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별을 노래하는 마음 [문학]

서시를 통해 읽어 들어가는 윤동주 시 세계와 "별"
글 입력 2020.04.2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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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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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잎새를 스치듯 건드리는 바람에도 그는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죽는 날까지, 아무도 없는 하늘 밑을

한 점의 부끄럼도 없이 걷기로 하는 마음.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자,

죽어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마음으로

화해를 모색하였다, 그는.

누구와의 화해인가 묻는다면,

다만 자기 자신밖엔 없을 것이다.

 

그것이 누군가 주신 ‘나’의 길일 것이고 말이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

잎새에 이는 부끄러운 바람에

저기 나의 별이 스치우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별을 노래하고 있는데 말이다.

 

오늘의 밤엔 이 부분을 조금 더 생각해야겠다.

나와는 다른 그의 참회록을 생각해보아야겠다.

 

결국, 죽음으로

이 불가능한 선언에 완결의 마침표를 찍은,

어떤 순결한 청년의 순례에 대해.

 

서시 序詩, 시작하는 시라는 뜻이다.

모든 것의 시작, 즉 그의 시 세계가 시작하는 곳이겠다.

오늘 밤 부끄러움과 별의 시인인 윤동주를 생각할 적에,

나는 역시 `서시`에서부터 그를 생각해 들어가야겠다.

 

 

 

나한테 주어진 길


 

 

 

- 윤동주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새로운 길

 

- 윤동주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두 갈래 길이 등장했다. 하나는 잃어버린 길이고, 다른 하나는 매일 반복되면서도 매일 새로운 길이다. 서로 다른 길일까? 그렇게 보일 것임을 잘 알겠으나, 글쎄. 나를 투사하여 다시 바라보면, 저것은 다만 하나의 길이 가지는 두 얼굴이라는 생각이 물씬 미친다.

 

어떻게 하나의 길에 저렇게 극명하게 상반되는 두 가지의 얼굴이 있을 수 있는가. 나는 다만, 각각 포착하고 있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다. 어땠든 둘 다 나의 장차 행보를, 미래를 향해 몸으로 몸으로 밀고 나아가는 스스로 삶을 지칭하고 있는 것임에 분명한 때문이다.

 

두 시 모두 길의 중간에 서 걸어온 내력을 뒤돌아보고, 또한 걸어갈 앞을 바라보고 있음에 같다. 하나의 원관념을 두 가지의 다른 표현으로 해낸 것이라면, 무엇으로 각 다른 표현이 섰는가를 나는 이제 그리어보기 시작한다. 그러자, 어떤 생각 하나가 고요히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그것이 사실인지 알 수 없으나, 반드시로 사실일 필요는 없다는 마음에 드디어, 그 작은 생각의 양 날갯죽지에 손을 밀어 넣고 들어 올려 확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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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담 저쪽의 나. 본 적도 없는 저편 길 위에 서 있는, 그러므로 본 적 없는 저쪽의 나. 그것은 지금 이편의 길을 걷는 유일한 이유이자 동력이었고, 그것은 언제인지도 모르게 잃어버린 나이다. 무어인지 언제인지도 모르게 잃어버린 ‘나’는, 어떤 낯을 하고 있을까. 이곳을 서 있는 ‘나’, 즉 현재적 자아로써는 헤아려 보기 어렵다. 나는 이편에 서서, 영원할 듯 이어진 돌담을 더듬으며 다만 부끄럽다.

 

과연 부끄러움의 시인 윤동주답다. 풀 한 포기 없는, 그러므로 어떤 즐거움과 위안도 없는 이 길을, 그럼에도 걸어야 하는 까닭은 저 너머에 내 찾아야만 하는 것, 잃어버린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따금 부끄러움을 안고서도 한동안 쭈욱 쓰라릴 이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라면, 저편에 이윽고 닿았을 때엔 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일까. 알 수 없다. 시인도 아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부끄럽다는 것, 그것이 저 길을 걸어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가 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수도하는 이의 마음가짐일 것이고 말이다.

