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는 모두 부조리 인간이다 [영화]

글 입력 2021.07.0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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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부조리를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부조리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이치에 맞지 아니하거나 도리에 어긋남’을 뜻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부조리 인간’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철학적 측면에서 다시금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의 핵심 사상을 이루는 부조리란 ‘인생에서 그 의의를 발견할 가망이 없음을 이르는 말. 인간과 세계, 인생의 의의와 현대 생활과의 불합리한 관계를 나타내는 실존주의적 용어’를 일컫는다. 부조리의 감정은 곧 죽음에 대한 자각과 인간 실존에 대한 무상함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부조리는 필연적으로 죽음과 연결되며 인간은 자각하는 동시에 자신의 비극적 운명과 삶에 대해 사색하기 시작한다. 죽음 앞에서 한없이 나약하고 덧없는 존재이기에 우리는 종종 실존의 자각을 통해 극심한 무력감에 시달리기도 하며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기도 한다.


카뮈의 말처럼 부조리를 경험하고 나면 모든 것이 송두리째 흔들린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언제든 죽음이 닥칠 수 있다는 세상의 부조리함에 어처구니없이 부정된다. 그러나 날마다 우리를 조금씩 죽음으로 몰아가는 이 유한의 달리기 속에서 카뮈는 부조리가 인간의 숙명이라고 말한다. 이제는 삶의 의미가 (죽음 앞에서) 사실상 부재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잘 살아갈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앞서 말했듯,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경험하기에 ‘부조리 인간’은 끊임없이 ‘실존’에 관한 이유를 모색한다. 카뮈에 따르면 하나의 경험, 하나의 운명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것을 온전히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이라는 운명에 맞서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카뮈는 부조리한 삶에 대한 최선의 대책으로서 ‘반항’을 제시한다. 여기서 말하는 반항이란 인간 실존에 대한 불응이나 삶에 대한 거역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저항, 투쟁적 의미로서 세계의 모순을 살아 있는 의식 그대로 바라보며 정면으로 맞서 싸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부조리로 가득 찬 인간 삶에 대한 모순, 인간 존재의 무의미성을 책 『이방인』을 통해 그려내고 있으며 이러한 부조리와 절망에 맞서 끝내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함을 소설 『페스트』를 통해 역설하고 있다.

 

더불어 ‘부조리 3부작’의 방점을 찍는 작품이자 그의 실존주의 철학이 녹아 들어있는 에세이 『시지프 신화』에서는 부조리한 인간의 운명을, 신들로부터 저주를 받아 영원히 산 위로 거대한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그리스 신화 인물 시지프에 비유한다. 그러나 끝없는 고통의 굴레 속에서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의식하며 그것을 오롯이 감당해 내는 시지프의 반항으로부터 카뮈는 부조리에 맞선 인간의 역설적인 행복과 자유를 부각한다.


이런 점에서 영화 <디태치먼트>와 <애플>은 카뮈의 철학 사상과 긴밀히 맞닿아있다. 전자는 카뮈의 『이방인』을, 후자는 『페스트』를 전승하고 있으며 동시에 두 작품은 『시지프 신화』의 교훈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두 주인공은 모두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고독한 존재이자 깨어있는 의식을 지닌 '부조리 인간’이며 이들은 비합리성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합리성을 좇아 저마다의 방식으로 발버둥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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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디태치먼트>는 『이방인』의 다음 문장을 언급하며 막을 연다.


“And never have I felt so deeply at one and the same time,

so detached from myself and so present in the world.”

(지금까지 어느 것에서도 이러한 깊이를 느껴보지 못했고,

그와 동시에 나 자신으로부터도 격리되어 존재하는 느낌이다)


정교사로서의 안정적인 삶을 단념하고 기간제 교사로서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주인공 헨리 바스(애드리언 브로디)는 문제아가 수두룩한 학교에 배치된다. 앞선 카뮈의 인용구처럼 헨리는 스스로 격리되어 살아가는 위태로운 인물이기도 하다. 스스로 격리(detached from myself)되었다는 것은 곧 세상과의 격리(detached from the world)와도 필시 이어지며 이는 내면과 외면 모두에서 분리(detachment)를 겪는 그가 이 세계의 이방인임을 뜻한다.

