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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


 

마이라 칼만의 그림 에세이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을 처음 받아 들었을 때, 제목을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인생에서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당장 눈으로 볼 수 있는 금전이나 물건도 사용하면 닳아 없어지는 마당에, 하물며 손에 잡히지도 않는 사랑이나 행복을 어떻게 가졌다고 말하겠는가. 오죽하면 인생은 전부 빌려 쓸 뿐이라는 잠언이 유행하는데, 이 역시 소유에 대한 희박한 감각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경험하는 이 모든 것들이 단순히 빌린 것이라면 매 순간이 너무 불확실하고 위태롭다는 생각에 왕왕 억울해진다. 거대한 불운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칠 때마다, 기왕 빌려줬으면 돌려주기 전까지 충분히 사용하도록 둘 것이지 왜 걸핏하면 뺏어 가려고 드는지 따지고 싶은 마음이다. 아니라면 최소한 반납 기한이 언제까지라고는 고지해 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갖는다는 말만큼이나 빌렸다는 표현이야말로 상도덕에 어긋난다는 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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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다는 뜻의 영어 표현으로 이 책의 원제는 'hold'를 쓴다는 점이 흥미롭다. 마이라 칼만은 제목뿐 아니라 모든 본문에서 동사 'hold'를 사용하고 있다. 가진다고 하면 대개 'have'를 떠올리지만, 'hold'와 'have' 사이에는 한국어 번역만으로 전하기 어려운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hold'의 사전적 의미. 가지다 외에도, 들다, 담다, 잡다, 붙들다, 유지하다, 견디다, 지탱하다, 수용하다, 감금하다, 장악하다, 버티다, 지속하다, 기다리다, 중단하다...... 어쩐지 무척이나 애쓰는 느낌이었다.

 

말하자면 'have'는 지속적 혹은 영구적인 소유를 드러내는 데 쓰인다. 반면 'hold'는 이미 가진 상태보다도 갖기 위해 애쓰는 동작을 연상시킨다. 잡는다던가, 붙든다던가. 'hold'를 통한 소유는 그러한 동작들이 없다면 사라질 수도 있기에, 'have'에 비하면 일시적인 상태이다. 또한, 이 소유는 태어날 때부터 쭉 지속된 상태라기보다는 노력해서 붙들어 놓은 결과이다. 따라서, 'hold'는 주체의 의도와 책임을 담은 행위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내가 인생에서 당최 뭘 'have'하고 'borrow' 했는지는 몰라도, 무엇을 'hold'하고 있는지는 알 것만 같다.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순간들을 붙들고, 행복해지고 싶어서 버티고, 어떤 상황에서도 꿈을 잃지 않기 위해 견딘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온 세상 여자들은 집과 가족, 아이들과 음식, 친구 관계, 일, 인간다워지는 일, 기억들, 근심거리와 슬픔과 환희, 그리고 사랑을 가지고(hold) 있다. 비록 영구적인 소유는 아닐지라도 그것들은 삶을 충만하면서도 동시에 한껏 시리게 만든다.

 

 

 

아몬드 꽃과 시시포스의 바위


 

단박에 시선을 사로잡은 그림이 있다. '거대한 바위를 안고 아몬드 꽃 사이를 걷는 내 꿈속의 여자(Women in my dream walking through almond blossoms holding a giant boulder)'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내 시선이 가장 먼저 가 닿은 부분은 하얀 눈송이 같은 아몬드 꽃잎들이었다. 그건 내가 사랑하는 카뮈의 산문집 <여름> 중 '아몬드나무들'이라는 제목의 장을 읽을 때 상상했던 아몬드 꽃과 완전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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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나무들'에서 카뮈는 기개의 힘을 통해 정신을 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장은 세상에 칼과 정신이라는 두 가지 권력이 있다면 결국 칼이 정신에 굴복하고 말 것이라는 나폴레옹과 퐁탄의 대화로 시작된다. 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으며 군홧발에 짓밟힌 유럽에서는, 칼 앞의 정신은 그저 무력할 뿐이라는 비관주의가 유행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카뮈는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종종 비극과 절망을 혼동하는데, 비극적인 세계를 살고 있음은 결코 부정할 수 없지만서도 결코 절망해서는 안 된다고. 또한, 전쟁은 인간의 모순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던 현실을 드러내지만, 우리는 적어도 모순을 거부하고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고 있다고. 그러기 위해 정신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정신을 구할 수 있는 건 '기개의 힘'이다.