 

저편의 ‘나’는 그러므로 닿지 못한 미래적인 자아, 또한 내가 반드시 닿아야만 마땅한 목표로서의 자아일지도 모르겠다. 부끄러움의 시인인 윤동주는, 이렇듯 자기고백과 성찰로 시를 써 나아가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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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새로운 길’에서의 길은 반복되고 있다. 꼭 같은 길이지만, 그 길 위를 걸어가는 매일이 각 다르고 그 위의 내가 또한 매일 각 다르다면, 늘 새운 것이라는 인식이 엿보인다. 어제도 오늘도 가는 이 길은, 사실 매일 새로운 길. 오늘도… 그렇게 언제까지의 내일에도 걸어가고 있을 이 길은, 그러므로 영원히 새로운 길. 내를 건너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꼭 같이 반복되는 저 한적한 전원의 길은, 그러나 숨기어 드러나지 않은 채 매일 낯을 달리하는 새로운 길. 매일 새로운 내 생의, 혹은 생으로의 여정. 이는 참 의지적이다.

 

현실의 길 위에다가 생의 여정, 그 비유인 길을 겹치어 놓고 있다. 거기, 오늘도 내가 즈려 밟고 지나온 이 벽돌 길이 변했을 리 만무하지만, 그 길 위를 걷고 있는 내가 변한 것이라면, 길은 새롭다?


생의 여정이 한 발 나아간 것이라 하는 편이 옳겠다. 미약한 한 발을 뵈지 않는 생의 여로 위에 뻗어낸 나는 그렇다면 어제와 얼마간 다르겠느냐만, 어제와 꼭 같다고 할 수 있는가. 티끌만큼 나아간 내가 여기 흙 묻은 벽돌을 또 지난다. 그렇게 어제도 오늘도, 그런 식으로 오늘은 또 내일로. 이 모든 것이 의지가 아니고 무얼까.

 

‘길’은 자조적이고 ‘새로운 길’은 희망적이다. 같은 길을 두고 이리 다른 감상을 가질 수 있는가? 나로서는 정말 그럴 수 있다고 말하게 된다. 나의 생애를 두고 스스로 생각할 적에, 각 밤마다 내 안에 떠오르는 심경은 너무도 다르지 않았던가. 가끔은 희망에 차기도, 또 어떤 때엔 회의와 공허와 미지에의 두려움으로 쓸쓸하기도 하는 이 일이란, 정말 흔들리는 우리들의 모습일 것이다.

 

‘길’은 자조적이되 그를 오히려 거절하면서 극복인 의지, 생을 걸어낼 의지를 선보이고 있다. 수도자의 마음일까.

 

‘새로운 길’은 그와는 결을 달리하며, 어제도 오늘도 걸어낸 매일이 새로운 이 길을, 오늘에서 내일로, 그래서 내일이 오늘이 되어 또 영원한 내일로 걸어가겠다는 희망찬 의지를 비치고 있다.

 

둘 다, 내가 걸어내야 할 나의 생애, 그에 대한 스스로 의지를 잘 보이고 있었다. 매일이 새로운 나의 사랑스러운 길, 그리고 가끔 자조적이고 체념의 생각이 들지언정, 결코 멈출 수가 없어 걸어 걸어내야만 하는 구도의 길. 걷는 까닭이, 다만 잃어버린 것을 찾음에 있었던 때문이다.

 

어려운 길을 품은 이의 마음이다. 완결되어 변치 않는 의지가 우리에게 없다면, 흔들림이란 당연하겠지. 오늘은 의지적이고, 또 내일은 조금은 지치어 회의적인 마음의 순환이란 곧 인간됨을 반증한다고, 나는 건방지게도 생각한다. 그리고 그럼에도, 걸어갈 것이라는 사실만이 저기에 변함없다.

 

 

내 의지로 걸어낼 이 길.

그러나 시인께는

누군가 내게 주신 길, `내게 주어진 길`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


 

워낙 유명한 구절인, `잎새에 이는 바람`이다. 아무리 미약한 바람인들 나는 홀로 괴로웠다는, 섬세하고 양심적인 화자의 모습이 금방 어른거리는 이 구절. 아무래도 그런 시인이었기에 동주는 사랑받지 않았을까 한다. 그리고, 정말로 그는 그런 시인이었기에 그의 시 세계 줄곧 내내 아름다운 것들이 쓰인 것일 터이고 말이다.

 

 

바람이 불어

 

- 윤동주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바람은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인가. 흔한 질문이다. 그것은 2연에서 괴로움과 엮인다. 바람에 대한 질문에다가, 괴로움을 섞어 넣는다. 둘 다, 어디에서 연유해 어디로 가고 마는지를, 우리가 좀체 알 수 없기 때문이겠다.

