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 모두 저마다 다른 언어를 구사하며 살아간다는 생각. 이것을 뭐든 부정적으로 내뱉는 사람의 말버릇으로 다시 쓰면, 우리 모두는 애초에 사용하는 언어부터가 다르기에 서로 이해하는 데 번번이 실패한다는 생각.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는 가장 보편적인 수단은 언어이다. 내가 직접 타인이 되어 볼 수 없는 만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은 서로의 생각과 가치관을 다듬은 언어를 통해서이다. 여기까지의 '언어'는 광의의 개념이다. 그러나, 한국어, English, 中国人등 협의의 '언어'가 다르다면 우리는 거의 유일하게 주어진 이해의 수단조차도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막말로 중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내가 제아무리 오랜 시간 중국인과 대화를 나눈다 한들, 그가 어떤 사람인지와 별개로 난 그를 이해하기는 고사하고 소통할 수조차 없을 테니까.
그런데 요즘은, 같은 한국어 화자라고 해도 서로의 가장 개인적인 언어를 이해하기 힘들고, 바로 그 때문에 몰이해가 발생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단어를 떠올린다고 할 때, 각자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이미지들이 있으리라. 바로 그 이미지의 일관성을 들여다보면, 단어의 사전적 정의 외에 개인이 그 개념을 정의하는 방식이 담겨 있다. 예컨대 가정폭력의 피해자 아동과 화목한 가정의 아동이 정의하는 '가족'은 발음과 철자만 같을 뿐이다. 이처럼 개인마다 단어에 대한 개념 정의가 너무나도 천차만별인지라, 우리가 같은 언어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도무지 동의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가장 직관적인 비유로,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인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야!"를 떠올려 볼 수 있겠다. 특히나 사랑과 같은 '뭐라고 콕 집어 정의하기 모호한' 개념에 있어서,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또한, 언어의 차이는 단순히 단어의 개념 정의뿐만이 아니라, 문장이나 맥락 등 담화 전반에 있어서 드러난다. 예를 들어, 나는 어릴 때 가장 처음 배운 영어 욕설을 (손 제스처를 곁들여) 친구들과 서로 마구 남발하곤 했는데, 영어권 화자가 이 광경을 봤다면 아마 깜짝 놀랐을 것 같다. 이와 유사하게, 타인에게 아무렇지 않을지라도 내게는 상처가 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아무렇지 않아 하는 상대방을 바라보며 언어의 차이를 느끼기도 한다. 사람마다 내뱉고 받아들이는 말의 뜻과 무게가 너무나 달라서, 종종 우리가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건 그저 착각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혹자는 앞서 서술한 예시들이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할지 모른다. 그건 언어의 차이가 아닌 삶의 차이라며. 그러나 언어와 삶을 분리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기란 쉽지 않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현대인이 언어를 통해 자기 존재의 고향을 확보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그의 철학이 반영된 말이다. 다만 여기서의 언어는 객관적이고 측량 가능한 '과학적 언어'가 아닌 주관적인 경험의 세계, 즉 '시적 언어'를 의미한다. 이 글에서 말하는 '언어' 역시도 하이데거의 시적 언어와 유사한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언어와 삶의 불가분성 때문에, 개인의 삶이 더욱더 다분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언어의 장벽'은 더욱더 커지고 있다.
'언어의 장벽'이라는 말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사실 통행을 막아서는 구조물은 '장벽' 말고도 여러 가지 존재한다. 울타리라던가 철망이라던가. 그럼에도 '장벽'이라 명명하는 이유는, 장벽이 다른 어떤 구조물보다도 큰 무력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울타리는 적어도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기라도 하지, 시야가 아예 차단된 장벽 앞에서는 넘어가려는 시도조차 무력해질 뿐이다. 이처럼 언어의 장벽은 이해와 대화를 시도하기에 앞서 사람을 한없이 작아지게 만든다.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외국인과 대화할 때처럼, 아무리 설명해 봤자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가슴께에서 뭔가가 턱 막혀버리는 것이다. 물론 이는 관점의 차이로, 가장 모범적인 해결책은 '우리의 언어가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에게 맞추어 나가자' 정도가 되겠다. 그러나 모범 답안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시험지에 써낼 수 없듯이, 이는 희망 사항일 뿐이다. 언어의 차이를 인정해야 하지만, 그걸 인정할 수 없는, 아니 일부러라도 인정하기 싫은 상황이 닥쳐오기 때문이다. 나와 가까운 사람이라면, 불가능할 것을 알면서도 나와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길 바라게 된다. 즉, 내 말과 행동을 상대도 당연히 이해하리라 여기며 나와 상대방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런 불가능을 바라면 바랄수록 서로 더 화가 나고 섭섭해지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그렇지만, 바라면 안된다, 욕심을 버려라, 하고 되뇌이더라도 결국은 바랄 수밖에 없다. 그 누구와도 언어를 공유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나를 아주 많이 외롭게 만드니까.
