더 큰 자극과 충동을 좇지만, 해솔은 엄격하게 통제된 생활에 몰두한다. 이 같은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그날 일에 대한 각자의 기억과 해석이 달랐기 때문이다.

 

도담에게 창석과 미영의 죽음은 '사고'였다. 와류에 휩쓸렸을 때뿐만이 아니라, 애초에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된 것부터가 사고의 발단이었다. 제아무리 수영에 능숙한 창석 같은 사람도 무력하게 만드는 급류, '휩쓸려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 도담에게는 사랑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랑에 '빠지지' 않고 '빠져나오려' 애쓰며, 오로지 가벼운 관계와 자극만을 추구했다.

 

반면에, 해솔에게 창석과 미영의 죽음은 '선택'이었다. 해솔이 도담에게 미처 말하지 못했던 한 가지, 창석과 미영이 그들을 붙잡고 있던 해솔이 함께 물살에 휩쓸릴 것을 우려해 일부러 손을 놓고 빨려 들어갔다는 사실은, 내내 해솔을 죄책감으로 괴롭힌다. 해솔은, 자신이 없었다면, 조금만 더 손아귀 힘이 셌다면, 아니 애초부터 그들에게 라이트를 비추지 않았더라면 손을 놓는 '최악의 선택지'는 없었을 거라며 자책한다. 그래서 해솔은 늘 '완벽한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상태로 자신을 통제한다. 성인이 되고서도 술은 입에 대지도 않고, 조금이라도 이성을 흐트러뜨리는 취미생활은 일체 멀리한다.

 

급류 앞에서, 도담은 자유의지를 믿지 않았고, 해솔은 선택의 힘을 과신했다. 그런 도담과 해솔이 지난한 세월을 겪으면서 '감수하려는 마음'으로서의 사랑을 깨닫는 과정이 애잔하다.

 

도담은 차차 물살에 휩쓸려 회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기로 결심한다. 해솔을 만난 뒤, 도담은 당시 교제하던 승주에게 모든 일을 털어놓기로 결심한다. 그는 '마음을 정확하게 알고 방향을 확실히 정'한 채, 자신이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 '선택'했음을 담담하게 설명한다. 이때, 도담은 비로소 거대한 힘 뒤에 미약한 선택과 용기가 있음을 느낀다.

 

해솔은 스스로를 통제한다고 믿었지만, 도담과의 관계에서는 정작 '맞서고 터뜨리지 못하는 겁쟁이'였다. 그런 해솔이 투신한 학생을 구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강물에 뛰어들고, 약사가 아닌 소방 구조대원으로서 불길 속으로 달려가길 선택할 때, 그제야 창석의 선택이 결코 '최악의 선택지'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누군가의 '완벽한 선택'은, 사랑을 위해 그 자신의 부상과 죽음도 감내하는 것임을. 


사랑은 무기력한 급류도 불완전한 선택도 아니었다. 다만 거센 물살에 휩쓸리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그래도 그저 좋은, '감수하려는 마음'이었다. 속절없이 빠져드는 무엇이지만 그 이전에 용기와 결심이 있었다. 창석과 미영이 해솔의 손을 놓았을 때처럼, 해솔이 동료를 구하고자 다 무너져가는 건물로 뛰어 들어갈 때처럼, 선화가 자신이 받을 상처에도 불구하고 다친 해솔 곁에 끝까지 남기로 선택했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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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살아가려는 마음


 

다음으로, 사랑은 살아가려는 마음이다.

 

소설 전반을 지배하는 이미지는 삶과 죽음이다. 특히, 반복되는 물과 불의 이미지는 사랑의 모습과 닮아 있다. 물과 불이 대개 반대의 성질이라고 여겨지는 데 반해, 저자가 두 메타포를 사용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상당히 유사하다.