 

바람은 이리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곧잘 읽히지 않는다. 일단 편의상, 바람과 괴로움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여 보면 비로소 말이 통한다. 바람이 이렇듯 부는데, 그 바람에 이유가 없는지는 나 모른다. 다만, 그 바람에 연상된 나의 것인 괴로움, 그것은 이렇게 불어대는데도 이유가 없다. 잘 아니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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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정말 그 이유가 없는 것이었을까. 잘 아니 보인 것에 지나지 않음을, 곧 떠올린다. 까닭없는 일렁임과 생성, 운동이 없다면, 저기 바람에도 시원인 나비가 있음에, 다만 뵈지 않는 것임을 곧 떠올리는 보편적인 일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게끔 된다. 그 막연한 이유의 공란에 무엇을 끼워 넣을 수 있는지를 궁금해하며, 여태의 생을 반추해본다.

 

`단 한 명의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고,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후자의 경우는 이해가 쉬우나, 전자는 잘 모르겠다. 그 여성에다가 다른 무언가를 끌어대기에는 시 안에 근거가 적은 탓이다. 정말 뜻 그대로 여성이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어떠한 전처로 괴로움이 될 수 있을지를, 글쎄, 아직 내 삶으로는 그려낼 수 없다.

 

그가 스스로 괴로움에 대해 질문할 적에, 그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 여태 삶을 반추해보듯, 나 또한 그를 이해하는 지금에, 저 까닭의 공란에 내 삶을 반추해 끼워 맞추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나 이해할 수 있는 따름이다. 여담이지만, 시 읽는 일이 그래서 내게는 참 즐거운 일이다.

 

여인을 사랑하는 일이 범박하고 통속적인 삶을 지칭하는 것일지, 시인이 영감을 얻는 어떤 아름다운 일일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각각으로 설정했을 때 각각의 다른 의미가 생성된다. 여인과의 사랑과 괴로움, 그것의 실 낯이 무엇이었건 간에, `시대`의 앞에서 침묵하였다는 저 진술만으로도, 이 화자의 괴로움이란 다시 한 번 부끄러움에 닿아있음을, 쉬이 떠올릴 수가 있다.

 

바람이 부는데, 나는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부는 것과 서 있음, 흐름과 서 있음이 대비되고 있다. 움직임과 정지함의 대비. 저렇게 내 앞을 흐르는데도 나는 여기 서 있다는 사실이, 모종 괴로움을 낳는다. 아마 부끄러운 탓이다.

 

바람은 여기서 명백히, 흐르는 것이 되어 있다. 앞서 나는 바람을 괴로움으로 단순히 치환하지 않았던가. 아아, 바람은 괴로움의 다른 얼굴이 아니라, 괴로움을 이는 것이었구나. 저기 바람이 이렇게 부는데, 그래서 내 괴로움이 이렇듯 상기되는데, 그 까닭이 없다. 뵈지 않은 따름이다. 그런데 바람은 계속 불고, 나는 이내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일이었구나.

 

바람은 계속해 움직이는 것으로, 정처한 나의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상기시키는 매개였구나. 아아. 잎새에 이는 바람도 그렇다면, 마찬가지일지 모르겠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자화상

 

-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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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가을, 달 등 핵심 시어들이 잔뜩 들어있는 시 하나가 있다. 그의 시어는 원체 순수하고 명료해 파악이 어렵지 않다만 오늘따라 왜인지, 윤동주를 읽고 싶은 오늘 같은 밤에는 괜스레 이 시를 다시 보게 되는 일이 있다.

 

여기, 화자의 증오와 연민의 대상인 한 사나이는 참 유명한 이이다. 그것이 동주의 자화상임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제목에서부터 이미 명백히 선언된 바이기 때문이다. 그는 저어기 산모퉁이를 돌아들면 있는 논가의 외딴 우물 속에 있다. 머언 곳에 둔 자화상, 사실 거기에서나 겨우 마주할 수가 있었던 자기 초상이겠다. 부끄러운 탓이고, 미운 탓이다. 즉, 미루어둔 스스로이다.

 

그를 만나는 곳은 저기 논가의 외딴 우물, 아주 먼 곳이다. 그 안에는 달과 구름과 하늘과 파란 바람과 가을이 같이 있다. 이것이 무엇일까. 동주를 떠올리는, 아니 동주가 떠오르는 이런 밤이면, 저 우물 안의 달과 그 곁을 흐르는 구름이 무엇인지를 괜스레 궁금해하는 일이 생긴다.

