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단편 소설이 주는 여운의 미학 [문학]

진한 여운을 남겼던 단편 소설들을, 당신과 함께 나누고 싶다.
글 입력 2017.04.09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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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 소설은 꽤 진한 여운을 준다. 구석구석 친절하기도 한 장편 소설과는 달리, 하나의 이미지 상으로 떠올려질만큼 함축적이다. 이야기가 시작되고 집중하려 할 때는 서사가 끝난다. 아쉬움에 몇 번 더 돌려 보고는 휘리릭 넘겨 지나간 사소한 문장 하나하나를 다시 눈에 담는다. 손에 잘 잡히기도 해서 마냥 가볍게 읽으려다 가끔은 상념에 빠지게도 한다. 그래서 평소 독후감 쓰기도 좋아라 하는 나는 몇 장의 단편을 읽었음에도 장편 소설 못지 않게 할 말이 많다.
 
 단편은 그런 매력이 있다. 특히나 나에게 진한 여운을 남겼던 작품들을 당신과 함께 나누고 싶다.





첫 번째 단편소설, 박형서 <끄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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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메모를 했다. 작가의 표현력이 좋아 구절구절마다 적어두곤 했는데, 그것보다도 더 좋았던건 서사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끄라비라는 도시를 상상했던 것이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묘사되는 절경에, 그 곳을 가본 적도 없는 내가 저절로 끄라비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주인공은 끄라비에 대한 애정을 표출하고 마치 다정한 애인과 같이 사랑했다. 그의 사랑에 도시는 멋진 풍경과 날씨로 화답했다. 끄라비는 그의 마음 속을 비집고 들어와 하나의 대자연이기도, 또는 애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끄라비가 그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물(物)과 아(我)는 전도되고, 욕망과 집착이 어떻게 개인과 사회를 파괴시키는지 보여 주었다. 또한 여느 소설과 달리 도시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 새로웠는데, 인간 대 인간의 사랑만 다뤄왔던 전통적인 로맨스의 틀을 전복시키기에 충분했다.

 매력적이지 않은가? 인간의 입장에서 다루던 천석고황, 물아일체를 거꾸로 자연을 통해 표현을 하다니 말이다.

 한편, 여기서 주인공과 세 명의 여자들의 만남을 보여주는데, 나는 그가 연인들을 만나는 동안 깊게 사랑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예를 들면 첫 번째 여자와의 만남은 연민에서 시작해 연민으로 끝났다. 겉도는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던 마음에 관계를 이어오다가, 더 이상은 그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하면서 어떠한 연민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면서 그는 끄라비를 생각한다.

 두 번째 여자는 그녀가 5년간 만나왔던 여자다. 그는 둘 사이의 확신을 짓기 위해 같이 끄라비로 떠났다. 하지만 운명인지 숙명인지 자연 재해와 싸우게 된다. 곧 끄라비가 일으킨 재앙이다. 대자연의 욕망과 집착이 무섭도록 드러났다. 처음에 묘사되었던 아름다웠던 도시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질투와 집착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주인공은 끝까지 여자를 지켜내려는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그것이 사랑하는 감정에서 비롯된 행동들은 아니었다고 했다. 역시, 사랑이 아니었다고 했다.

  마지막 여자는 그 일이 있고나서 3년 후에 만나, 함께 결혼을 한 사람이다. 하지만 전혀 사랑하지 않는 여자였다. 불행했던 연애들이 끝나고 그는 결국, 다시 끄라비로 갔다.

  하지만 끄라비는 그를 다시 받아 주지 않았다.

 전과 같이 환영해주지도 않았고, 오히려 끄라비에게 그는 아무 존재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그는 결국 죽음을 통해 남자는 사랑과 고독을 해소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는 끄라비라는 대지 속 일부가 되었고, 도시와 처음 마주했던 순간처럼 날이 개면서 끄라비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의식을 잃어 고통스런 죽음을 맞이하던 그는 깨어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자신의 육신이 천천히 대지 속으로 스며들어가, 하나의 끄라비가 되기를 원했다. 그는 틀림없이 그 하나만을 바라왔던 것이었다.





두 번째 단편소설, 김성중 <개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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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때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개그맨이었다는 설정을 시작으로, 주인공의 결혼과 인생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다 읽고 나서는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이제 좀 집중해서 읽어보려던 찰나 소설이 끝났다. 왠지 모를 뭉클함, 그리고 더 심란해진 감정과 함께. 어떻게 이 소설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작가가 하고픈 말이 무언지 당최 감이 오지 않아 두 세번 더 읽어보았다.

 작품에 종종 반복되어 나타나는 단어는 '어항'이다. 주인공은 ‘직장, 작은 바, 동물원, 결혼’을 어항이라고 표현한다. 어항 속의 세상에서 내내 같은 일상을 보내는 주인공과 물고기는 동일시된 존재 같았다.
 
