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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내일은 꼭 ‘평온’ 추출에 성공하세요! [도서]

<감정거래소>, 평온은 특권이 되고 분노는 폐기되는 시대

by 오수민 에디터
2026.05.19 14:43

 

 

우울하거나 불안한 날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이 감정을 도려낼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슬픔은 무기력을 낳고, 초조함은 또 다른 불안을 증폭시킨다. 생산성과 효율이 중요해진 현대에는 불안과 방황이 미성숙한 결함처럼 취급된다. 우리는 이미 현실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을 안정된 상태로 유지하려 한다. 면접에서는 밝은 표정을 유지해야 하고, 서비스 노동자는 친절을 수행해야 하며, SNS 속 개인은 행복한 순간을 전시한다.

 

<감정거래소>는 이러한 현실을 “만약 감정에 실제 가격표가 붙는다면?”이라는 질문으로 확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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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정 작가의 소설 <감정거래소> 속 2062년에 감정은 화폐가 된다.

 

감정 추출 기술 ‘E-익스트랙션(E-Extraction)’이 상용화되며,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추출해 거래할 수 있다. 감정은 더 이상 추상적이거나 주관적인 경험이 아니다. 몇 g의 슬픔, 몇 g의 평온처럼 정량화되며, 시장 안에서 고기처럼 등급이 매겨진다. 감정은 더 이상 단순한 심리 상태가 아닌 하나의 자원이고, 생존 수단이며, 인간의 가치를 증명하는 척도가 된다.


<감정거래소>에서 가장 높은 A급 감정은 ‘평온’이다. 흔들리지 않는 차분함을 안정적으로 생성할 수 있는 사람은 부와 지위를 얻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사회 아래로 밀려난다. 타인은 추출된 감정을 구매해 상황에 따라 스스로에게 주입한다. 발표를 앞둔 상황에서는 ‘자신감’을, 영양제를 먹듯 ‘평온’을 구매한다. 이 세계의 감정 소비는 낯설지만, 어딘가 낯익다.


주인공 도윤은 이러한 세계의 맨 아래에 놓인 인물이다.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분노’밖에 생성하지 못한다. ‘평온’을 살 돈은 없고, 그의 몸이 끝내 만들어내는 것은 분노뿐이다. 평온 10g조차 제대로 생성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도윤은 값싼 감정을 팔아 하루하루를 버텨간다.


그러나 작품은 단순히 감정 등급 사회의 불평등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도윤이 발을 들이게 되는 ‘감정 폐기물 처리장’은 이 세계의 가장 기괴한 단면을 드러낸다. 사회가 원하지 않는 감정들, 가치 없다고 판정된 마음들이 그곳으로 밀려든다. 분노와 불안, 절망 같은 감정들은 폐기되고, 인간의 내면 역시 효율과 생산성의 기준 안에서 선별된다.


이 과정에서 도윤은 시스템 안에서 평생 ‘평온’을 생산해 온 존재, 한이수와 마주하게 된다. 한이수는 누구보다 안정적으로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감정을 끝없이 생산할 수 있는 인물이다. 분노밖에 생성하지 못하는 인간과 평온만 생산하도록 길러진 거래소 내부의 존재. 도윤에게 한이수는 가장 완벽한 인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지나치게 평온한 모습은 도윤에게 어딘가 기이하게 느껴진다.


이 구조를 유지하는 중심에는 감정을 학습한 AI ‘노바(NOVA)’가 존재한다. 노바는 인간의 감정을 분석하고 사회 전체의 균형을 관리한다. 수만 개의 감정을 처리하며 인간 사회를 관찰해 온 그는, 인간이 감정을 다루는 방식 자체에 의문을 품는다.

 

 

“사람들은 감정노동이니, 감정 쓰레기통이니 하면서 이미 어떤 감정들에 등급을 매겨왔잖아. 긍정적인 감정은 좋고, 부정적인 감정은 나쁘다고….”

노바의 목소리에는 냉소가 은근하게 배어 있었다.

 

- p. 219.

 


미디어샘의 소설 레이블 루프(LOOP)는 활자 너머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의 곡선을 탐색한다. 그중 ‘루프테일소설선’은 동시대의 감각과 사회적 질문을 장르적 상상력 안에 녹여낸다.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인 나희정 작가는 차가운 법과 논리의 세계를 지나오며, 끝내 규정되지 않는 인간의 감정을 기술과 결합된 미래 사회 속에 담아낸다.


<감정거래소>는 단순한 SF 디스토피아에 머무르지 않는다. 작품은 감정이 상품이 되는 순간, 인간 역시 거래 가능한 존재로 변해버리는 과정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정말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부정적인 감정일까.


인간은 슬픔 속에서 상실을 배우고, 분노를 통해 부당함을 깨닫기도 한다. 좌절은 때론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불안은 삶의 방향을 고민하게 만든다. 평온 역시 불안과 고통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인간이 오직 긍정적인 감정만 유지한 채 살아간다면, 그것은 과연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분노를 생성하는 인간, 평온을 생산하는 존재, 그리고 감정을 학습한 AI. <감정거래소>는 이 기묘한 대면을 통해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다움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서늘하게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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