 

달이 밝은 때에, 흐르는 구름을 본 일이 내겐 얼마나 있었던가. 아마 구름이 충분히 이곳 지상에 가깝고, 그를 비추는 달이 더없이 밝으며, 주변 인가의 불빛마저 적을 때, 그런 때에나 보이던 밤 중의 구름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러나, 저 어두운 안에는 또한 하늘과 파아란 바람도 있었으니, 화자의 시간, 그러니까 우물을 바라보는 시간은 어느 밤 중 잠깐 혹은 그 밤의 고정적인 시간이 아닌, 순환하는 하루하루가 되겠다. 달 떠있는 때에도 구름이 있고, 또한 그 모든 것을 감싸는 바다인 하늘이 있지만, 아무래도 그 안에 파아란 바람은 없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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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시어들, 동주의 시 세계에서 자주 포착되는 이 자연물 시어들은 각각 무엇 특별한 것을 지칭하거나 함의하고 있는 것일까. 글쎄, 적어도 이 시 안에서는 딱히 다른 것이 포착되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의 구성물이고, 그 친숙한 자연이며 `순환하는 매일의 표지`이다. 어제에서 오늘, 그리고 아마 내일과 그 내일에까지 이어질 순환하는 매일. 그러고 보면 `새로운 길`이 연상되는 부분이다.

 

저 자연물들은 우물이라는 좁은 프레임 속에서도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 안에서도 `달은 밝고 구름은 흐르고 하늘이 너르게 펼치며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서는구나. 즉, 저곳은 세계이다. 이격된 곳이자 감금되고 구속된 곳이 아닌, 사실 세계이다.

 

동주가 부끄러워 밀쳐둔 자아를 좁은 프레임인 우물에 가두고, 그 외딴곳의 자아를 이따금씩 만 보러 돌아오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세계가 있다. 아마 그는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멀고 좁은 그곳에 가둔 자화상은, 사실 이곳에 나와 함께 있음을. 내 걷는 이 길 위의 것들이, 그 우물 안에도 함께 있음이란.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상상이다. 부끄러움의 시인인 동주는, 부끄러운 스스로 모습, 자아의 단편을 괴로워하지만 이내 지울 수는 없겠다. 스스로는 그 자아를 잊고자 하거나, 잊을 수 없으면 밀어내거나 애를 쓰겠지만, 어땠든 그 나는 언제나 이 나와 함께 `길`을 걷고 있을 일이다.

 

동주는 우물을 오래도록 치어다 보고 있다. 달이 뜬 아닌 밤중, 그 먼 곳을 잠깐 다녀오고 이내 돌아오는 일이 아닌, 달이 뜨고 구름이 흘러가고 하늘이 펼치고, 그래 `다시 펼치고` 즉 검은 바다인 하늘이 밤을 지낸 후 다시 창공으로 펼치고, 그 위로 파아란 바람이 부는 시간까지도 계속 치어다보는 일이다.

 

이쯤 되면 부끄러운 자아의 유배와 밀어냄이란 사실, 본인의 부끄러움을 표상하는 심정에 불과하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그는, 여기에 있다. 부끄러워 밀어낸 그 자아가, 추억처럼 거길 서서 날 기다린다. 계속, 마지막 마주 보던 모습 그대로 오똑 서서, 날 바란다. 그를 잊어버리고 있다가 문득 부끄러움으로 다시 보면 언제나, 그 부끄러운 나는 이편 내 의식을 향하던 몸태 그대로 오롯이 응시하고 있었겠다.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겠다.


 

별 헤는 밤

 

-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란시스 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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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시의 절정인 `별헤는 밤`에 드디어 도착했다. 예전 필자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피니언에서 언급했듯, 모두의 한컴 타자연습을 책임졌던 그 시, 가히 국민시라고 불러도 괜찮을 법한 그 시다.

 

이 시의 안에도 벌써 시간은 흐르고 있다. 하늘 위로는 계절이 지나가고 또 지나와 지금, 가을로 가득 차 있다고 하지 않는가. 가을이 이 시와 시인에게 어떤 특정한 의미를 가지는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부는` 때를 함께하던 가을이, 다만 여기에도 있음을 본다. 시인에게 가을은 가장 시상이 돋는 시기인, `시의 계절`인 것일까. 저 모든 자연물, 달과 구름과 하늘과 바람이 가장 왕성하면서도 아름다운 시기인 것일까.