 

그렇다면 카뮈가 말하는 기개란 무엇인가? 그 답은 알제리 레 콩쉴 계곡의 아몬드나무들에 있다. 차디찬 겨울을 견뎌 내고 단 하룻밤 만에 꽃을 피워 빗줄기와 해풍에 저항하고 끝끝내 열매를 맺어내는 아몬드나무들. '흰빛과 수액의 미덕으로 모든 해풍에 저항하는 기개의 힘'에.

 

또한 그림 속 여성을 보라. 바위를 든 모습이 꼭 시시포스를 연상케 한다. 다시 굴러떨어질 것임을 알면서도 끝이 예정된 형벌을 기꺼이 반복하는 시시포스. 부조리로부터 도망치기보다 직시하면서 그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그의 저항은, 바위를 집어 던질 때가 아닌 들고(hold) 있을 때 시작된다.

 

아몬드 꽃이 해풍을 버텨내듯이, 시시포스가 바위를 굴리듯이, 무언가를 가진다는(hold) 것도 실존적 저항과도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살면서 수도 없이 많은 것들을 붙잡으려 하지만 너무 자주 놓쳐 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삶은 때로는 원치 않는 고통까지도 견뎌내도록 강요한다. 의무, 책임, 비통함, 슬픔을 가지면서도, 정작 사랑과 이해는 갖지 못하는 삶도 있다. 결정적으로, 그 모든 것들을 붙들고 있기에는 삶은 찰나라서 허무할 정도다. 저자의 말마따나 충분한 시간은 결코 주어지지 않으며, 우리는 살아가지만, 그런 다음 죽는다. 죽은 뒤라면 그가 당최 무엇을 왜 가지고 있던 건지 누구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놓아 버릴 이유가 수천수만 가지 다분한데도, 마리아 칼만이 그려내는 책 속 여성들처럼 우리는 매 순간 무언가를 들고(hold)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힘든 일이며 결코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무게에 '기진맥진하고 낙담'하기도, 감정이 북받쳐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러나, 확실히 알고 있는 두 가지는 가진다는(hold) 것의 '근사함'과 '다음 순간이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시시포스는 다시 한번 돌을 굴리고 아몬드꽃은 하루 더 비바람을 견뎌낸다.

 

 

 

체리가 담긴 그릇을 그린다는 건


 

그렇다면 이런 삶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어쩌면 삶은 'have' 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hold' 하는 순간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언가를 진정으로 영원히 소유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hold'하는 삶은 불행할 수밖에 없는 걸까? 책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나온다. 세잔과 아내 오르탕스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의견이 다르고, 다투고, 부루퉁해지고, 침울해하고, 맥이 빠지고,

그런 뒤에 세잔은 체리 혹은 나무를 그리고, 오르탕스를 그리고

또 그린다고 생각하니 기운이 난다.

그리고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건 하루하루가 투쟁이고,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리가 담긴 그릇을 그린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내 친구(남자)가 말했다. 내 어휘집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삭제하면,

행복해질 거라고. 동의할 수 있을 듯하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다름 아닌 체리가 담긴 그릇을 그리기다. 혹은 나무를.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고 또 그리면 된다. 설령 영원히 갖지(have) 못하더라도, 들고, 담고, 붙들고, 잡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의 반짝임에 감응하기. 진부하지만 찰나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기. 붙잡고(hold) 있는 모든 순간을 붙잡기(hold).

 

마이라 칼만은 책의 마지막 장에서 짧은 응원의 말을 던진다. Hold on. 이 문장은 여러 의미로 읽힌다. 삶의 모든 것들을 계속 붙잡으세요, 붙잡는 모든 순간조차도 붙잡으세요, 그 과정이 지난하더라도 무너지지 마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어떤 의미이든 간에, 그가 전하는 행복의 응원을 어찌 아니 이해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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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며


 

마이라 칼만의 <우리가 인생에서 가진 것들(Women Holding Things)>은 마치 한 편의 전시회를 책으로 옮겨 온 듯한 신비한 체험을 제공한다. 따뜻한 분위기와 통통 튀는 색감의 그림들은 저마다 소중한 무언가를 들고 있는 인물들, 주로 여성의 모습을 그려낸다.

 

칼만은 말하지 않고 보여줌으로써 각자의 삶을 살아내는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격려를 전한다. 그는 긴 설교보다 때로는 짧은 스토리텔링이 더 큰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안다.

 

들고 있는 일상의 무게가 버거울 때마다 이 책을 펼쳐 볼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소장하기에도,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하기에도 사랑스러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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