 

이방인인 헨리의 삶은 늘 아슬아슬하다. 어머니에 대한 쓰린 기억과 살아 있는 어머니의 아버지, 즉 병에 걸린 할아버지의 존재는 헨리가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핵심 기저이며 이는 헨리의 육체와 정신을 끊임없이 옭아맨다. 헨리가 어딘가에 정착하는 삶 대신 부유하는 이방인으로서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기간제 교사의 삶을 선택한 것도 모두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불안정한 삶과 기억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어릴 적부터 가정에서조차 제대로 정착하지 못해온 삶은, 계속해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려는 그의 시도로 이어진다. 그는 스스로 세상과 격리하는 고독한 존재다.


그렇다면 영화 <애플>의 주인공 알리스(알리스 세트베탈리스)는 어떠한가. 그 역시 스스로 세상과 자신을 격리하는 존재이다. 단기 기억상실증이라는 원인 모를 유행병이 도시에 번지고 있는 상황을 묘사한 <애플>은, 조용한 해안 도시 오랑에서 발생한 전염병으로 무방비한 도시의 혼란을 그린 카뮈의 『페스트』와 그 결을 나란히 하며 나아가서는 코로나 팬데믹이 지속하고 있는 현대 사회와도 같은 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애플>의 주인공 알리스는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집을 나섰다가 버스 안에서 잠이 들어 종점까지 닿게 된 그는 목적지가 어디냐는 버스 기사의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 알리스는 기억 상실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으레 거치는 병원으로 이송된다. 그러나 같은 병실에서 함께 생활하던 이가 가족과 함께 떠나간 후에도 알리스를 찾는 이는 없다. 신분증이나 지갑도 없어 신원조차 불분명한 알리스는 결국 무연고 환자로 분류되고, 병원에서는 새로운 경험들로 기억을 복귀하는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을 제안한다.

 

병원 생활과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 과정에 걸쳐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기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거부할 수 없는, 아삭하고 달콤한 사과의 맛이다. 그렇지만 음식의 선호도는 물론이고 좋아하는 음악이나 영화, 춤, 혹은 간단한 수학적 계산조차 기억하지 못하는(이는 ‘안나’라는 인물을 통해 더욱 두드러진다) 기억상실증 환자들과 달리 알리스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자각한다. 그러니까 알리스가 실은 기억 상실에 ‘걸린 것’이 아니라 ‘걸리기로 선택한 것’임은 극이 진행될수록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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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곧 자신을 잃는다는 것과 같다. 삶의 무수한 경험을 통해 지금껏 쌓아온 추억들과 가치관, 신념, 인간관계를 비롯한 나의 일상 자체가 전부 무너진다는 뜻이니까. 다시 말해 기억상실증에 걸린 이들에게 기억의 상실은 곧 절망이며 ‘기억’은 기억되어야 하는 것 그 자체다. 그러나 과거의 아픔을 애써 머금은 채 이를 간직하고 살아가야 하는 알리스와 같은 이들에게 기억의 상실은 곧 구원이다.

 

기억을 되찾고 싶은 이들에게는 기억상실증이, 기억을 잊고 싶은 자에게는 되려 더욱 짙고 선명한 기억의 향수가 이리저리 혼재하는 상황 속에서 알리스가 유일하게 잊지 않는(굳이 잊고자 피하지 않는) 것은 사과이다. 그러나 알리스가 사과의 맛을 잊지 못하고 계속해서 찾는 행위는 결국 그가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함을 뜻하며 이로써 사과는 알리스의 기억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가 끊어지지 않도록 연결해주는 매개체다.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이들에게나 알리스 모두에게 새 출발을 의미하지만, 전자에게는 ‘기억 회복’의 의미로서, 후자에게는 ‘기억의 망각’을 위한 장치로서 애석하게도 서로의 방향을 향해 존재하고 작동한다. 알리스는 단지 과거의 슬픈 기억을 잊고 싶었을 뿐이다. 그 역시도 스스로 세상과 격리하는 고독한 존재다.