 

시인은 아무런 걱정도 없이 이 별들을 다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럴 수 있을 리 없고, 그럴 리도 없다. 바로 다음 연에서 고백하지 않는가. 다 헤지 못 하였다고. 다만 그 까닭이란, 아침이 너무 쉬이 오는 탓이다. 그러나 참 재미있는 것은, 까닭이 그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내일 밤이 남은 것이, 내 오늘 저 별을 다 헤지 못 하는 하나의 까닭이라는 것. 더 나아가서는, 아직 청춘이 남은 것이 그 까닭이라고 진술한다. 내일의 밤과 내 청춘의 내내 동안에는, 헤아릴 별을 남기고 싶어 함일까.

 

이 부분에서 진술이 아주 부드럽게 얽히었다. 저 별을 다 헤아릴 `듯`한 나의 마음, 그것은 분명 심정이다. `바닷물도 다 마셔버릴 듯 한 갈증`과 같이, 그냥 심정이다. 그런 심정과는 별개로 저 가을 별은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내가 언제까지고 여기에 앉아 별을 세고자 한들, 아침이 쉬이 찾아오는 까닭이다.

 

여기까지는 사실적 진술, 그리고 곧이어서 환상적 진술이 자리한다. 내가 이 별을 다 헤아리지 못 `하는` 까닭은, 내일 밤이 남았고 내 청춘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말. 전부 헤아리면, 내일 밤에 헤아릴 별이 없기 때문이고, 내 남은 청춘 동안 헤아릴 별이 없기 때문이라는. `못 한` 까닭과 `못 하는` 까닭은 어감이 조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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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별들은 추억이고 사랑이고 쓸쓸함, 고독이며 동경과 `시`와 어머니, 그리고 아름다운 말들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시는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고독, 즉 어머니에 대한 나의 마음 됨과 그것이 피워올리는 아름다운 말들이다.

 

그것들, 고운 아름다움의 총체들은 시이고 또 별이다. 시의 소재인 이것들은, 여기에선 너무 멀어 시인의 마음에 별로 화한다. 멀리 있는 아름다운 것들은 닿질 못해 그저 바라볼, 동경의 대상. 그러한 것들이 시인을 통해서 시가 되는 것이었구나. 멀리 있는 아름다움들인 별은, 닿질 못해 바라만 보다간 시로 영그는 것이겠구나.

 

그 모든 시어, 시의 질료인 아름다움들 중 단연히 빛나는 것은 `어머님`과 `당신`인가 보다. 이 두 존재로 시어가 집중되고 집약되고 있다. 위의 모든 별들의 속성인 `멀리 있음`이, 두 존재를 통해 환기되며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여기 언덕에 앉아 위를 바라며, 한없이 먼 곳에서 아름다움으로만 어리는 그 별들을 보고 있으니, 그 별도 나를 본다. 여기 이 많은 별빛으로 내린다.

 

그 별빛들이 내려 적신 이 대지, 언덕 위에 화자는, 갑자기 제 이름자를 써보곤 흙으로 덮어낸다. 그 까닭에 대해선 유명한 해석이 있다. 창씨개명한 제 이름자에 대한 스스로 부끄러움이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


 

 

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제, `서시`를 다시 본다.

 

시작의 서(書)인 `서시` 안, 여러 자연물 시어를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 나름 먼 길을 돌아왔구나. 오늘같이 윤동주가 절로 떠오르는 밤에는 이런 귀치 않은 일도 퍽 좋다.

 

우러름의 대상인 하늘에 대해서야 달리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언제나 부끄러운 시인, 동주는 아무도 없는 곳인 창공의 밑에서조차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있었을 것이니 말이다.

 

잎새에 `이는` 만큼, 즉 잎새를 흔들지도 못하는 그 옅은 바람이 저를 스칠 때마저도, 그는 괴로워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작은 움직임도 좋다. 그는 늘 혼자서도 부끄러워하는 이이고, 그럴 줄을 아는 이였으니 말이다. 그런 그의 안쪽 깊은 곳, 우물에는 그 부끄러움의 원천과 까닭이, 언제나 오뚝 선 채 거기 있다. 여기까지는, 그리 귀치는 않은 흔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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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 안의 수수께끼와 핵심은 그다음, 보시다시피 `별`에 있다. 앞서 보았듯, 그에게 별은 멀리 있는 아름다운 것들, 닿지 못해 바라만 보게 되는 모오든 아름다운 것들이고, 곧 시이다. 더 멋없게 말하자면, 그런 것들이 질료가 되어, 시인의 안에서 시로 영그는 것이겠지.