우선, 물과 불은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특히, 화재로 건물을 집어삼키는 불길, 소용돌이치며 빨아들이는 물살과 같이, 사건 사고 혹은 재난과 관련된 경우 물과 불은 인간을 죽음으로 이끈다. 해솔이 불에 뛰어드는 모습이 꼭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듯 보였다는 도담의 말처럼, 물과 불은 잡을 수 없는 거대한 힘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은 집어삼켜지고 빨려 들어갈 뿐, 쉽사리 저항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물과 불은 생명의 탄생과도 연관된다. 해솔이 물에서 구한 학생은 그날이 자신의 '두 번째 생일'이라며 매년 문자를 보내온다. 또, 소방관이 된 해솔은 온몸을 불사르며 불길 속에서 어린아이를 구해낸다. 그리고 해솔의 이 모든 행동은, 그를 두 번이나 물에서 구해 주었던 창석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물과 불이 덮쳐오는 죽음의 문턱에서 구원된 이들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이처럼, 물과 불은 죽음의 위험과 탄생의 숭고함이라는 양면적인 이미지를 모두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물과 불로부터 건져 올려지는 모습은 출산을 연상케 한다. 작고 연약한 태아와 산모는 출산 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분투하며, 그 과정을 이겨낸 그들에게 새로운 삶이라는 기쁨과 아름다움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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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역시 그러하다. 사랑은 죽을 만큼 힘든 고비가 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인간을 살게 한다. 삶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며, 그 반복은 '환희'로 시작하지만 언제라도 기다렸다는 듯 '나쁜 쪽'으로 굴러가곤 한다. 그 '나쁜 쪽'은 극단적으로는 죽음을 뜻한다. 그러나, 반복되는 죽음과 삶의 굴레에서 인간이 삶을 택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사랑이다.

 

이는 해솔의 말과 행동을 통해 더욱 구체화된다. 상처 입은 해솔은 '시간이 빨리 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외치다가도, 할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시간이 아주 느리게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도담과 재회하고 나서는 '새해 인사를 60번은 더 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또한, 해솔은 오직 도담을 다시 만나겠다는 의지만으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매몰된 사고 현장에서 탈출해 생존한다. 이처럼, 사랑은 삶을 연장하고 확장한다.




경계의 사랑



 
나는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국어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의 충동을 쫓아 버렸다. (<무진기행>, 김승옥)
 

 

<무진기행>의 한 줄. 이옥섭 감독은 <급류>를 읽고 종일 사랑만 생각했다고 남겼다. 이토록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 또 있을까. 일부 클리셰적인 장면들, 유치하다고 느껴질 만큼 작위적인 둘의 만남,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상쇄하는 이 소설만의 매력적인 지점은 바로 거기 있다. 그토록 어색한 국어에 마음을 기울여 생각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사랑이 늘 부족하고 늘 사랑에 목마른 현대인을 위한 이야기다. 동시에, 글 자체가 마치 와류처럼 흡입력 있게 읽힌다는 점 역시 독자의 마음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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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은 상반되는 두 가지 성질을 모두 지닌다. 사랑은 죽음도 감수하려는 마음이고, 동시에 살아가려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얼마나 얇은 종잇장인지 떠올린다면, 이것들을 마냥 상반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소설 <급류>의 사랑은 경계의 사랑이다.


경계의 사랑은 예찬론자들의 사랑과는 다르다. 그 사랑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며, 언제나 아름답기만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창석, 미영, 도담, 해솔은 사랑을 통해 감수하고 또 살아가지만 동시에 상처입혔다. 그들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면 정미, 선화, 승주의 버림받은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특별하다는 선언이 바람과 불륜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이처럼, <급류>는 사랑을 낙관하지도, 비관하지도 않는다. 경계의 사랑은 그저 헤엄치는 방법을 가르칠 뿐이다. 때로는 그 사랑이 미약한 인간을 수렁으로 가라앉히기도, 또 한없이 들떠서 무책임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음성 부력과 양성 부력 사이에서 중성 부력의 상태를 찾아가는 건 사랑에 풍덩 빠진 개인의 몫이다. '뜨지도 가라앉지도 않는', '평온하고 자유로운' 무중력 상태의 중성 부력.


도담과 해솔은 이제 수영하는 법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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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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