한편으로 <디태치먼트>에서 제자 메레디스가 헨리에게 건넨 ‘얼굴 없는 남자와 빈 교실’의 그림은 <애플>에서 나타나는 획일적인 인간 군상의 모습과도 겹쳐 보인다. <애플>의 기억상실증 환자들은 (자칫 정치적 의도나 세뇌 교육이 자행될 수 있는) 병원의 일률적인 지시에 따라 정해진 공간에서 매일 테이프를 들으며 모두가 엇비슷한 임무를 수행하고, 종종 병원 관계자들로부터 감시받기도 한다. 오로지 외관만이 다를 뿐 주체성을 가진 인간의 행동 양식이 철저하게 지배당하는 이들에게 얼굴은 서서히 지워진다. 사회가 지정한 패턴을 그저 수동적으로 따르는 현대인들의 공허와 허무만이 스크린 안팎의 공간을 가득 메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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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태치먼트>의 헨리와 <애플>의 알리스는 모두 과거의 아픈 기억을 머금고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과거에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었으며 모든 슬픔과 부조리의 감정을 홀로 짊어지며 살아가는 고독한 현대인들의 표상이다. 내면의 상처가 깊을수록 개인은 기억의 흔적을 타인에게 내보이려 하지 않으며 거듭 모순된 선택을 한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상실과 남겨진 고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는, 이 막막한 상황 속에서 겨우겨우 모든 것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두 주인공은 ‘부조리 인간’이다.

 

그렇다면 번민으로 가득한 고독 속에서 헨리는, 알리스는, 우리는 어떻게 계속 살아가야 하는가. 헨리와 알리스는 처음 ‘회피’의 방법을 택했다. 헨리는 임시 교사로서 부유하는 이방인의 삶을 택함과 동시에 자신에게 인간적인 관심을 보이는 제자 메레디스와 10대 매춘부 에리카를 끝내 밀어냄으로써 타인과 세상으로부터 회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같은 선상에서 알리스는 과거의 기억을 잊기 위해 기억 상실을 택함으로써 현실의 기억을 마주해야 하는(마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 자체를 회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도 말하듯, 우리는 회피가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둘은 사랑하는 이에 대한 과거의 상실을 넘어 가까이 알고 지내던 타인의 죽음을 실체적으로 경험함으로써 마침내 현실과 마주한다. 헨리는 제자의 자살로부터, 알리스는 아내가 해준 페이스트리가 먹고 싶다던 병실 환자의 죽음을 마주하며 상실과 부조리는 끝없는 것임을, 그럼에도 이를 딛고 일어서는 의지와 희망의 자세가 필요한 것임을 비로소 깨닫는다. 이로써 보호시설로 내몰았던 에리카를 다시 찾는 헨리와,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생활했을 것이라 추정되는) 예전 집으로 돌아가 다시 사과를 먹는 알리스의 모습은 부조리에 맞서 저항하고 비약하는 인간 실존의 사유를 일깨운다.


카뮈는 부조리가 결론이 아니라 출발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페스트』에서 전염병으로 고통받고 갈등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리지만, 결국 절망과 맞서는 길은 행복에 대한 의지임을 역설한다. 즉 아무리 현실이 잔혹하다 할지라도 희망을 놓지 않고 자신의 걸음을 이어나가는 것이야말로 이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진정한 ‘반항’이며 우리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것이다. 과거를 껴안고 살아가기로 다짐한 헨리와 알리스는 죽음이라는 비극적 운명 앞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현대인의 표상이며 곧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모두 ‘부조리 인간’인 것이다.

 

 

[윤아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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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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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보연
    •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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