 

너무나 간절하되 결코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두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떠올릴 수 있는 우리의 일들은 체념뿐이지만, 가끔은 이렇듯 그를 외려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변모시키는 일도 있다. 가질 수 없어 눈물로 고개 돌리는 것이 아닌, 더욱 바라보며 그를 생각하며, 아름다운 언어로 바꾸어내서는 나의 안에 간직하는 일. 동경의 대상은 이제, 나의 시가 된다. 안타까운 사랑은, 이제 고요함으로 승화한다.

 

시인의 하는 일이 이런 것이고, 그래서 시인이 아름다운 이로 이따금 평 받는 것이 아닐지. 이런 일을 두고 우리는 승화라고 일컫기도 하였고, 예술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별`을 `노래`하는 것, 나는 이것이 시의 질료를 시로 만드는, 바로 그 창작의 과정이 아닐까 한다. 별을 찬미하는 노래를 지으니, 곧 시가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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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아픔을 체념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외려 눈물 어린 눈을 모아 더욱 사랑하는 그런 마음, 이제 그 마음이 울려 퍼지면 분명 찬미가 될 것이니. 그의 시 전반이 이렇듯 곱고도 아름다운 까닭이, 그의 시작(詩作) 원리인 이 마음에 있었을지도.

 

그리고 그런 마음의 대상이, 이제 점차 확대될 것임이 예고되고 있다. 시인 스스로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고독이며 동경과 시와 어머니, 그리고 아름다운 말들`에 대한 마음 씀 들을, 이제 모오든 죽어가는 것들로 향하겠노라 선언하고 있는 구절이 여기이구나.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라 함은 당연히, 이 땅 위의 뭇 생명체들일 것이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시의 핵심, 시상을 집약하는 문장이다. 그런데 가만 오래도록 들여다보니, 의아한 생각들이 떠오른다.


 

`스치다`

 

문형 : `명사`가 `명사`에 스치다.

용례 : 칼날이 몸에 스치다.

 

 

무언가 석연찮아, 사전을 찾아본다. 사전의 문형과 용례를 참고하자면, `별이 바람에 스친다`는 진술은, `저 먼 별이 내려와 여기 바람에게로 닿는다`는 의미가 된다. 참으로 의아하다. 나는 여태, 스치는 눈길로 이 구절을 볼 적마다 `별에 바람이 스친다`로 읽고 있었구나. 아마 많은 사람들도 그러했을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면 이제, 왜 그랬던 걸까 하는 질문이 든다.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우`는 국어 문법 시간에 지나가는 투로 들은바, 사동 접미사이다. `자다`가 `재우다`가 되듯이, 만약 `스치운다`의 `-우`가 사동 접미사라고 한다면, 위의 문장은 `별을 바람에 스치게 한다`의 뜻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직감적으로 그런 의미가 아님을 모두 느낀 바 있다. 우리가 그런 해석을 온몸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애초, 사전에 `스치우다`는 그 용례가 없다. `스치게 하다`라는 낱말은 우리말에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는 시적 허용이라 보아야겠다. 앞서 나는 이를, `별이 바람에 스치어진다`라는 뜻, 즉 `스치운다`를 피동으로 해석하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우`가 피동 접미사가 아닌데도, 나는 그리 해석을 하고 있었던 따름이다.

 

이상하지. 왜인지 두 해석 모두 버리고 싶지 않은, 기묘한 욕심이 들었고, 그 마음이 오늘, 이렇게나 기인 글을 낳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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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바람에게 내려온 걸까, 

바람이 저 별에까지 닿은 걸까.

 

별은 시, 모든 아름다움들.

바람은 괴로움을 상기시키는 모든 움직임들.

무엇이 무엇에게로 간 걸까.

 

아름다움이 아우성으로 온 것일까, 아우성이 아름다움에게로 간 것일까. 

오늘의 나는, 이 중 어느 한 편을 들 수 없겠다.

 

윤동주가 생각나는 오늘 같은 밤,

내 별도 바람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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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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