그렇다고 모두의 언어가 단 한 순간도 합치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함께 나눈 추억, 비슷한 삶, 공유된 대화를 통해 같은 언어를 구사하는 상황이, 실은 더 많을 것이다. 나는 그 반대의 상황, 갑작스럽게 들어선 언어의 장벽을 느끼고 외로워지는 순간을 '푸르죽죽한' 순간이라 부르기로 했다. 예컨대 영어권 화자에게 '파랗다'는 blue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만큼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푸르죽죽하다'는? '푸르딩딩하다'는? '푸르스름하다'는? 그 수많은 파랑의 변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언어가 다르니까. 도무지 이해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설명하기조차 포기해 버리는, 그 수많은 '푸르죽죽한' 감정들을 안고 살기가 버거워지는 순간이 있다.
그럼에도 '언어의 장벽'은 순기능 역시 가지고 있다. 하이데거 씨 말마따나, 언어가 존재를 의탁할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 나는 나와 타인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에 빚져 왔다. 그 사실을 인지할 때 만큼은 나 자신이 누구와도 '중복'되지 않고 유일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학창 시절에 '집'이라는 단어에 꽤나 몰두했다. 고향 집보다 기숙사와 고시원을 전전하며 보낸 시간이 더 길었던 내게, 집은 안정적이고 고정적인 무언가가 아닌 유동적이고 무형의 것이라고 느껴졌다. 이처럼 '집'에 대해 조금 특별한 정의를 내리며 살아왔는데, 이것이 가끔 날 힘들게 해도 내 존재의 필연적인 구성 요소가 되어 주었다. 물론, 이는 소거법에 근거하여 존재 의미를 찾으려던 어린 날의 집착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자기 고유의 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로 유약한 존재가 안식처를 얻을 수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또한, 존재와 관련된 순기능이 아니더라도, 나와 타인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그걸 '배울' 수 있다는 순기능도 존재한다. 아예 낯설기만 한 언어라면 당연히 듣자마자 숨이 막혀온다. 그렇지만, 한 번 그 언어를 배우기로 마음먹으면, 그 이후부터 느껴지는 모든 충격은 기분 좋은 성취감으로 탈바꿈된다. 예를 들어, 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대화하다 보면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관점을 접하는 유쾌한 충격을 받곤 한다. 또, 소중한 사람과 대화하고 추억을 쌓으면서 그의 언어를 학습하고, 이를 통해 그의 세계에 여행의 첫 발을 내딛는다. 이를 통해 처음에는 의아하기만 했던 낯선 언어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더불어 이해 가능한 범주를 넘어, 쌍둥이처럼 똑같은 순간에 똑같은 언어를 구사하고 그 사실이 너무 신기해서 와르르 웃음을 터뜨릴 때, 새삼스럽고 소소한 행복이 내려앉는다. 이 모든 순기능은 우리 모두의 언어가 다르다는 사실, 획일화되지 않았다는 축복에서 나온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언어의 정원>의 두 주인공 타카오와 유키노는 비오는 날마다 신주쿠 공원에서 만난다. 이들에게 그 공원은,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온 서로를 구원하는 장소이다. 타카오는 구두 장인의 꿈을 가지고 있지만, 그 누구에게도 응원받거나 심지어 털어놓지도 못한다. 유키노는 나쁜 소문으로 인해 질타를 받아 학교 교사라는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두 주인공 모두 세간에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딪혀 나간 자신만의 언어를 꽁꽁 껴안고, 상처만 간직한 채 살아왔던 것이다. 물론, 타카오와 유키노 역시 너무도 다른 삶을 살아 왔고 그만큼이나 다른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 오는 날 그 초록빛 공원에서의 소통과 교감, 즉 언어의 정원을 통해 그들은 서로 이해하고 진심을 전할 수 있었다.
이처럼 언어는 사람을 외로움의 골짜기로 무자비하게 떨어뜨리기도 구원하기도 한다. 언어의 장벽에 부딪힌 온갖 상처를 껴안고 언어의 정원에 도착하면,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에 머물던 누군가의 또다른 따뜻한 언어로 구원받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없이 푸르죽죽하고 푸르스름해질 때마다, 비 오는 날의 신주쿠 공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