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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삼매경>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에드워드 포인터,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1862) ㅣ 위키미디어커먼스
오르페우스 신화는 비극입니다.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찾아 지하 세계로 내려간 오르페우스에게 하데스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거는데, 지상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 것. 그러면 아내를 다시 살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보고 싶고, 캄캄한 어둠 속 아내가 자신을 뒤따라오는 것이 맞는지 의심하던 오르페우스는 지상으로 발을 내딛기 직전에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맙니다. 그 순간, 에우리디케는 지하 세계로 빨려 들어가고,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이별하게 됩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는 무수히 많은 신화와 설화, 이야기에 등장합니다. 오르페우스와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뒤를 돌아봐서 아내를 잃거나, 자신이 돌이나 소금 기둥으로 변해 버리는 비극을 맞지요. 이 금기를 어기지 않은 주인공으로는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치히로가 있습니다. 치히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되 뒤돌아보면 안 된다는 금기를 어기지 않아서 엄마 아빠를 구해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치히로가 뒤돌아보는 것은 그 긴 터널을 빠져나간 후의 일이었습니다.
연극 <삼매경>(국립극단, 연출 이철희)의 주인공인 ‘배우(배우 지춘성)’는 극락 앞에서 뒤를 돌아보는 인물입니다. 객석에 입장하면 자연환경을 형상화하는 배우들의 소리와 움직임, 무대 정중앙에서 가부좌를 튼 ‘동승’(어린 도념)의 모습이 관객을 맞이하는데, 본격적인 연극은 이들 앞에 나타난 초로의 배우가 동승을 뒤돌아보면서 시작됩니다. 함세덕의 동명 희곡을 무대화했던 1991년의 연극 <동승>(연우무대, 연출 박원근)을 소환한 <삼매경>은, 실제로 그 연극에서 주인공 ‘도념’ 역할을 맡았던 배우 지춘성을 중심으로 그가 현재 시점에서 1991년의 <동승>을 뒤돌아보는 메타적인 구조로 작품의 얼개를 꾸렸습니다.
그를 뒤돌아보게 만드는 것은 35년 전에 참여했던 <동승>에서 ‘도념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는 불확실성입니다. 당시에 주변에서 받았던 조언처럼 자신을 지우고 비워 내어 오롯한 도념으로 무대에 서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후회가 그를 평생 괴롭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생의 끝에서 '진짜 그 아이가 되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극락을 앞에 두고, 삼도천을 돌아가 다시 무대로 향합니다.
그가 도착한 무대는 그의 무의식 공간입니다.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일과 머릿속에서 산발적으로 떠오르는 일이 뒤엉키고, <동승>의 작중 상황과 도념이 되고 싶어 한 그의 마음, 그리고 관념적인 '도념'의 존재가 교차합니다. 그는 도념이 죽어야 자신의 괴로움도 끝난다는 생각에 이르러, <동승>을 패러디하며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도념을 자신이 연기하기로 하고, 무대에 난입하는 여러 도념들(<동승>의 원래 전개에 따라 움직이는 도념들)을 죽이지요. 이는 연극 <동승>에서 도념이 토끼를 죽이는 행동을 재전유한 것으로, 배우가 도념을 죽이는 것은 결국 도념이 되고자 했던 지난 세월의 자신을 죽이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원작 <동승>에서 주지 스님, 미망인의 모친 등이 토끼를 죽인 도념을 나무라던 대사들은 이 배우에게 '왜 자신을 죽였느냐'라는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자신을 질타하는 사람들에게 소리치며, 자신을 죽이고 작중 인물이 되고 싶었던 욕망은 직업적으로 타인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 배우의 소명이면서, 나를 내려놓는다는 점에서 해탈에 이르는 구도적 고행이었음을 깨닫지요. 그는 그제야 그 고행의 시간이 '삶에서 제일 빛나는 순간'이기도 했음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아름다운 미완성’에 안녕을 보내며 연극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됩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오르페우스 신화에서 “에우리디케를 한 번 더 잃은 뒤에 오르페우스가 (타인들에게나 그 자신에게나) 더 ’치명적인‘ 시인이 되었다는 사실, 게다가 그런 영향력은 그의 노래에 담겨 있는 ’감정적인‘ 설득력 때문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점을 짚으며 비극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에우리디케를 너무 사랑했기에 그를 한 번 더 죽일 수밖에 없었던 오르페우스의 ”상실“과 ”과실“이 ”회한“을 만들었고, 그것이 그의 음악, 즉 문학의 근본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봤다는 그 사실 자체만큼이나, 그가 뒤돌아본 것이 이후의 삶과 예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문학의, 예술의, 이야기의 측면에서 중요한 알레고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삼매경>의 배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도념'으로 대표되는, 자신이 완성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연극의 길을 뒤돌아보았습니다. 그가 뒤를 돌아봤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에게 어떻게 의미화되었는지일 것입니다. 삶의 끝자락에서 뒤를 돌아본 그는 깨닫습니다. 그에게 연극은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면서도, 살아 있도록 만들어 주는 존재였다는 것을요. 동시대적인 것이 무엇인지, 인간과 연극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온전히 작중 인물이 되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모습에서는 동시대에 대한, 인간에 대한, 연극에 대한 그의 애정이 묻어납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부족했던 것 같다는 불확실성과 완벽해지고 싶다는 열망으로 평생 괴로워했지만, 그 "사이", 즉 완벽하지 않음이 주는 가능성이 있었기에 자신의 여정이 아름다웠다고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마리안느도, 영화 <햄넷>의 윌도 사랑과 상실의 존재를 뒤돌아본 뒤에야 그것을 그림으로, 연극으로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했기에, 또 상실했기에, 그래서 뒤를 돌아보았기에 창조할 수 있었던 예술입니다. <삼매경>의 배우가 뒤를 돌아보고 도념을 다시 한번 연기하는 과정은 '연극 하는 삶의 미완성'을 연극으로 긍정하는 과정과 일치합니다. 이 작품은 대사를 통해 실제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을 여러 차례 호출하는데, 이는 배우에게 <삼매경>이라는 연극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남는다는 메타성을 보여 주기 위함이 아닐까 합니다. 마리안느의 회화처럼, 윌의 연극처럼, 작중 '배우'와 이를 연기하는 지춘성 배우에게는 연극 <삼매경>이 뒤를 돌아봄으로써 만들 수 있는 예술인 것이지요.
배우 지춘성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에 이 작품의 표면적인 목적어는 '연극 하는 삶'입니다. 하지만 관객 각자는 나를 뒤돌아보게 하고, 나를 살아 있게 한 그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기에 이 작품의 메시지는 보편적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뱀에게 뒤꿈치를 물리지 않고 유수와 같은 세월을 그저 흘러가면서 사는 삶보다는 나의 욕망, 부족함, 사랑을 뒤돌아보며 때로는 비극적으로 느끼고, 때로는 후회하는 삶이 더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배우들이 "Wake up!"이라고 외치며 뜬금없이 물웅덩이를 손으로 내리치는 모습은 우리 안에 고여 있는 그 무언가를 깨우는 의식처럼 느껴집니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구하려고 걷던 그 캄캄한 길이, 배우가 도념이 되기 위해 메우려 했던 그 "사이"가, 그리고 이들이 뒤돌아보고 느끼는 그 회한의 감정이 이야기가 되고, 연극이 되는 까닭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참고>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한겨레출판,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