-철장 안에는 다른 종의 포로들이 반쯤은 긍지를 상실하고 반쯤은 긍지를 간직한 채 앉아있다. 나는 저렇게 온몸을 부딪쳐 본적이 없다. 어느 날 나를 둘러싼 어항이 녹아버리고 늙은 내가 흘러나오는 순간이 닥칠까봐 늘 두려웠다.

 주인공은 일상적인 질서에 대해 순응하다가도, 그 일상적 질서가 깨졌을 때의 공포와 허무에 대해 생각한다. 내 존재의 희미한 방향성, 외로움, 이젠 어디로 가야할 지, 그리고 나를 죄어오는 것들, 그 속에서의 나의 혼란스러운 정체성에 대한 문제로까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주인공은 사람들 틈에서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애썼다. 읽으면서 왠지 나의 모습과도 비슷해 보여 안쓰럽기도, 공감이 가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김성중 작가의 매력이다. 소설이 상상력 속에서 구현되지만, 결코 '현실'이라는 핵심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마 소설 속 문장들이 마음에 박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였을 것이다.

 그리고 주목해 볼 만한 것으로 '죽음'에 대한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부모의 죽음, 남편의 죽음, 옛 연인에 대한 죽음까지. 소설 속 그녀는 죽음에 대해 덤덤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몹시 괴로워한다. 역설적이긴 하다만, 그게 어떤 이유에서야 였든 그녀에게 괴로운 순간은 죽음을 보는 순간들이다.

-맨 처음 떠오르는 영상에 빠져드는 버릇. 연상으로 재빨리 달아난다. 연상은 산불처럼 번져 괴로운 순간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준다.

 그녀는 연상을 통해 순간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일시적으로나마 잊혀지고 잊혀지던 것이 어느 순간에 가면 담담해 질 수 있는 걸까? 기억하고 싶지않은 일이 시간이 지나면 머릿속에서 삭제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의 모든 일들이 아마 자신을 옥죄이는, 탈출하고 싶은 어항이라 여겨졌을 것이다.
 
 
 이 쯤에서 독자인 나는, 그녀가 원하는 삶이 무엇이었을 지 고민해보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고민을 할 때쯤, 주인공은 버드케이지라는 대륙으로 떠난다. 그 곳에서 만나는 ‘키키’는 정말 따뜻한 사람이다. 그녀는 단지 억양과 단어 몇 개로만 키키의 언어를 이해할 뿐이지만 그 곳에서 진짜 '소통'을 느낀다. 주인공은 브라운관으로 나마 볼 수 있는 개그맨과 같은 사람이 아닌 마음이 통하는 상대를 원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나는 인간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주변 사람에게 얼마만큼 따뜻한 사람이었나.


- 나는 어항에서 왔다. 투명하고 편안 했지만 진정한 물길이 아니었다.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어항은 깨졌다.
그녀는 마침내 울음을 뱉어냈고,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마주하며 비로소 자유를 찾는다.


 나 역시도 내 존재에 대해 회의를 느낄 때가 있다. 쉴 새 없이 달려왔지만 변화랄 것이 없는 일상에서 권태와 한계를 종종 느낀다. 소설 ‘개그맨’은 짧지만 강렬했다. 나에게 지금 이 세상이 정해진 답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도 이 어항 속에서 벗어나 큰 바다로 헤엄쳐가고 싶다가도, 사실 그 물결과 파도가 무서워 어항 속에 안주하며 지내는 내 자신이 안쓰럽기도 했다.


다음 구절은 내가 가장 좋아했던 부분이다.
왜인지 좋기도 씁쓸하기도 했던 대목.


내 연인의 사랑스러움을 그대로 전해주는 TV는 얼마나 신기한지. 가끔씩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기호들이 잡힐 때, 그러니까 곤란한 순간 미세하게 떨리는 눈썹이라든가 하품을 참을 때 부풀어 오르는 인중을 발견할 때 나는 수백만 명의 시청자와는 다른 맥락으로 웃을 수 있었다. 그의 유행어를 흉내내는 사람을 발견하는 일도 신기했다. 어디서나 그를 따라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기 때문에 우리가 헤어졌다는 사실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느 밤인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앞 동의 거실을 한참 들여다본 적이 있다. 온 가족이 개그맨이 나오는 방송을 보면서 깔깔거리고 있었다. 순간 저 많은 창문들 안에 TV가 있고 그 안에 내 연인이 들어있다는 생각을 하자 친구 한 명 없는 도시가 다정하게 느껴졌다.

- 개그맨 中






 단편이 주는 여운은 장편보다도 길다.
나는 끄라비가 보였던 애정과 질투를, 개그맨에서 만난 키키를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단편 소설들이 맺는 두루뭉술한 결말들은 내 상상 속을 마음껏 헤집는다. 그것이 바로 단편의 매력이다.  
다음에는 어떤 작품이 무슨 색으로 다가올지 기대가 된다.


[성지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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